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현감 양자징을 배향하고 정희등, 김저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어가가 행차하던 도중에 상언(上言)한 1백 50여 통을 판하(判下)하였다. 장단(長湍) 사람 소태석(邵泰碩)이 상언하여 ‘자신의 성씨는 강절(康節)021) 에게서 나왔는데, 명나라 좌통부(左統府) 소영(邵英)의 【《명사(明史)》에는 영(榮)으로 되어 있다.】 후손이다.’고 하면서 군적(軍籍)에서 빼달라고 청하였다. 판하하기를,
"강절의 후손이거나 좌통부의 후손이거나 간에 어떻게 억지로 징발할 수 있겠는가? 도백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상언하기를,
"고 현감 양자징(梁子澂)은 기묘 명현(己卯名賢)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입니다. 그가 선정신 김인후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인후가 매우 기특히 여겨 자기의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학문에 뜻을 기울여 조예가 날로 깊어져 선정신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의 존중을 받았고 그 고장 사람들이 효자라고 조정에 아뢰어 거창(居昌)·석성(石城) 두 고을 원으로 제수되었습니다. 그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행장(行狀)을 엮으면서 칭찬하였으나, 아직도 사당에 제사는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김인후의 사당에 이 사람을 배향한다면 고정(考亭)의 사당에 면재(勉齋)022) 를 배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는데,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지난 숙종정축년023) 에 호남의 선비들이 양자징을 필암 서원(筆巖書院)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았으니, 이것만도 선비들의 억울한 일입니다. 성상께서 재량해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그가 선정의 사위로 선정의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또 여러 선정들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배향하더라도 의리상 안될 것이 없다. 더구나 선정의 집안에 이제 막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또 그의 후손을 채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에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허락한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포천(抱川) 사람 정순(鄭淳)이 상언하였는데, 그의 선조 증 이조 판서 정희등(鄭希登)에게 지평 김저(金䃴)의 예를 따라 시호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희등이 을사 사화 때 곧은 행실로 죽은 사실의 전말이 역사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보면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논의하는 반열에 끼어야 합니다."
하니, 이조에 하달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정희등의 사실이 이미 국사에 기록되어 있고 또 동시에 곧은 행실로 죽은 김저에게 시호를 내린 전례가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옛 회갑년이 다시 돌아와 선비들의 상심이 더할 것이니, 특별히 시호를 내리라고 허락하는 것이 충신을 포상하는 방도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하교하였다가 곧바로 모두 시호를 내렸다. 이조에서 또 말하기를,
"지례(知禮) 사람 이수태(李遂泰)가 상언하였는데, 그의 선조 이숙기(李淑琦)에게 시호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숙기는 호조 판서의 벼슬을 하였고 일등 공신으로 녹훈되었으니, 법으로 볼 때 시호를 내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1백 년이 지나기는 하였으나, 끝내 막는 것은 옳지 못하니, 홍문관에 하달 하소서. 상주(尙州) 사람 이국배(李國培) 등이 상언하였습니다. 상주의 충렬사에 배향된 고 충신 김종무(金宗武)는 부제학 김취문(金就文)의 아들입니다. 임진년에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김종무가 사근 찰방(沙斤察訪)으로 이일(李鎰)의 군대에 예속되었는데, 중군(中軍)이 패배하자 김종무와 상주 판관 권길(權吉)이 같이 죽었습니다. 그 사실이 《징비록(懲毖錄)》에 기록되어 있고 이미 정문을 세워주었으니, 증직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들이 요청하였으므로 공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양주(楊州) 사람 이해보(李海普)가 상언하였습니다. 그의 선조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이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으니, 김상용(金尙容)·송시영(宋時榮) 등의 전례에 따라 부조(不祧)024) 의 은전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길이 순절한 사실은 사서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일체로 부조(不祖)의 은전을 내리더라도 안될 것이 없으나 공신 이외에 부조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전례가 아니니, 성상께서 재량해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송시영을 부조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도 다름이 없으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55면
- 【분류】정론(政論) / 인물(人物)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윤리(倫理) / 군사(軍事) / 인사(人事) / 풍속-예속(禮俗) / 가족(家族)
- [註 021]강절(康節) : 송대(宋代)의 학자 소옹(邵雍)의 시호임.
- [註 022]
면재(勉齋) : 고정은 송대의 학자 주희(朱熹)의 호이고, 면재는 그의 제자 황간(黃幹)임.- [註 023]
정축년 : 1677 숙종 23년.- [註 024]
부조(不祧)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하는 일.○判下輦路之上言一百五十餘度。 長湍人邵泰碩上言: "自謂系出康節, 而大明左統府邵英 【《明史》作榮。】 後孫也, 乞免軍籍。 判曰: "無論康節後孫, 統府後孫, 豈可侵徵。 分付道臣。" 全羅道進士李敬緝等上言: "故縣監梁子澂, 卽己卯名賢山甫之子。 受業於先正臣金麟厚, 麟厚大奇之, 以女妻之。 遂專意學問, 造詣日深, 爲先正臣李滉、李珥、成渾諸人所推許, 而鄕人以孝聞于朝, 拜居昌、石城兩邑宰。 其後先正臣宋時烈, 撰狀稱揚, 而尙闕俎豆之享。 若於麟厚之祠, 以此配食, 何異考亭之勉齋乎?" 下禮曹, 禮曹言: "粤自肅朝丁丑, 湖南章甫, 請以子澂, 配食於筆巖書院, 而迄今未施者, 已是士林之抑鬱。 請上裁。" 敎曰: "以先正之女壻, 接先正之嫡傳, 又出入諸先正之門, 許令配食, 義無不可。 況於先正家, 纔親撰祭文賜祭, 又命錄後。 此時此擧, 事不偶然。 許之。" 又啓言: "抱川人鄭淳上言, 其先祖贈吏曹判書希登, 請依持平金䃴例, 贈諡矣。 希登, 乙巳死直顚末, 昭載國乘, 則宜在太常議諡之列。" 下吏曹。 吏曹啓: "希登實蹟, 旣在國史, 且有同時, 死直人金䃴賜諡之例。 況今舊申重回, 士林增傷, 特許賜諡, 恐合褒忠之方。" 敎曰: "議大臣。" 旋竝賜諡。 吏曹又啓言: "知禮人李遂泰上言, 其先祖淑琦, 請蒙節惠之典矣。 淑琦, 官戶曹判書, 錄一等勳, 在法當易名。 雖過百年, 不宜終靳。 請下弘文館。 尙州人李國培等上言, 本州忠烈祠配享人, 故忠臣金宗武, 卽副提學就文之子。 壬辰倭奴入寇, 宗武以沙斤察訪, 隷李鎰軍中, 軍敗, 宗武與尙州判官權吉竝死之。 事在《懲毖錄》中, 業已旌閭, 請蒙貤贈云矣。 多士陳請, 公議可見, 請依施。" 允之。 又啓言: "楊州人李海普上言, 其先祖忠肅公 李尙吉, 立慬江都。 請依金尙容、宋時榮等例, 竝蒙不祧之典矣。 尙吉死義, 昭載國乘, 一體不祧, 無所不可, 勳臣外不祧, 旣非國典。 請上裁。" 批曰: "宋時榮, 旣許不祧。 此無異同。 許施。"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55면
- 【분류】정론(政論) / 인물(人物)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윤리(倫理) / 군사(軍事) / 인사(人事) / 풍속-예속(禮俗) / 가족(家族)
- [註 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