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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6일 양력 2번째기사 1907년 대한 융희(隆熙) 1년

장례원 경 신기선이 관례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거룩한 황제가 자리를 물려주어 폐하가 이어받게 되었으므로 나라의 영원한 복과 경사가 지금부터 시작되었으니 신하들과 백성들은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폐하를 우러르면서 다같이 기뻐합니다. 신이 이때에 예관(禮官)에 있으면서 예를 상고하고 의논을 결정할 때에는 언제나 서툴거나 잘못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나라의 예법에 한두 가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서 한 번 진달하려고 생각하였지만 매번 직분을 벗어나는 것을 혐의하여 그만두곤 하였습니다. 지금 성인이 새 교화를 펴는 초기에 마침 유사(有司)의 반열에 있어서 의리상 감히 끝내 침묵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신은 듣건대, 제왕의 가법(家法)에는 의(義)를 은혜보다 중하게 여기므로 비록 부자간의 친한 사이에도 임금과 신하의 분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자가 임금에 대해서 반드시 자기를 ‘신(臣)’이라고 부르고, 자리를 이은 예묘(禰廟)와 조묘(祖廟)에서 반드시 ‘신’이라고 부르며,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제왕이 상황(上皇)과 상왕(上王) 앞에서 반드시 ‘신’이라고 부릅니다. 역대의 고사(故事)를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으며 우리 왕조 500년간에도 시종 준행하고 혹시라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유년(1897) 이후로 이 규례를 갑자기 변경하여 종묘(宗廟)의 축문(祝文)에도 ‘신’을 일컫지 않으며, 폐하가 세자로 있으면서 상소할 때도 ‘소자(小子)’라고 쓰고 ‘신’을 일컫지 않았으니, 신은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로 의리를 가려 임금과 신하의 분의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신은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되지 않아서 회복하는 것은 군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종묘의 축문에도 옛 규례를 준행하여 ‘신’ 자를 쓰고 폐하께서도 또한 태황제 앞에서 반드시 ‘신’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이번 덕수궁(德壽宮)에 공손히 올리는 책문(冊文) 가운데서도 전례대로 ‘신’ 자를 쓰소서.

신이 듣건대, 공자(孔子)는 만대 제왕들의 스승인데, 스승의 존귀함은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아서 세 사람에게 생장하여 한 사람을 섬기는 의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韓)나라 이후로 제왕들이 문묘(文廟)에 제사 지낼 때에 존경을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제사 때와 같게 하였고, 그 축문에는 대체로 ‘감히 밝게 고합니다.〔敢昭告于〕’라는 글자를 써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新羅), 고려(高麗) 이후로 본조에 이르기까지 시종 준행하고 혹시라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유년 이후로 갑자기 ‘감히 밝게 고합니다.〔敢昭告〕’를 ‘삼가 제사지냅니다.〔謹祭〕’로 고쳤으니, 이것은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숭상하는 의리가 전혀 아니기에 아주 온당치 않습니다. 지금은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지고 이단(異端)의 말이 떠들썩한 때인 만큼 비록 그 예를 더하여 높이더라도 오히려 유지해 내지 못할까 두려운데, 더구나 축문 내용에서 전보다 깎아내리는 것처럼 하니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올가을 석채(釋菜) 때부터는 빨리 옛 규례를 회복하여 ‘감히 밝게 고합니다.’라고 쓰도록 하소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자의 봉작(封爵)도 왕이니 지금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예수(禮數)가 의당 좀 달라져야 한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를 높이는 것은 그 도를 높이는 것이고 작위 때문이 아닙니다. 하물며 주(周)나라 때의 왕은 바로 지금의 황제인 만큼 축문의 어구에 어찌 왕이 된 때와 황제가 된 때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상서(尙書)》를 살펴보건대, ‘제사를 함부로 지내는 것을 이것을 일러 공경하지 않는다 하니, 예는 번거로우면 신을 섬기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제사를 주관함에 가까운 사당(祠堂)에만 풍성하게 하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는 인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지만 또한 한계와 절도가 있는 법입니다. 상사가 난 지 3년 안에는 그 부모를 차마 죽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대상(大祥) 제사를 지내고 빈소를 걷은 다음에는 귀신으로 섬기면서 사계절의 속절(俗節)과 삭제(朔祭), 망제(望祭)만을 지내니, 이것이 삼대 이후로 공사간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공통된 의리이고 큰 법입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경효전(景孝殿)과 의효전(懿孝殿)에 대하여 3년이 지난 후에도 오히려 아침저녁의 상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지내는데, 이것은 예에 없는 것입니다. 심정은 끝이 없지만 예는 한계가 있습니다. 상복은 3년이 넘도록 입을 수 없는 만큼 상식 제사를 어떻게 3년을 넘길 수 있겠습니까?

국초에 문소전(文昭殿)에 달마다 제사 지내고 날마다 제사 지내는 규례가 있었는데 중세의 유신(儒臣)이 그것이 예가 아니라 극력 말하여 폐지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이 폐지한 것을 지금 다시 행하되 더욱 심하게 하니, 어찌 아주 온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사를 함부로 지내거나 가까운 사당에만 풍성히 지낸다면 장차 만대의 의논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잘못을 고치기를 꺼리지 말고 경효전과 의효전의 상식과 다례를 빨리 중지하여 선성(先聖)과 선왕의 예에서 벗어나지 마소서.

의논하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이 몇 가지는 다 명(明)나라의 예에 근거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신은 고루하여 명대의 전례(典禮)를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명 나라 태조(太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다음 대번에 예를 정하되 대부분 옛 법대로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의 상사도 모두 참최(斬衰)를 행하여 천하 후세의 비방을 받았습니다. 우리 왕조에는 원래 우리의 전례가 있고 한결같이 《주례(周禮)》의 옛 법을 준수하여 왔으니 무엇 때문에 역대 임금이 준수하던 고칠 수 없는 정상적인 예를 어기고 명 나라 태조의 일시적인 근거 없는 전례를 본받겠습니까?

신은 보잘것없는 학식으로 망령되게 예제(禮制)를 의논하였으니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는 맞는 의견이 있는 법이니 반드시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신의 이 말을 조정 관리들에게 널리 하문하여 며칠 안으로 고쳐서 나라의 예를 바로잡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을 내각(內閣)의 대신(大臣)과 원임 의정(原任議政)에게 하문하여 들이라."

하였다.


  • 【원본】 2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8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掌禮院卿申箕善疏曰: "伏以受, 龍飛御極, 宗祊延萬年之祚, 休恤伊始, 臣民仰重華之始, 歡忭惟均。 臣於此際待罪春官, 考禮定議, 恒懼疎謬。 而嘗於近日國家之禮, 竊有一二抱疑者, 思欲一陳, 每嫌越俎而止。 今値聖人新化之初, 適在有司之列, 義有不敢終默者, 惟聖明垂察焉。 臣聞帝王家法, 義重於恩, 雖父子之親, 而有君臣之分。 故儲君之於至尊, 必稱‘臣’, 嗣君之於禰廟、祖廟, 必稱‘臣’, 受禪帝王之於上皇、上王, 必稱‘臣’, 歷代故事, 灼然可考, 我朝五百年終始遵行, 未之或改也。 自丁酉以後, 忽變是例, 宗廟祝文, 不稱‘臣’, 陛下之在儲宮也, 陳疏稱小子而不稱‘臣’, 臣未知其何由也。 以恩掩義, 不著君臣之分, 臣以爲決不可也。 不遠而復, 君子所貴。 伏願繼自今, 宗廟祝文, 遵舊例書臣字, 陛下亦必稱臣於太皇帝前, 今番德壽宮祗上冊文中, 依例書‘臣’字焉。 臣聞孔子, 萬世帝王之師也, 師道之尊, 齊於君父, 有‘生三事一’之義。 故自以來, 帝王之祀孔廟, 其尊敬, 等於宗社, 其祝文, 大抵書‘敢昭告于’字, 而我東自以來, 訖于本朝, 終始遵行, 未之或改也。 丁酉以後, 忽‘改敢昭告’爲‘謹祭’, 甚非尊師崇道之義, 萬萬未安。 今當斯文墜地; 異言喧豗之際, 雖增其禮而尊之, 猶懼不能扶植。 況於祝辭, 有若降損於前乎? 伏願自今秋釋菜, 亟返舊例, 以‘敢昭告于’書之焉。 或曰, ‘孔子封爵爲王, 則今於御皇帝位之後, 禮數宜有少異’。 此大不然。 尊孔子者, 尊其道也, 非爲爵也。 況時之王, 卽今之皇帝, 祝辭句語, 寧有別於爲王、爲皇之時乎? 臣謹按書曰, ‘黷于祭祀, 時謂弗欽, 禮煩則亂, 事神則難’。 又曰, ‘典祀無豐于昵’。 禮緣情起, 亦有限節。 三年之內, 不忍死其親, 故象生而朝夕饋奠, 旣祥而靈几遂撒, 則事之以神, 而惟有四時俗節朔望之祭奠焉。 是乃三代以來, 公私喪祭禮之通義大防也。 今伏見景孝殿懿孝殿, 三年以後, 尙行朝夕上食晝茶禮, 此無於禮也。 情雖無窮, 禮則有限。 服旣不能過三年, 則饋奠何可過三年乎? 國初文昭殿, 有月祭、日祭之例, 中世儒臣, 力言其非禮而廢之。 先王所廢, 今復行之, 而又甚焉。 豈不萬萬未安乎? 黷于祀而豐于昵, 將貽萬世之議。 伏願聖明不憚日月之更, 兩殿上食茶禮, 亟爲停廢, 無踰先聖先王之禮焉。 議者或曰, ‘是數條者, 皆有禮之可據’。 臣之該陋, 未習代典禮。 然 太祖馬上得天下, 率爾定禮, 多不師古, 甚至父母喪, 皆行斬衰, 受天下後世之譏。 我朝則自有我家典禮, 一遵《周禮》之舊, 何可違百王不易經常之禮, 而效明祖一時無稽之典乎? 臣以蔑學, 妄議禮制, 死罪死罪。 然一得之見, 未必無補, 伏乞陛下以臣此言, 博詢廷寮, 不日釐改, 以正邦禮, 千萬幸甚。" 批曰: "疏辭詢問于內閣大臣、原任議政以入。"


  • 【원본】 2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8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