서원부원군 한상경의 졸기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이 졸(卒)하였다. 상경의 자(字)는 숙경(叔敬)이니,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다. 문경공(文敬公) 한수(韓脩)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선 서령(司膳署令)에 임명되었는데, 임술년 문과(文科)에 제3인으로 뽑혀서 예의 좌랑(禮義佐郞)에 임명되고 우정언(右正言)으로 옮겼으며, 전리 정랑(田理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공부 총랑(工部摠郞)·종부 령(宗簿令)을 거쳐 임신년에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으로 승진되었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우매, 태조를 추대한 모의(謀議)에 참여하고, 보새(寶璽)를 받들어 태조에게 올렸으므로, 익대 개국 공신(翊戴開國功臣)이란 칭호를 내리었다.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承旨)에 옮겨지고 추충 익대 개국 공신(推忠翊戴開國功臣)으로 승진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가 되었으며, 밖으로 나가서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고, 서원군(西原君)에 책봉되었다. 또 경기좌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건문(建文) 2년에 태종이 왕위에 오르매, 상경(尙敬)에게 이르기를,
"내가 큰 왕업(王業)을 계승하였으매, 세상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여 마음 속으로 실상 어렵게 여긴다."
라고 하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임금이 임금노릇 하기를 어렵게 여긴다. ’는 말이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그 어려움을 능히 아시니,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복이옵니다. 그러나, 이를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임명하였다. 흠차 병부주사(欽差兵部主事) 단목지(端木智)가 오니, 상경에게 명하여 접반사(接伴使)를 삼았는데, 수십 일이 지나도록 예(禮)로 대접함이 더욱 부지런하니, 단목지가 말하기를,
"안평중(晏平仲)은 사람들과 더불어 교제를 잘하고 오래 사귈수록 공경한다고 했는데, 공(公)이 그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밖으로 나가서 풍해(豐海)·강원(江原) 두 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다가, 조정에 들어와서는 공조 판서가 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옮겨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다. 태종 황제가 북방을 순행하매, 상경을 보내어 안부(安否)를 묻게 하였다. 호조 판서가 옮겨졌다. 삼공신(三功臣)이 헌수(獻壽)하는데, 상경이 술잔을 들어 올리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처음에 경이 나에게, ‘임금은 임금노릇 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하며,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 ’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도 잊지 않았다."
라고 하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이미 신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을 아뢰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은,
"무슨 말인가."
라고 하매, 대답하기를,
"처음 시작할 때의 의지가 없지는 않겠지만 제대로 마무리 하기는 어렵습니다."
라고 하니, 또 칭찬하였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와 이조 판서를 역임하여 을미년에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승진되었다. 병신년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상경은 평소부터 풍질(風疾)을 앓았는데, 경자년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슬피하여 예절을 다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병이 더욱 심하였다. 임금께서 매우 염려하여 대언(代言)을 보내어 고기를 먹도록 명하고, 내의(內醫)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고 위문과 물품을 내림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돌아가니, 나이 64세였다. 부고(訃告)가 들리매,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여 즉시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위(弔慰)하게 하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갖추어 주고, 또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덕이 순일(純一)하여 게을리 하지 않음을 간(簡)이라 한다. 상경은 소년 시절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식량(識量)이 정밀(精密)하고 민첩하며, 행실이 단정하고 공손하였다. 장성하여 벼슬에 나아가매, 깨끗하게 자기 몸을 지켰었다. 오랫동안 전선(銓選)을 맡아서 천거한 사람이 공정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는 능히 검소하여 의복과 음식을 정결한 것만 취할 뿐이었다. 어머니를 섬기매 조석으로 안부를 살피고, 몸소 감지(甘旨)를 먼저 맛보아, 비록 관직이 높아지고, 기력이 노쇠(老衰)하여서도 일찍이 이를 폐하지 않았다. 평상시에 스스로 ‘신재(信齋)’라고 칭호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이미 장례(葬禮)를 마치고 나매, 병이 더욱 심해졌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다만 먼저 죽어서 늙은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자식의 일을 다 마쳤으니, 죽더라도 또한 유감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아들은 한혜(韓惠)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2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西原府院君 韓尙敬卒。 尙敬字叔敬, 淸州人, 文敬公 (修)[脩] 之子也。 仕高麗, 拜司膳署令, 擢壬戌文科第三人, 拜禮儀佐郞, 遷右正言, 歷典理正郞、藝文應敎、工部摠郞、宗簿令。 歲壬申, 陞密直司右副代言。 我太祖開國, 與推戴之議, 奉寶璽以獻, 賜翊戴開國功臣之號。 遷中樞院都承旨, 陞推忠翊戴開國功臣、簽書中樞院事、都評議使司。 出爲忠淸道都觀察使, 封西原君, 又爲京畿左道都觀察使。 建文二年, 太宗卽位, 謂尙敬曰: "予承丕緖, 罔知攸濟, 心實以爲難焉。" 尙敬對曰: "古人有言曰: ‘后克艱厥后。’ 今殿下克知其難, 實我東方之福也。 然非知之艱, 行之惟艱。" 太宗嘉納之, 拜參知議政府事。 欽差兵部主事端木智來, 命尙敬爲接伴使, 數旬禮待愈勤。 智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公其人也。" 出爲豐海、江原兩道都觀察使, 入爲工曹判書, 遷知議政府事兼司憲府大司憲。 太宗皇帝巡幸北方, 遣尙敬欽問起居, 遷戶曹判書。 三功臣獻壽, 尙敬稱觴而進, 太宗曰: "予卽位之初, 卿告予以 ‘后克艱厥后, 非知之艱, 行之惟艱。’ 予今不忘矣。" 尙敬對曰: "上旣不忘臣之言, 請更啓一言。" 太宗曰: "何?" 對曰: "靡不有初, 鮮克有終。" 又稱善。 歷參贊議政府事、吏曹判書。 乙未, 陞西原府院君、議政府右議政。 丙申, 拜領議政, 復封府院君。 尙敬素患風疾, 庚子遭母喪, 哀戚盡禮, 由是病益重。 上軫念, 遣代言命啖肉, 使內醫治療, 問賜不絶。 至是卒, 年六十四。 訃聞, 上震悼, 卽遣中使弔慰, 輟朝三日, 官庀葬事, 且命致賻。 諡文簡, 學勤好問文, 一德不懈簡。 尙敬自少不喜遊戲, 識量精敏, 行己端恭, 及長就仕, 淸潔自持, 久掌銓選, 所擧惟公。 居家克儉, 衣服飮食, 取潔而已。 事母定省晨昏, 親臨甘旨, 雖官高衰老, 未嘗廢焉。 常自號曰信齋。 遭喪旣襄事, 疾益篤, 語人曰: "吾有疾久矣, 惟恐先亡, 以傷老親之心。 今人子之事畢矣, 死且無憾。" 子惠。
- 【태백산사고본】 6책 1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2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