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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7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고 의사 이사룡을 성주 목사로 추증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라고 전교하다

고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을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추증하고 그 마을에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 명장(名將)으로는 충무공을 맨 먼저 손꼽을 것이지만 군사 출신으로서 천하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오직 이사룡이 그 사람일 것이다. 사룡성주 사람으로 일찍이 군적(軍籍)에 편입되었는데, 적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상황에서 금주(錦州)에 가서 싸울 것을 요청하였다. 거기서 명(明)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대치하고 있다가 실탄을 재지 않은 공포를 쏜 것이 적군에게 발각되어 적군이 여러 차례 칼질을 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세 차례를 이와 같이 하고 끝내 적군에 의해 죽고 말았다. 명나라 장수가 이를 염탐하여 알고는 장대에다 특별히 ‘조선 의사 이사룡’이라고 써서 걸었었다.

아, 신사년의 전투097) 에서 만일 사룡이 한 번 목숨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장차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옛날 당(唐)나라 위사(衛士)가 순절(殉節)한 일을 두고도 주자(朱子)는 오히려 그를 표창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작은 나라의 군사로서 명나라를 위하여 의리를 지켜 순절하여 특출하게 우리 나라의 빛나고 걸출한 인물이 되었는데 신분과 문벌이 미천한 관계로 아직껏 표창하는 은전이 빠졌으니 어찌 풍교(風敎)를 세우고 이륜(彛倫)을 열어주는 뜻이겠는가. 성주 포수 이사룡에게 특별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추증하고 이어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도록 하며, 그의 후손 가운데 벼슬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군문에 등용시키고 보고하도록 하라.

저번에는 본주 목사(牧使) 제말(諸沫)의 고적(古蹟)을 보고 감회가 일어 정문을 세워주고 벼슬을 추증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이사룡의 일로 인하여 생각해보니 본주에 대명동(大明洞)이라고 일컫는 마을이 있다고 들었다. 이는 바로 임진 왜란 때 우리 나라를 원조해준 중국군 시문용(施文用)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문용의 아버지 윤제(允濟)는 병부(兵部)에서 벼슬하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공(石公)098) 이 주장한 우리 나라 원조 정책을 힘껏 도왔으며, 문용은 군사 사이에서 숱한 공을 세우고 그대로 우리 나라 사람이 되었다. 선조(宣祖) 때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선조(先朝) 때는 참판을 추증하면서 ‘시문용 후손들을 천역(賤役)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라.’고 전교하셨다. 그곳에 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고 어찌 똑같은 예로 그의 자손들을 녹용할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증 참판 시문용의 후예들을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불러 보고 올려보내게 하도록 하라.

내일은 곧 이 제독(李提督)의 사당에 향사하는 날이다. 촛불을 켜게 하고 그 제문을 쓰노라니 비풍(匪風)하천(下泉)의 감상이 떠올라 점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증고(贈誥)099) 에도 내일 인보(印寶)를 찍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2면
  •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 외교(外交)

  • [註 097]
    신사년의 전투 : 인조(仁祖) 18년(1641)에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援兵)을 요청해서 금주(錦州)에서 싸운 전투. 이 때 이사룡(李士龍)은 포수(砲手)로 징발되어 참전하였는데 명나라 조대수(祖大壽)의 군대와 접전하게 되자 공포를 쏘아 응전하다가 청군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였으나 임진 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덕을 배반할 수 없음을 역설하다가 살해되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 권42 19년 5월 정축조·《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64 이사룡 비명(李士龍碑銘).
  • [註 098]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공(石公) : 석성(石星)을 말함.
  • [註 099]
    증고(贈誥) : 추증하는 사령장.

○戊午/贈故義士李士龍 星州牧使, 旌其閭, 錄其子孫。 敎曰: ‘我朝名將, 指先屈於忠武, 而以軍伍名聞天下者, 亦惟李士龍是已。 士龍, 星州人, 早編戎籍。 及應敵, 求赴錦州, 與天將祖大壽, 對陣礮之, 虛發爲敵所覺, 屢刃之不懾, 如是者三, 竟死於敵。 天將諜知之, 揭竿特書曰, ‘朝鮮義士李士龍。’ 嗚呼! 當辛巳之役, 若非士龍之一辦, 將何以有辭於後世乎? 昔之衛士殉節, 朱子猶表章之。 況以小國之軍伍, 爲天朝秉義立慬, 傑然爲東國之耿光, 而坐於人微地賤, 尙闕表章之典, 豈樹風迪彝之意? 星州礮手李士龍, 特贈星州牧使, 仍使地方官旌其里, 其後孫中可堪祿仕者, 先卽調用於軍門以聞。 向於本州牧使諸沫古蹟起感, 而有旌贈之擧。 今又因李士龍事思之, 本州曾聞有大明洞之稱者, 卽壬辰東援中軍施文用之舊墟云。 文用之父允濟, 官兵部, 力贊尙書石公東援之策, 而文用積勞行間, 仍作我國人。 宣廟朝授僉樞職, 先朝贈亞卿, 且有受敎, 若曰: ‘俾施文用之後孫, 勿簽賤役。’ 是地又有是人, 則今豈可不思一例收錄之方? 贈參判施文用之後裔, 令道伯招見起送。 明日卽李提督祠堂侑享日也。 呼燭寫其祭文, 感激風泉, 觸類而引伸。 贈誥亦於明日安寶。"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2면
  •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