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3월 30일 양력 1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동, 남 두 대문의 좌우 성첩을 각각 8간씩 헐어 버리다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군부 대신(軍部大臣) 권중현(權重顯)이 아뢰기를,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電車)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門樓)의 좌우 성첩(城堞)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線路)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 【원본】 52책 4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62면
- 【분류】교통-육운(陸運) / 건설-건축(建築)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