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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5권, 순조 3년 12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1803년 청 가경(嘉慶) 8년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을 거두고 환정하다. 전함의 대신 조진정 등이 좌의정 서용보를 무함하다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환정(還政)172) 하였다. 이때 일종의 괴귀(怪鬼)한 무리가 좌의정 서용보(徐龍輔)를 반드시 제거하려고 전함(前銜)의 대신(臺臣) 조진정(趙鎭井)을 사주하여 소장을 지어서 헐뜯어 무함하게 하였으나, 재일(齋日)을 당하여 입철(入徹)하지 못하고 도로 가지고 갔는데, 서용보가 이를 은밀히 듣고는 빈대(賓對)의 명을 내렸지만,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대왕 대비가 좌상이 나오지 않은 연고를 물으니 우의정 김관주(金觀柱)가 그 대략을 아뢰었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지금이 어떠한 시기인가? 믿는 자는 오로지 좌상 한 사람뿐인데, 이 무리가 반드시 공척(攻斥)하여 제거하고자 하였으니,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이와 같고서야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니, 김관주(金觀柱)와 판부사 이시수(李時秀)가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처분하여 훗날을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이것은 유언 비어(流言蜚語)와 다름이 없어서 족히 책망할 말도 못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이 이것 때문에 스스로 인혐(引嫌)하고 있으니, 매우 개연(慨然)스럽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돈독하게 부른 다음 그가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려 차대를 행하라고 명하니 서용보가 명을 받들고 등대(登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차대를 오늘로 앞당겨 정한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경신년173) 의 창황(蒼黃)하고 망극(罔極)한 날을 당하여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내가 본래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이 없는데다가 또 여러 해 동안 고질(痼疾)을 앓아 왔으므로, 보통 사람처럼 일을 책임질 수 없었던 것이 오래 되었다. 불행하게도 망극한 때를 당하여 부득이 종국(宗國)을 위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담당하여 끌어온 지 3년이 되어 가례(嘉禮)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니, 이 마음의 기쁨이 또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나의 처음 뜻은 새해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했었는데, 그 사이에 큰 재이(災異)를 당하였으니, 시기(時期)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써 마땅히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 비상(非常)한 일인데, 이런 비상한 재이가 있게 된 것이다. 올해는 주상의 보령(寶齡)이 오히려 1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새해 초두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하였다. 지금 새해가 며칠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러한 하교가 있게 된 것은 수렴 청정의 칭호를 또한 새해에 이르기까지 끌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주상의 슬기로운 모습이 일찍 성취되고 성학(聖學)이 날로 진보되었으니,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할 수 있게 되어서 큰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부덕(否德)하고 또한 지식이 없는데도 오랫동안 이 책임을 담당하여 조상(朝象)은 진안(鎭安)된 것이 없고 기강(紀綱)은 진쇄(振刷)된 것이 없었으니, 항상 부끄러워하였는데, 과연 재이가 여러 번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북(西北)이 불탄 재이와 사고(社庫)가 불탄 변고는 모두 비상(非常)한 일에 관계되는데다 정전(正殿)이 불타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또 마땅히 비가 내릴 시기에 비가 내리지 않고 눈이 내릴 시기에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는 마땅하지 못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러한 재이를 부른 것이다. 새해에는 다시 수렴 청정하지 않으려 한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통유(洞諭)하고 차대를 앞당겨 정한 것이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 소자(小子)가 충년(沖年)에 있으면서 우러러 자전(慈殿)을 의지하여 국사(國事)로써 노고를 끼쳐드려 오랫동안 효도(孝道)를 어겨 왔으니, 하정(下情)에 항상 황송(惶悚)하였습니다만, 이제 환정(還政)의 하교가 계시니, 우러러 이양(頤養)하는 방도를 생각한다면 비록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오직 내가 국사(國事)에 생소하여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까 두려우니, 이것이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경사스러운 날이다. 주상의 나이가 곧 15세에 차게 되어 이제 친히 정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단지 기뻐하여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이시수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국가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이것이 누구의 공덕(功德)입니까? 선조(先朝)의 유업을 주고받을 때를 당하여 묵묵히 대책(大策)을 협찬(協贊)하여 성궁(聖躬)을 보호하신 것은 곧 우리 자성 전하의 공이었고, 기미에 밝아 간사한 싹을 꺾어 종사(宗社)를 부지하여 안정시킴으로써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을 계도(啓導)한 것도 또한 우리 자성의 공이었습니다. 경신년174) 에 천붕(天崩)의 슬픔을 당하여 애통하고 황급함이 갑자기 닥쳐 국사(國事)를 어찌할 바를 몰라 신 등이 눈물을 흘리며 청하자, 자성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굽어 따르시고, 동조(東朝)에 광림(光臨)하여 조용히 온화하게 수렴 청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원(初元)의 정사를 인도하여 나라가 반석(盤石)같이 공고해지고, 의리를 천명(闡明)하여 일성(日星)같이 밝히셨습니다. 간흉(奸凶)을 물리쳐 조정이 청명(淸明)해지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덕화(德化)가 충만해졌습니다. 옛 성왕(聖王)과 의벽(懿辟)을 거슬러 논하건대, 이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었으니 온 나라에서 우러러 바라보는 바이고, 전하께서도 우러러 본받는 바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셔서 예학(睿學)이 날로 성취되고 있으니, 이제 서정(庶政)을 친히 총섭(總攝)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성께서는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천승(千乘)의 봉양을 누리시니, 우러러 생각하건대, 복록(福祿)의 성대함이 또한 더불어 견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자교(慈敎)를 내리시니 흠앙(欽仰)하고 송축(頌祝)하며 기뻐서 춤추게 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을 거둔다는 언교(諺敎)를 내리고,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미망인이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담당해 온 지 이미 4년이 되었다. 내가 궁중의 한낱 부인(婦人)으로서 무슨 지식(知識)과 덕량(德量)이 있어서 이를 담당할 수 있었겠는가마는, 열성조(列聖朝)부터 선왕(先王)이 불행히 일찍 승하하여 나와 같은 처지를 만나면, 종사(宗社)를 위해 감히 사양하지 못했던 경우가 이미 구전(舊典)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내가 또한 힘써 따르고 감히 사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3,4년 이래로 스스로 과덕(寡德)을 돌아보건대, 조금도 국사(國事)에 도움되는 것이 없었고, 한갓 그 책임에 부응하지 못하는 허물만 쌓였으니, 백성들이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곧 나의 허물이고, 조상(朝象)이 해이해진 것도 곧 나의 허물이며, 세도(世道)가 안정되지 않는 것도 곧 나의 허물이요, 기강(紀綱)이 날로 해이해져서 인심을 수습할 수 없게 된 것도 내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허물 아님이 없으니, 이 때문에 하늘이 재이를 내린 것이다. 올해의 농사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끼니를 잇기 어려운 근심이 있는데, 초여름에 서북(西北)에서 며칠 사이에 화재가 연달아 일어났고, 또 지난달에는 사고(社庫)가 불탔다. 여러 가지로 재이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진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수백 년 동안 임어(臨御)했던 정전(正殿)이 몇 시간 사이에 죄다 불타 버렸으니, 재이가 계속됨이 어떻게 이토록 극도에 이르는 것인가? 지난 사첩(史牒)을 상고해 보아도 드물게 있는 일인데, 진실로 그 까닭을 구명해 보면 내가 부덕한 몸으로 당치 않은 지위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더욱이 지금 주상의 춘추가 장성하였고, 어진 자질(資質)이 하늘에서 태어나 덕성(德性)이 날로 성취되고 성학(聖學)이 날로 진취되었으니, 만기(萬機)·서정(庶政)을 족히 살펴서 모두 결단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처지로 어떻게 한결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서 국체(國體)를 존중하여 대경(大經)을 바로잡기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상이 누누이 억지로 만류하며 사지(辭旨)가 간절하고 정리(情理)가 측은하니, 내가 이를 듣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형편에 이르러 내가 어떻게 차마 한갓 나의 뜻만 지킴으로써 주상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청하는 성의(聖意)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수렴 청정을 거두되, 서정(庶政) 외에 군국(軍國)에 관한 대정령(大政令)과 형상(刑賞)에 관한 대처분(大處分)과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등의 일은 내가 우선 참여하여 논함으로써 주상이 홀로 근심하는 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자세히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이후로 믿는 것은 오로지 경들뿐이다. 내가 진실로 부덕하고 지식이 없어서 세상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는데, 이제 오로지 경들만 믿는다. 이제부터 다시는 면유(面諭)하지 못할 형편이니, 더욱 힘써서 모쪼록 한층 더 공변되고 정직한 마음으로 나의 주상을 보도(輔導)하도록 하라. 임금을 보도하는 도리는 오로지 백성을 돌보는 데 있으니, 방심하지 말도록 하라. 오늘날 세도는 무너져 어지럽고 인심은 함닉(陷溺)되었는데, 만약 주상의 보주(寶籌)가 더욱 장성하여 만기(萬機)를 친히 재단(裁斷)하기에 이른 후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함께 힘써서 단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도만 생각해야 할 것이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는 민폐를 제거하는 데 달려 있다. 이후로는 영구히 면칙(面飭)하는 길이 막히게 될 것이니, 모든 일을 오로지 대신들만 믿을 따름이다."

하니, 이시수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삼가 마땅히 마음속에 새겨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춘추가 정성(鼎盛)하셔서 친히 서정(庶政)을 총찰(總察)하시며 자전(慈殿)을 봉양하게 되었으니, 자덕(慈德)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이므로, 금옥(金玉)에 새겨서 자휘(慈徽)를 유양(揄揚)할 도리를 신 등이 우러러 청하니,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반포해야 합니다.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혜경궁에 경외(京外)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진하(陳賀)하는 등의 절목을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7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註 172]
    환정(還政) : 섭정하던 사람이 정권을 임금에게 맡김.
  • [註 173]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174]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己丑/次對。 大王大妃撤簾還政。 時有一種怪鬼之徒, 必欲除去左議政徐龍輔, 嗾前銜臺臣趙鎭井, 構疏詆誣, 値齋日, 不得入徹, 還爲持去。 龍輔微聞之, 賓對命下, 而不敢進身。 大王大妃詢左相不進之故, 右議政金觀柱奏其槪。 大王大妃曰: "此何等時? 所恃者, 惟左相一人, 而此輩必欲攻斥而去之, 世道、人心如此, 將何以爲國乎?" 觀柱與判府事李時秀幷讀, 隨現嚴處, 以懲日後。 大王大妃曰: "此無異蜚語, 本非足數之言, 而以體國大臣, 以此自引, 萬萬慨然矣。" 仍命敦召, 待其造朝, 行次對, 龍輔承命登對。 大王大妃謂諸大臣曰: "次對之進定於今日, 意有在矣。 當庚申蒼黃罔極之日, 不得不當此垂簾, 予素無過人知識, 又抱多年貞疾, 不可以常人之事責之者久矣。 不幸値罔極之際, 不得已爲宗國, 而敢當不敢當之地, 捱過三年, 嘉禮順成, 此心之懽悅, 又當如何? 予之初意, 擬於新元, 卽爲撤簾矣, 其間災異之見大矣, 以非其時之人, 居不當處之地, 此是非常之事, 有此非常之災。 此歲則主上寶籌, 猶未滿十五歲, 故新元之初, 卽欲撤簾矣。 今新元只隔數日, 而有此敎者, 垂簾之號亦不欲拖至於新元故也。 主上睿姿夙成, 聖學日就, 可以酬應萬機, 而可與有爲也。 予以否德, 亦無知識, 久當此任, 朝象無以鎭安, 紀綱無以振刷, 居常愧恧, 果然災異屢現。 西北灰燼之災、社庫回祿之變, 俱係非常, 而至於正殿失火而極矣。 且當雨之時而不雨, 當雪之時而不雪, 其咎何在? 此由於以不當之人, 爲不可當之事, 故致此災異也。 新年則更不欲垂簾, 故迨此洞諭, 進定次對。" 上曰: "予小子在沖年, 仰庇慈殿, 以國事貽勞, 久違孝道, 下情居常悚惶。 今有還政之敎, 仰惟頤養之方, 雖爲多幸, 予惟生踈於國事, 恐無以克荷丕責, 是用悶然。" 大王大妃謂諸大臣曰: "此慶會也。 主上恰滿十五歲, 今當親政, 卿等但當欣祝矣。" 時秀等齊聲對曰: "國家保有今日, 是誰之功德也? 當先朝授受之際, 默贊大策, 保護聖躬, 卽我慈聖殿下之功也, 炳幾折萌, 扶安宗社, 以啓億萬年無疆之休, 亦我慈聖之功也。 及遭庚申天崩之痛, 哀遑震剝, 國事罔極, 臣等垂涕泣而仰請, 慈聖垂涕泣而俯循, 光臨東朝, 薕帷靚穆。 啓迪初服, 鞏如磐泰, 闡明義理, 昭如日星。 屛黜奸凶, 而朝著淸明, 愛恤民生, 而德化洋溢。 溯論從古聖王懿辟, 莫之與京, 一國之所仰望也, 殿下之所仰成也。 惟我聖上, 春秋鼎盛, 睿學將就, 今當親總庶政。 而我慈聖釋萬幾之煩, 享千乘之養, 仰惟福祿之盛, 亦莫之與比也。 慈敎之下, 欽仰頌祝, 不覺蹈舞之至。" 大王大妃下撤簾諺敎, 使承旨讀之。 曰:

未亡人, 當此至重之擔負, 今已四年。 予以宮中一婦人, 有何知識德量, 可以當此? 而自列聖朝, 先后不幸, 遇如予處地, 則爲宗社不敢辭, 已成舊典, 故予亦黽勉不敢辭者此也。 然三、四年來, 自顧寡德, 無一分有助於國事, 徒積未副其責之咎, 生民之倒懸, 卽予之咎, 朝象之泮渙, 卽予之咎, 世道之不靖, 卽予之咎, 紀綱日就陵夷, 人心莫可收拾者, 無非予未副其責之咎, 是以天降災異。 今年穡事告歉, 民有艱食之憂, 初夏西北之火, 幷起於數日之內, 且於前月社庫失火。 種種災異之驚心者, 實無可言, 而此猶不足, 數百年臨御之正殿, 數刻之間, 蕩爲灰燼, 災異之荐仍, 胡至此極? 考諸往牒, 亦所稀有, 苟究厥由, 誠以以予否德, 久居不當之地而然也。 況今主上春秋長成, 聖質天縱, 德性日就, 聖學日進, 萬機庶政, 足可以裁察摠斷。 然則以予所處, 豈可一向蹲仍, 不思所以尊國體而正大經乎? 然主上縷縷强挽, 辭旨懇摰, 情理惻怛, 使予聞之, 不覺抆涕。 到此地頭, 予豈忍徒守己志, 以負主上至誠懇請之聖意乎? 自今日撤簾, 庶政外軍國大政令、刑賞大處分、義理大關係等事, 予不得不姑爲參論, 以分主上之獨憂。 其令廷臣知悉。

讀訖, 大王大妃語諸大臣曰: "從今以往所恃者, 惟於卿等。 予實否德, 無有知識, 不能靖世安民, 今則專恃卿等, 從此勢將不復面諭矣, 益加勉旃, 須以一段公直之心, 導我主上。 而輔君之道, 專在於恤民, 其勿放心也。 顧今世道壞亂, 人心陷溺, 若至主上寶籌益長, 親裁萬機之後, 則可以釋心。 而今則當一心同力, 只思安民之道, 安民之道, 在於祛民瘼。 此後永阻面飭之路, 凡事專恃於大臣矣。" 時秀等齊聲對曰: "謹當銘肺, 殫竭微誠。" 龍輔啓言: "聖上春秋鼎盛, 親摠庶政, 養隆長樂, 慈德彌光。 此實宗社莫大之慶, 摸金刻玉, 揄揚慈徽之道, 臣等續當仰請, 而上告下布。 大王大妃殿、王大妃殿、中宮殿、惠慶宮, 京外進箋, 陳賀等節, 請令該曹, 擇日擧行。" 從之。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7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