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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2월 16일 갑오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환경전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하고 차대를 행하다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갔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고 차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원량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하고, 이어 동궁에게 이르기를,

"무릇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에 대하여 만약 ‘그렇게 하라.[依爲之]’라는 세 글자로써 미봉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함경 감사의 장달(狀達)에 의하여 아뢰기를,

"성진 방영(城津防營)은 도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육진(六鎭)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아홉 갈래가 있는데, 길주는 요충에 해당하지만 성진은 단지 세 갈래 길만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말하기를,

"방영을 비록 길주에 도로 소속시키더라도 성진에 역시 군졸이 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진졸(鎭卒)이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옳겠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나에게도 품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동궁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더니 어떤 사람은 옳다 하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는지라 이를 대조(大朝)에게 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길주성진의 방어 형편을 비국 당상을 보내어 보고 정하는 것이 마땅한데, 누가 갈만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필 대신을 보내어 그 일을 하게 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대신이 변방을 순시하는 것이 일상사와 다름없었는데, 지금이라고 하필 그것만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가겠다고 자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왔을 때 호조에서 빌린 수어청(守禦廳)의 은자(銀子)를 미처 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수어청의 쌀 3백 석을 호조에 보내기로 품달하여 정한 적이 있는데 은자와 바꾼 것이라고 핑계대고 끝내 내어주지 않으니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호조에서 쓰는 비용이 비록 중대하지만 수어청의 불의의 변관에 대비한 은자를 아직껏 돌려주지도 아니하고 또 세미(稅米)를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하나는 유정지공(惟正之供)이요, 하나는 유사시에 필요한 것이니 네가 마땅히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세미는 호조로 보내고, 은자는 호조에서 준비하여 상환하는 것이 옳다."

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처리가 옳다."

하였다. 조관빈이 말하기를,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거지가 많이 있으니 마땅히 경조(京兆)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고향에 돌아가 편히 살게 하소서."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유시하기를,

"너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자랐으니 어떻게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겠느냐? 지금 길주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보니 손쉽게 처리해 버리는 병통이 없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명령도 감히 방심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고 조제에 고심하여 머리와 수염이 모두 허옇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서로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너는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킴이 마땅하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분리해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저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선대를 따져 보면 모두 혼인으로 맺어진 서로 좋은 사이지만 당론이 한번 나오게 되자 문득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져 각기 서로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고집스럽게 조제에 힘쓴 것은 단연코 옳은 것이다. 지금 진언하는 자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당파 하나를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편협하다.’ 하며, 혹자는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그 말하는 바가 천만 갈래로 나뉘었다. 비록 감히 서로 살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오늘부터 네가 만약 신하들이 아뢰는 대로 듣고 믿어서 시원스럽게 그 말에 따르기를 지금 길주의 일과 같이 한다면 그 결과 종묘 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쪽은 나아가고 한쪽은 물러남이 겉으로는 시원스럽게 보이지만 살육의 폐단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이니, 네가 이 명을 지키지 않으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느냐? 4백 년 조종(祖宗)의 기업과 한 나라의 억만 백성을 너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0면
  • 【분류】
    왕실(王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甲午/上御歡慶殿, 行王世子侍坐次對。 上曰: "今日卽元良侍坐之初政。 有稟定事, 稟于元良。 予欲坐而觀也。" 仍謂東宮曰: "凡於諸臣奏事, 若以依爲之三字彌縫以答, 則必有錯誤之患。 如有可疑者, 必問於大臣, 參以己見, 然後決之。" 領議政金在魯, 以咸鏡監司狀達奏曰: "城津防營, 還屬吉州爲便。" 左議政趙顯命曰: "六鎭通路, 蓋有九岐, 吉州當其衝, 城津只可禦三路矣。" 東宮曰: "防營雖還屬吉州, 城津亦有軍卒乎?" 在魯曰: "鎭卒有之。" 東宮曰: "然則防營, 移吉州是矣。" 上曰: "汝言雖是, 然當初防營之移屬城津, 旣出於予, 則還移吉州, 不其輕率乎? 宜先問大臣, 又稟於予, 然後可爲之也。" 於是, 東宮詢問諸臣, 或言可或言不可, 仍稟于大朝, 上曰: "吉州城津防禦形便, 當遣備堂看定, 誰可往者?" 顯命自請行。 上曰: "何必遣大臣爲也?" 顯命曰: "祖宗朝大臣巡邊, 便同常事, 今何獨爲嫌也?" 兵曹判書金尙魯請行, 上許之。 戶曹判書朴文秀曰: "勑行時, 本曹貸守禦廳銀子, 未及還報。 向日守禦米三百石, 移送戶曹事, 有所稟定, 而諉以換銀, 終不出給, 可悶矣。" 守禦使趙觀彬曰: "戶曹經費雖重, 本廳不虞備, 尙不還報, 而又欲取用稅米可乎?" 上謂東宮曰: "一則惟正之供, 一則緩急所須, 汝宜酌量而處之。" 東宮曰: "稅米移送戶曹, 銀子自戶曹備償可也。" 上笑曰: "汝之處決當矣。" 觀彬曰: "街路多有流丐, 宜令京兆査出安集故土。" 東宮曰: "從自願爲之。" 上諭東宮曰: "汝生於深宮, 長於安樂, 何以知爲君之難乎? 今見吉州一事, 不無容易做去之病。 予則一政一令, 不敢放心, 苦心調劑, 鬚髮盡白, 二十五年之間, 未有相殺之擧, 汝宜守之如金石。 人君使臣之道, 合而用之可乎? 分而用之可乎? 彼諸臣推其祖先, 皆結姻相好, 而黨論一出, 便成, 各懷相害之心, 予之固執調劑者, 斷然是矣。 今之進言者, 或曰 ‘調劑反成一黨’, 或曰 ‘調劑反狹’, 或曰 ‘賢愚是非無別’, 其所爲言, 千岐萬塗。 雖不敢相殺, 而相殺之心, 未嘗亡也。 日後汝若信聽快從, 如今吉州之事, 則其於宗社臣民何哉? 一進一退, 外面似快, 而當啓殺戮之患, 汝不遵此命, 他日何顔見予乎? 四百年祖宗基業、一國億萬生靈, 付托於汝, 汝須服膺予言, 毋負期望焉。"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0면
  • 【분류】
    왕실(王室) / 군사(軍事)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