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34권, 태종 17년 10월 8일 庚寅 2/2 기사 /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임금이 강무에 구군의 수를 정하다
국역
임금이 말하였다.
"나는 본래 무반(武班)의 자식인데 다행히 태조(太祖)의 권학(勸學)하는 힘을 입어서 사어(射御)681) 와 응견(鷹犬)의 일을 익히지 않고, 글을 읽어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선(承宣)에 이른 뒤에 사어·응견의 일을 익히었고, 또 봄·가을에 강무(講武)하는 것이 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감히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군(驅軍)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실로 깊이 염려가 된다. 이제부터 경기 밖에 강무하는 것은 결단코 다시 행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에 임실(任實)·태안(泰安)·해주(海州)에 간 것은 후회한들 어찌하겠는가? 경기 안에서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각 고을의 구군(驅軍)을 조발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방패(防牌) 등 1천 명을 내고 또 이 같은 무리 1천 명을 쇄출(刷出)하여 합해서 2천 인이면 족하다."
- [註 681]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
원문
태종 17년 (1417) 10월 8일
국역
임금이 말하였다.
"나는 본래 무반(武班)의 자식인데 다행히 태조(太祖)의 권학(勸學)하는 힘을 입어서 사어(射御)681) 와 응견(鷹犬)의 일을 익히지 않고, 글을 읽어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선(承宣)에 이른 뒤에 사어·응견의 일을 익히었고, 또 봄·가을에 강무(講武)하는 것이 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감히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군(驅軍)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실로 깊이 염려가 된다. 이제부터 경기 밖에 강무하는 것은 결단코 다시 행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에 임실(任實)·태안(泰安)·해주(海州)에 간 것은 후회한들 어찌하겠는가? 경기 안에서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각 고을의 구군(驅軍)을 조발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방패(防牌) 등 1천 명을 내고 또 이 같은 무리 1천 명을 쇄출(刷出)하여 합해서 2천 인이면 족하다."
- [註 681]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
원문
원본
태종 17년 (1417)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