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대왕 천릉 지문(遷陵誌文)
천릉 지문(遷陵誌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상(今上) 6년198) 에 인릉(仁陵)의 하례(下禮)를 거행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고 나서 비로소 기전(畿甸)의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살펴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또 임금이 몸소 서쪽으로는 희릉(禧陵)에 이르기까지와 동북쪽으로는 광릉(光陵)이 있는 달마동(達摩洞)에 이르기까지를 살폈고, 다음해인 병진년199) 에 헌릉(獻陵)에 이르러 오른쪽 등성이 자좌(子坐)의 언덕에서 길지(吉地)를 복득(卜得)하였다. 10월 4일 찬도(菆塗)200) 를 열고 11일에 의식(儀式)대로 옮겨 모셨는데, 유지(幽誌)는 전의 것을 그대로 쓰고 단지 갑오년201) 이후의 사실만을 기록하여 부지(附識)하도록 명하였는데 영릉(寧陵)의 고사(古事)를 따른 것이다.
아! 지금으로부터 승하하신 해까지는 23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백관(百官)·삼군(三軍)과 만백성들이 ‘아!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생각을 지닌 것이 변함없었으며 흠위(廞衛)가 출발하기 위해 난조(灤朝)에 다시 임어하였을 적에 대소 신민(臣民)들의 호곡(號哭)이 초상(初喪) 때와 같았으니, 인심(仁心)과 인문(仁聞)이 사람에게 깊이 배어든 것이 어찌 겉치레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옛날 신유년202) 에 김귀주(金龜柱)·김한록(金漢祿)의 당여들이 왕이 어린 임금이라 여겨 정병(政柄)을 훔쳐 은언군(恩彦君) 인(䄄)의 화(禍)를 꾸며 만들었고, 청(淸)나라에 무주(誣奏)하기에 이르렀다. 임오년203) 장헌 세자(莊獻世子)가 훙서(薨逝)한 구갑(舊甲)이 돌아옴에 이르러 왕이 침원(寢園)에 전알(展謁)하고 유지(有旨)를 내려 심도(沁都)에 구금되어 있던 일가(一家)를 완전히 석방시켰는데, 그 사지(辭旨)가 너무도 측달(惻怛)하였으므로 읽는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기유년204) 에 헌종(憲宗)이 훙서(薨逝)하고 후사(後嗣)가 없자, 금상 전하(今上殿下)께서는 은언군의 손자이며,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의 제삼자(第三子)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다. 이 분은 장헌 세자의 증손(曾孫)으로 영종 대왕(永宗大王)의 혈선(血禪)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금상(今上) 경술년205) 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석(卞晰)하여 신유년(辛酉年)의 무주(誣奏)를 고치는 데 대한 준허(準許)를 받았는데, 이는 전의 지문(誌文)에는 미처 기재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삼가 이와 같이 기술한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일이 모두 의리 합치되면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항상 곧다.’라고 하였다. 주자(周子)206) 는 말하기를, ‘본성대로 편안히 행하는 것을 성(聖)이라 하고 그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대순(大順)이요, 대화(大化)인 것이다. 더구나 방훈(放勳)207) 의 만백성이 일신(一新)되어 화평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이것이 구족(九族)을 친근하고 화목하게 한 데서 시작된 것인 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 왕은 이에 대해 모두 총괄(總括)하면서 조목조목 관통 통하였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덕온 공주(德溫公主)는 갑오년208) 이후에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下嫁)하였으나 일찍 졸서(卒逝)하여 소생이 없다. 헌종(憲宗)무신년209) 존호(尊號)를 체성 응명 흠광 석경(體聖凝命欽光錫慶)이라고 추상(追上)하였으며, 금상(今上) 계축년210) 에 존호를 계천 배극 융원 돈휴(繼天配極隆元敦休)라고 추상하였다. 헌종(憲宗)이 처음 맞은 왕후(王后)는 김씨(金氏)로 영돈녕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따님이었으며, 다시 맞이한 왕후는 홍씨(洪氏)로 영돈녕 익풍 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따님이다. 금상(今上)은 김씨(金氏)를 맞이하였는데 영돈녕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이다." 【판중추부사 김좌근(金左根)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32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198]금상(今上) 6년 : 1855 철종 6년.
- [註 199]
병진년 : 1856 철종 7년.- [註 200]
찬도(菆塗) : 빈전(殯殿) 안의 임금의 관(棺)을 옮기는 일.- [註 201]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註 202]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203]
임오년 : 1822 순조 22년.- [註 204]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註 205]
경술년 : 1850 철종 원년.- [註 206]
주자(周子) : 주돈이(周敦頣). 호는 염계(濂溪).- [註 207]
방훈(放勳) : 요(堯)임금.- [註 208]
○遷陵誌文:
今上六年, 議仁陵擧下禮, 始命遍相畿甸近遠, 旣又上躬審西至于禧陵東北, 至于光陵之達摩洞, 而粤明年丙辰, 至于獻陵, 卜得吉於右岡子坐原。 十月四日戊子, 啓菆塗, 十一日乙未, 克襄惟儀, 幽誌用舊貫, 命只錄甲午以後事實, 以附識之, 遵寧陵古事也。 嗚呼! 今距登遐二十有三年矣, 而百官三軍, 萬黎獻於戲不忘之思, 如一日焉, 廞衛戒堩, 復臨灤水之朝, 小大號遑, 若喪之初, 仁心仁聞, 入人之深者, 是豈可襲而取哉? 昔在辛酉, 金龜柱ㆍ漢祿之黨, 謂王沖辟, 竊政枋構恩彦君之禍, 至又誣奏彼中。 及壬午莊獻世子薨逝, 舊甲之回也, 王, 謁于寢園, 下旨全釋一家之在沁都者, 而辭旨惻怛, 讀者無不流涕。 己酉, 憲宗薨無嗣, 今上殿下, 以恩彦君之孫全溪大院君之第三子, 入承大統。 寔莊獻世子, 曾孫, 英宗大王血禪也, 豈非天哉? 而今上庚戌, 專价卞晣, 辛酉誣奏得準, 此前誌所未及載, 謹述之如此。 朱子曰, ‘事皆合義, 自反常直。’ 周子曰, ‘性焉安焉之謂, 聖莫知其然之謂神’, 是謂大順而大化也。 況放勛時雍, 自以親旣睦而權輿之者乎? 嗚呼! 王於此, 其兼總而條貫之矣。 誕二男三女, 德溫公主 以甲午後, 下嫁南寧尉ㆍ尹宜善, 早卒無育。 憲宗戊申, 追上尊號曰體聖疑命欽光錫慶, 今上癸丑, 追上尊號曰 ‘繼天配極隆元敦休。 憲宗初聘金氏, 領敦寧永興府院君 祖根女, 再聘洪氏, 領敦寧益豐府院君 在龍女。 今上聘金氏領敦寧永恩府院君 汶根女。 【判中樞府事金左根製。】
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凞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文安武靖英敬成孝大王實錄附錄續編
- 【태백산사고본】 36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32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