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중추부사 윤증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윤증(尹拯)이 졸(卒)하니, 수(壽)는 86세이었다. 부음(訃音)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윤 판부사(判府事)는 산림(山林)에서 덕(德)을 길러 일찍이 중망(重望)이 있었으니, 과인(寡人)이 존숭하여 신임(信任)함과 사림(士林)이 존경하고 본받음이 그 어떠하였겠는가? 정승에 오름에 미쳐 돈소(敦召)함이 더욱 간절했지만, 다만 정성이 부족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 결연(缺然)한 생각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질병이 고질이 되어 갑자기 흉음(凶音)이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고, 인하여 전례(前例)에 따라 예장(禮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윤증의 자(字)는 자인(子仁)이고 파평인(坡平人)으로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의 손자이며,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천부의 자질이 화수(和粹)하고 깊고 중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한 번도 외부의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소학(小學)》으로부터 대인(大人)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순서를 따라 올라갔으며, 오로지 내면 수양(修養)에 힘써 깊은 연못에 임하고 살얼음을 밟듯 삼가고 조심하며 80평생을 하루같이 지내왔다. 그 덕성(德性)을 충만하게 길러 화순(和順)한 모습이 외면에 나타남에 미쳐서는 보는 자들이 심취(心醉)되어 비록 평일에 미워하고 질투하던 자들도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돌려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대개 용모와 자태가 청수하고 위연(偉然)하였으며 기상이 높고도 깊어서 그 앉은 모습은 마치 소상(塑像)과 같았는데, 접촉하면 봄볕과 같았으니, 그 하늘에서 품부(稟賦)한 바가 이미 빼어났고 성경(誠敬)으로 함양(涵養)한 탓으로 용모(容貌)에 나타나는 바가 자연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 진실한 심지(心地)와 독실한 공부는 이 문순공(李文純公)001) 이후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며, 문장(文章)은 온후(溫厚)하고 간측(懇惻)하여 중화(中和)의 명성(名聲)이 있었으니, 후세에 덕을 아는 자는 이에서 고징(考徵)할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어버이와 스승의 망극한 변고(變故)를 만나 처신(處身)함이 간혹 절도(節度)에 어긋남이 있었으므로, 군자(君子)가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그 뜻을 슬퍼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명재 선생(明齋先生)이라 일컬었다. 그 아우 윤추(尹推)는 돈후(敦厚)하고 청엄(淸嚴)하여 집에 있어서는 순독(純篤)한 조행(操行)이 있었고 고을을 다스리매 특이한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만년에 장령(掌令)으로 징소(徵召)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46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01]이 문순공(李文純公) : 퇴계(退溪).
○壬申/判中樞府事尹拯卒。 壽八十六。 訃聞, 上下敎曰: "尹判府事, 養德山林, 夙負重望, 寡昧之尊信, 士林之矜式, 爲如何哉? 逮登台司, 敦召愈懇, 只緣誠淺, 莫回遐心, 觖然思想, 未嘗少弛。 何意一疾沈綿, 凶(問)〔聞〕 奄至耶?" 仍命庀喪如例。 拯字子仁, 坡平人, 文正公 煌孫, 文敬公 宣擧子。 天姿和粹淵厚, 自幼承學家庭, 一無外誘之奪。 自《小學》以至大人之學, 循級進步, 專用力於內, 臨履淵氷, 八十年如一日。 及其德性充養, 和順外著, 見者心醉, 雖平日媢嫉者, 自不覺其回心敬服焉。 蓋容姿秀偉, 氣象崇深, 坐如泥塑, 接如陽春, 其稟於天者, 旣特秀, 而以誠敬涵養(晬)〔睟〕 盎者然也。 要其眞實心地, 刻苦工夫, 李文純後一人而已, 文章溫厚懇惻, 有中和之聲, 後之知德者, 有所考焉。 然中遭父師罔極之變, 處之或差於節度, 君子惜之, 而悲其意云。 世稱明齋先生。 弟推, 敦厚淸嚴, 在家有純行, 治郡有異績, 晩被徵拜掌令, 不就。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46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