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탁을 친국하다. 김상로가 대관 삭직의 철회와 경상 감사 유척기의 파직을 청하다
김성탁(金聖鐸)이 잡혀 왔는데,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鞫問)하려고 하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는 사지(辭旨)가 엄정하였으니 보고 듣기에 흡연(翕然)하여 공경하여 우러러보았으나, 단지 그 사이에 오히려 위곡(委曲)된 하교(下敎)가 있어 대범하고 정중해야 할 체모에 심히 흠결(欠缺)이 되었습니다. 오늘 국문할 때에는 자질구레한 곡절(曲折)은 모두 버리고 단지 임금을 무함하고 업신여긴 죄만을 엄중히 문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김성탁의 죄는 조금도 살릴 만한 도리가 없으니, 갑술년149) 의 처분은 크게 실착(失錯)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리들이 선조(先朝)에서 관대하게 용서한 은혜는 알지 못하고 늘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무신년150) 간에는 이현일(李玄逸)의 아들이 학문이 있다고 말하고 별도로 천거하여 등용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이현일이 성모(聖母)를 무함하여 욕되게 한 죄가 윤상(倫常)에 관계되는데, 그 아들이 설사 학문이 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어떻게 직임(職任)에 제수하여 징소(徵召)할 수 있겠습니까? 김성탁이 성상께서 매우 지나치게 대우함으로써 감히 은혜를 믿고 시험하려는 뜻을 품어 곧 이러한 거조(擧措)가 있게 된 것이니, 반드시 엄중한 법으로 통쾌히 징계한 후에야 영남 사람이 거의 깨우칠 수 있게 되어 죄에 빠져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구두로 문목(問目)을 부르기를,
"이현일의 기사년151) 상소는 윤리(倫理)가 없고 매우 도리에 어긋났는데, 그 집에서 편안히 죽은 것도 관대한 성은(聖恩)이 아님이 없었다. 너도 또한 오늘날의 신자로서 어찌 감히 원통함을 호소한다고 칭탁하면서 심지어는 생삼 사일(生三事一)의 의리를 일컬었으니, 이미 극도로 놀라운 일이다. 상소의 끝에 감히 말하기를, ‘신은 전하께서 기사년의 사건을 선천(先天)에 붙임을 알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취지와 의도가 음흉하고 흉참함이 이현일보다 갑절도 더하다. 스승을 칭탁하여 난역을 비호하고 임금의 마음을 억측하여 업신여겼으니, 이것으로 죄안(罪案)을 결정하여도 정법(正法)152) 하기에 충분하다. 아! 무신년 난역(亂逆)의 연유한 바가 무엇인가? 나라에 대한 원망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그 난역을 이루게 되었으니, 앞서는 비록 미혹(迷惑)되었다 하더라도 뒤에는 깨우쳤어야 할 텐데 네가 또 이와 같이 하니 이번에 국문하는 것은 쌓인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탁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전후로 성상의 망극한 은혜를 받고 털끝만큼이라고 보답하려고 생각하였으니, 어찌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할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이현일의 일은 비록 초야(草野)에 있었으나 신 역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 신헌(申𨯶)의 상소 중에 이현일을 논함이 지나친 말이 있었으니, 비록 이것이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눈앞의 일과 같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사년의 일은 선천(先天)에 붙인 것을 신이 어찌 알았겠습니까마는, 이만유(李萬維)가 상소하여 기사년 일을 논급(論及)하였는데 이에 대한 비지(批旨)에 이와 같은 하교가 있었던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벌써 지나간 일을 선천(先天)이라고 이르며, 눈앞에 닥친 일을 후천(後天)이라 이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이현일이 죄가 있고 없는 것은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또 신이 젊었을 때 배움을 받아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일체(一體)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무신년의 사건은 곧 천지간에 지극한 변괴로서 신도 그것이 기사년의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줄 아는데, 이현일이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스승과 제자와의 의리가 아무리 중하다고 하지만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 이 일은 또 40년 전에 있었고 신의 나이 어려서 상세히 알지 못하였으나, 갑술년 이후로는 이현일을 혹은 완전히 석방도 하고 혹은 벼슬도 회복시켜 죄명(罪名)이 역률(逆律)에는 이르지 않은 듯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문목에 이르기를,
"이현일의 상소 중에 한 구절의 말은 지금 차마 끌어 내어 묻지는 못하겠으나, 아무리 너의 무상(無狀)한 마음으로 그 상소의 내용을 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감히 난역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인데, 바로 감히 애매하다고 하였으니, 그 공초를 보건대, 더욱 극도로 무상하다. 군부(君父)가 역란을 마음 아프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햇수가 멀다고 소홀히 하겠으며 햇수가 가깝다고 절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무함하고 업신여기며 패역(悖逆)한 역적을 스승으로 부추겨 올리고 감히 원통하다고 하소연하였으며, 무신년의 난역(亂逆)이 근본은 기사년에 있었던 것인데 지금 감히 그것을 비호하려 드니, 그 누구를 속이려는가?"
하였다. 김성탁이 두 번째 공초하기를,
"이현일이 역률(逆律)을 범한 정상은 당시에 나이가 어려서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무망(誣罔)할 마음이 있었다면 비록 바로 법에 처단(處斷)되었더라도 어찌 유감이나 원한이 있겠습니까? 허명(虛名)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불과하니, 오히려 무엇을 진달하겠습니까? 이현일이 그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아랫 조항의 말은 본정(本情)을 혹시라도 하촉(下燭)153) 을 받지 못할 듯하여 감히 ‘대분(戴盆)’ 두 글자를 썼으며, 국가에서 법을 적용하는 도리 역시 연세(年歲)의 오래 되고 가까움에 차이가 없지는 않으며, 이현일을 혹은 완전히 석방하기도 하고 혹은 방귀 전리(放歸田里)154) 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과연 그렇게 운운함이 있었으나, ‘난역을 비호했다.[護送]’는 두 글자는 실로 천만번 원통합니다."
하였다. 다시 문목을 내자, 김성탁이 세 번째 공초하기를,
"난역을 비호했다는 하교는 천만번 원통합니다. 갑술년에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의 진달(陳達)에는 이현일의 상소한 내용이 해치기를 꾀하거나 침범하여 배척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고, 기해년 양이(量移)155) 할 적에 대신(大臣)들이 구해(救解)하려는 말이 있었으며, 당시의 하교에서도 죄명이 다른 사람과 다르니, 방면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석정(崔錫鼎)·이여(李畬)도 역시 이현일은 이미 분명한 죄상이 없으니, 결단코 모해(謀害)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도 혹은 난역(亂逆)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를 들으니, 신의 상소는 사정(私情)에 구애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현일이 비록 크게 미안한 귀절의 내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래의 말뜻은 그 때의 경재(卿宰)들도 침범하고 핍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이 밖에는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탁이 인하여 이현일이 올리지 못한 상소를 외우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단지 이 상소만 외우고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현저하게 포용하여 비호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우(待遇)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방사(放肆)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단지 그의 죄만이 아니라 조정과 나도 역시 스스로 반성해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탁이 말하기를,
"이현일에게 수학(受學)한 것은 그가 방귀 전리(放歸田里)된 뒤에 있었습니다. 이현일의 상소의 윗 조항 글귀의 말은 진실로 무상(無狀)하지만 아랫 조항은 성모(聖母)를 위해 존안(尊安)하는 도리는 이루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진실로 병이(秉彛)의 마음이 있다면 부모를 무함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임금이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시켜 이현일의 국안(鞫案)을 가져오게 하여 보기를 마치고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으며, 이어서 말하기를,
"지금 국안을 보고 처음으로 적서(嫡庶)를 분명히 하자는 일이 있었음을 알았으니, 이것을 보고 놀라서 통탄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였다. 위로는 성모(聖母)에게 언급하고 아래로는 경종(景宗)과 나에게 언급하였으며, 임금의 마음이 서인(西人)을 등용하는 여부(與否)를 몰래 엿보고 탐지한 것은 더욱 극도로 놀랍고 분하다."
하고, 또 김성탁에게 말하기를,
"무신년 후로는 영남 사람이 의당 난역의 원두(源頭)였음을 환하게 알 터인데 너와 같은 자가 또 나왔으니, 지금 내가 친히 국문하는 것은 앞으로 엄중히 구문(究問)하여 통렬히 징계하고자 함이다. 내가 무신년의 사건으로 일찍이 극수재(克綏齋)에서 하교하였으니, 네가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네가 감히 총영(寵榮)을 믿고 방자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반드시 정탐하여 시험할 계획이 있었음이다. 숨긴 실정을 정직하게 고(告)함이 마땅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의당 원소(原疏)로써 결안(結案)하도록 하겠다."
하니, 김성탁이 계속 애매(曖昧)하다고 일컫자, 임금이 또 이르기를,
"네가 이현일의 난역(亂逆)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난역이다. 감히 애매하다고 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원임 대신(原任大臣) 서명균(徐命均)·김흥경(金興慶)은 모두 부생(傅生)의 의논156) 을 하였고, 김재로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하며 난역을 비호한 세 가지 큰 죄로써 바로 결안(結案)하도록 청하였다. 헌납(獻納)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김성탁을 만약 극형(極刑)으로 처치하지 않으면 영남 사람을 징계하여 두렵게 하기에 부족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 반드시 전하를 비난하는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의 의논도 대략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무신년의 일로써 징계를 삼아 늘 생각하고 요량함이 있었으나, 관계가 중대한 곳에 이르러서는 어찌 엄중히 처치하지 않겠는가? 간신(諫臣)들의 말이 옳다. 내가 만약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 〈선왕을〉 뵙겠는가? 김성탁이 이현일과는 간격이 있으니, 만약 선조(先祖)에서 이현일을 주벌(誅罰)하지 아니한 뜻을 본받는다면 당연히 참작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1차 형신(刑訊)할 것을 명하자,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은 본래 지독한 점이 있어서 곤장을 잘 참습니다."
하였는데, 김성탁이 말하기를,
"노모(老母)가 계시니, 살려 주시는 은덕을 입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으로 살려 달라고 비니 불충 불효(不忠不孝)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 본부(本府)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김성탁은 극률(極律)과 차율(次律)을 논할 것 없이 외로운 새새끼나 썩은 쥐새끼에 지나지 않으니 처치하기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나는 그가 영남 사람이므로 염려가 된다."
하였다. 김상로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유언휘(兪彦徽)를 도태시키는 일에 이르러서는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말한 것으로써 죄를 입는 것은 진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일전에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여 아뢴 것은 여러 고관(考官)을 삭직(削職)한 뒤에 잇달아 발설한 의논에 불과한데, 곧 전하께서는 이미 그 계문(啓聞)으로 인하여 대신(大臣)의 관직을 파면하였고, 또 조어(措語)의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아울러 여러 대신(臺臣)을 죄주었는데, 사기(辭氣)가 지나치게 엄하고 처분이 중도를 잃었으니, 청컨대, 합계(合啓)한 대관(臺官)을 삭직(削職)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곧은 자를 들어 쓰고 굽은 자를 버리라는 것은 공성(孔聖)의 가르친 바인데, 어찌 중도를 지나쳤다고 말하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성탁의 소어(疏語)가 지극히 흉패(凶悖)하나 명색이 삼사(三司)의 벼슬을 하였고, 현도(縣道)를 좇아 올렸다면 도신(道臣)이 된 자가 비록 퇴각(退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글을 갖추어 싸서 올릴 즈음에 역시 한 말을 덧붙여 진달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데, 전례를 따라 올려 보냈으니, 번신(藩臣)의 체모에 너무나 흠결이 됩니다. 청컨대 경상 감사 유척기(兪拓基)를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울 밖에 관서를 설치하는 것이 사체(事體)가 동일하지 않으니, 지금 진달한 바가 합당한지 모르겠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의 일과 포교(捕校)157) 등의 일은 정계(停啓)하도록 하였다. 대개 이덕수의 자부(子婦)가 김상로에게는 질녀(姪女)가 되기 때문에 정계하였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2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행정(行政)
- [註 149]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150]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151]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52]
정법(正法) : 사형.- [註 153]
하촉(下燭) : 통촉을 내려 줌.- [註 154]
방귀 전리(放歸田里) : 벼슬을 삭탈하고 제 시골로 내리 쫓음.- [註 155]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邊地)로 멀리 귀양보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內地)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 [註 156]
부생(傅生)의 의논 : 사형에 처할 죄인에게 의의(疑義)가 있을 때 그 죄를 경감(輕減)시키어 목숨을 살려 주는 것.- [註 157]
포교(捕校) : 포도 부장.○金聖鐸就拿, 上御仁政門親鞫。 左議政金在魯曰: "頃者備忘辭旨嚴正, 觀聽翕然欽仰, 而但其間猶有委曲之敎, 殊欠簡重之體。 今日鞫問時, 則盡除細小曲折, 只以誣上慢君之罪, 嚴問何如?" 上曰: "然矣。" 在魯又曰: "聖鐸之罪, 無一分可生之道。 甲戌處分, 大是失刑, 故此輩不知先朝寬貸之恩, 每有輕朝廷之心, 而戊申年間, 以玄逸子謂有學問, 別薦奬用。 玄逸誣辱聖母, 罪關倫常, 則其子設有學問, 殿下何可除職徵召乎? 聖鐸以自上待遇之太過, 敢懷恃恩嘗試之意, 乃有此擧, 必嚴法痛懲然後, 嶺人庶可覺悟, 而不陷於罪矣。" 上口呼問目曰: "玄逸己巳之疏, 無倫絶悖, 渠之斃牖下, 莫非寬大之聖恩。 汝亦今日臣子, 何敢托以訟冤, 至稱生三事一之義, 已極痛駭, 而末梢敢曰: ‘臣知殿下於己巳之事, 付之先天。’ 云, 此非特慢君誣上, 旨意陰慘, 有倍玄逸。 稱師護逆, 臆君慢侮, 以此結案, 足以正法。 吁! 戊申亂逆所由者何? 蘊蓄怨國, 終成其逆, 前雖迷者, 後可覺悟, 而汝又若此, 今者鞫問, 欲知蘊蓄之心。" 聖鐸供曰: "臣前後受聖上罔極之恩, 思效絲毫之報, 豈敢有慢君誣上之心乎? 李玄逸事, 雖在草野, 臣亦知之。 上年申𨯶疏中, 論玄逸言有過者, 雖是久遠, 便如目前, 故爲此言矣。 己巳事付之先天, 臣何以知之? 李萬維疏論及己巳事, 批旨似有如此之敎。 臣意則以爲, 已前事謂之先天, 目前事謂之後天, 故敢言之矣。 李玄逸之有罪無罪, 天鑑在上, 而臣少時受學, 君師父一體, 故如是言之。 戊申事乃天地間極變, 臣亦知其出於己巳餘黨怨國之心, 而玄逸果有如許事, 則師生之義雖重, 何敢爲此乎? 此在四十年前, 臣年幼不能詳知。 甲戌以後, 玄逸或全釋或復官, 罪名似不至於逆律, 故爲此言矣。" 更問目曰: "玄逸疏中句語, 今不忍提問, 而雖以汝無狀之心, 觀其疏語, 必不敢曰非逆, 而乃敢曰戴盆, 觀其招尤極無狀。 爲君父痛逆之心, 豈可年遠而忽也, 年近而切也? 誣慢悖逆之賊, 推以爲師, 敢爲訟冤, 戊申之逆, 本在己巳, 而今敢護之, 其誰欺乎?" 聖鐸再供曰: "玄逸犯於逆律之狀, 年幼不能詳知, 若有一毫欺天罔上之心, 雖卽伏法, 寧有憾恨? 不過以虛名, 至於此境, 尙何所達? 玄逸非不知其非矣, 而下款語本情, 或恐未蒙下燭, 敢用戴盆二字。 國家用法之道, 亦不無年歲久近之異, 玄逸或全釋或放歸, 故果有云云, 護逆二字, 實萬萬冤痛矣。" 更發問目, 聖鐸三供曰: "護逆之敎, 萬萬冤痛。 甲戌年領議政南九萬陳達以爲: ‘李玄逸疏語, 非謀害侵斥矣。’ 己亥量移, 大臣有救解之語, 其時下敎以爲: ‘罪名異於他, 放之可也。’ 崔錫鼎、李畬亦以爲: ‘李玄逸旣無罪狀之分明, 決非出於謀害之意。’ 故臣意以爲或非逆矣。 今聞聖敎, 臣疏則拘於私情矣。 玄逸雖有大未安之句語, 其下語意, 則其時卿宰以爲: ‘非出侵逼之意。’ 云, 此外無所達矣。" 聖鐸仍誦玄逸未徹之疏。 在魯曰: "只誦此疏, 而語不及於八字凶言, 是顯有容護之意也。" 上曰: "待遇太過, 故放肆至此。 非但渠罪, 朝廷及予亦可自反矣。" 聖鐸曰: "受學玄逸, 在於其放歸田里之後。 玄逸疏上款句語, 則誠無狀, 而下款則爲聖母, 致尊安之道矣。" 上曰: "人苟有秉彝之心, 則父母之誣, 焉可忘乎?" 上使禁堂取玄逸鞫案來, 覽訖, 示諸臣, 仍曰: "今見鞫案, 始知有明嫡庶事矣, 見此不覺驚痛。 上及聖母, 下及景廟與予, 至於窺探上心之用西人與否者, 尤極駭憤。" 又謂聖鐸曰: "戊申後, 嶺人宜洞知亂逆源頭, 而如汝者又出, 今予親問, 將欲嚴究痛懲矣。 予以戊申事, 曾有下敎於克綏齋, 汝當記得, 而汝敢憑恃寵榮, 放肆至此, 是必有探試之計, 宜直告隱情。 不然則當以原疏爲結案矣。" 聖鐸連稱曖昧, 上曰: "汝不知玄逸之爲逆, 是乃逆也。 敢曰曖昧耶?" 仍詢諸臣, 原任大臣徐命均、金興慶皆傅生議, 在魯請以慢君誣上護逆三大罪, 直爲結案。 獻納金尙魯曰: "聖鐸若不置之極典, 非但不足以懲畏嶺人, 後世必有譏議於殿下也。" 諸臣之議略同。 上曰: "予雖懲於戊申, 每有思量, 而至於關係重大處, 豈不嚴處乎? 諫臣之言是矣。 予若不痛治, 則何以歸拜乎? 聖鐸與玄逸有間, 若體先朝不誅玄逸之意, 則當有參酌矣。" 仍命刑一次。 承旨柳儼曰: "嶺人本來有毒, 能忍杖矣。" 聖鐸曰: "有老母, 願蒙生活之德。" 上曰: "今始丐生, 可謂不忠不孝矣。" 命下本府。 上曰: "聖鐸無論極律次律, 不過孤雛腐鼠, 處之何難, 而予以嶺人爲慮矣。" 尙魯申前啓, 不允。 至兪彦徽汰去事, 依啓。 又啓言: "臺官之以言獲罪, 固非聖朝美事。 日昨兩司合辭之啓, 不過諸考官削職之後繼發之論, 而乃殿下旣因其啓, 而罷大臣之官, 又以措語之不稱停, 幷罪多臺, 辭氣過嚴, 處分失中, 請還收合啓臺官削職之命。" 上曰: "擧直措枉, 孔聖所訓, 奚曰過中? 勿煩。" 又啓言: "金聖鐸之疏語極凶悖, 而名爲三司, 從入縣道, 則爲道臣者, 雖不可退却, 具狀齎上之際, 亦當附陳一語以俟處分, 而循例上送, 殊欠藩臣之體, 請慶尙監司兪拓基罷職。" 上曰: "京外設官, 事體不同。 今者所達, 未知恰當。" 不允。 大提學李德壽事及捕校等事停啓。 蓋德壽子婦於尙魯爲姪女, 故停之云。
-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2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행정(行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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