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전에 나아가 봉심을 마치고서 조영석에게 모사를 하교했으나 듣지 않다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에게 자물쇠를 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봉심(奉審)을 마치고 나자, 제조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신에게 말하기를, ‘조영석(趙榮祏)의 그림은 곧 당대의 묘필(妙筆)이다. 일찍이 그의 스승 이희조(李喜朝)의 화상(畵像)을 이미 작고한 뒤에 그렸는데도 황연(怳然)히 생기가 돌았는데, 이제 이 영정 1본을 조영석에게 집필(執筆)하게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석이 경에게 익히 보였다. 나 또한 조영석이 그의 형의 모습을 그린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과연 실물과 너무도 흡사했었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그대가 붓을 잡고 모사하겠는가?"
하니, 조영석이 대답하기를,
"이미 집필하지 말 것을 허락한 성교(聖敎)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날마다 감동(監董)하면서 식견이 닿는 데까지는 감히 극진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중신(重臣)이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이런 하교가 있으시니 신은 깜짝 놀라 당황하여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비록 하찮은 말단의 천품(賤品)이기는 하지만,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효를 바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머리에서부터 발뒤꿈치까지 가루가 되더라고 의리에 있어 사양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붓을 들고 모사한 뒤에야 비로소 신하의 분의를 극진히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대저 기예(技藝)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士類)의 반열에 끼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이 용렬하고 비루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어찌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각기 마땅한 것이 있는 것으로 도화서(圖畵署)를 설치한 것은 장차 이런 등등의 일에 쓰기 위한 것이니, 하찮은 신에게 집필하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이 잘못되었다."
하였다. 우승지 이성중(李成中)이 조영석이 외람스럽다는 것으로 중추(重推)할 것을 청하였으나, 추문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경당(寶慶堂)은 곧 내가 탄생한 당(堂)이다. 나를 낳아서 애써 길러 준 은혜를 받은 것이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내가 이 당에서 재계하면서 임어하셨던 전(殿)에서 영정을 배시(陪侍)하게 되니 슬픈 감회가 한층 새롭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9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戊午/上詣宣政殿, 命禮曹判書李周鎭啓鑰。 上奉審訖, 提調趙觀彬曰: "元景夏言于臣曰, ‘趙榮祏之畫, 卽當代妙筆也。 嘗爲其師李喜朝畫像於已故之後, 而怳然有生氣, 今此影幀一本, 不使榮祏執筆, 誠可惜’ 云矣。" 上曰: "榮祏熟視卿矣。 予亦曾見榮祏畫其兄像, 而果逼眞矣。" 仍敎曰: "爾能執筆摸寫乎?" 榮祏對曰: "聖敎旣許勿爲執筆, 故臣逐日監蕫, 見識所到, 不敢不盡言矣。 今因重臣陳達, 有此下敎, 臣愕然失圖, 不知所達矣。 臣雖微末賤品, 粗知事君之義。 其在報效之道, 見危授命, 磨頂放踵, 義所不辭, 豈執筆模寫而後, 始爲盡臣分哉? 《王制》曰, ‘凡執技以事上者, 出鄕不與士齒’, 臣雖極庸陋, 何可執技事上乎? 國家使臣之道, 各有其宜, 設置圖畫署, 將以用之於此等事, 何必使微臣執筆乎?" 上曰: "爾之所見誤矣。" 右承旨李成中以榮祏猥越, 請重推, 命勿推。 上曰: "寶慶堂卽予誕生之堂也。 生我劬勞之恩, 人孰不然, 而予今齋居此堂, 陪侍影幀於舊日臨御之殿, 一倍愴感矣。"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9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