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8월 27일 임오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희빈의 복제를 다른 후궁과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행 부사직 이봉징의 상소문

행 부사직(行副司直) 이봉징(李鳳徵)이 상소하기를,

"해조(該曹)에서 정(定)한 복제(服制) 가운데 ‘희빈(禧嬪)은 마땅히 자최 기년(齊衰期年)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후궁(後宮)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신의 혼매(昏昧)한 생각으로써도 또한 경악(驚愕)할 따름입니다. 대저 성체(聖體)의 배필(配匹)이 된 지가 6년이란 오랜 기간에 이르렀으니, 지금 대행 왕비(大行王妃)를 위하여 복(服)을 입는 것은 후궁(後宮)에 비하여 그 경중(輕重)에 차이가 있어야 할 것 같고, 해조에서는 마땅히 먼저 상지(上旨)에 계품(啓稟)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또, 전례(典禮)를 상고하고 명의(名義)를 참작(參酌)해 지당한 도리에 합치되도록 힘써야 하며,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재삼 순문(詢問)하셔서 처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절목(節目)을 공봉(供奉)하고 강정(講定)하는 일로써 상소하여 그 대략을 아뢰었으니, 지금 이러한 의논을 드리는 것도 또한 꼭같은 뜻입니다.

대신(大臣)들이 이르기를, ‘사대부 가운데 사친(私親)의 상복(喪服)을 벗지 못한 자는 마땅히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변제해야 한다.’하고, 예경(禮經)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는데, 이것은 더욱 의혹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예기(禮記)》에서〉 증자(曾子)가 묻기를, ‘대부(大夫)·사(士)가 사친(私親)의 상복(喪服)이 있어서 상복을 벗을 때가 되었는데, 임금에 대한 상복이 있다면 그 상복을 벗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니,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면 감히 사친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데, 또 어찌 상복을 벗을 수 있겠는가? 이에 때가 지나도 상복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임금의 상복을 벗은 뒤에 그제서야 사친을 위하여 은제(殷祭)199) 를 거행하는 것이 예(禮)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면, 비록 사친의 상복이 있더라도 또한 감히 사친의 상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감히 사친의 상복을 입지 못한다면 상복을 벗거나 벗지 아니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니요, 반드시 임금이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은제를 거행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상복을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제에서 삼헌(三獻)과 여러 제문(祭文)을 갖추는 것은 곧 소상(小祥)·대상(大祥)의 제사입니다. 임금의 상이 앞에 있고 사친(私親)의 상이 뒤에 있다면, 마땅히 입어야 할 사친의 상복을 감히 입지 못하는 자가, 임금이 상복을 미처 벗기도 전에 이미 입은 사친의 상복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다르니 비록 임금의 상복을 벗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졸곡(卒哭)도 마치지 아니하고 먼저 사친의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대단히 마음에 편안치 못합니다. 만약 오늘 예문(禮文) 한 구절을 고치고 내일 또 한 구절을 고친다면, 대방(大防)200) 이 점점 무너져 장차 사람들이 나라에 국상(國喪)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대신(大臣)들이 ‘복을 벗는 것은 마땅히 때를 넘길 수 없다.’는 말을 공자증자의 물음에 답한 것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어떤 경전(經典)에 나타난 것인지요?

조사(朝士)로서 상중(喪中)에 있는 자를 의주(儀註)에 거론하지 아니한 것은, 관직(官職)에 있는 신료(臣僚)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기 그 품질(品秩)에 따라 의주에 의거해서 최복(衰服)을 받는다면, 상례(喪禮)도 곧 엄해지고 사사로운 분수도 또한 편안해질 것입니다. 모포(帽袍)로써 성복(成服)하는 것이 이미 옳다고 하였으니, 입령(笠領)으로 【입(笠)은 백립(白笠)이고 영(領)은 포호령(布互領)인데, 조사(朝士) 가운데 사친(私親)의 상복을 입는 자는 이것으로써 성복한다.】 한 것은 미처 예경의 본의를 구명(究明)하지 못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그대로 존치(存置)할 수가 없으니, 원컨대, 성명(聖明)께서 몇 구절을 다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고, 외방(外方)에 있는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도 또한 마땅히 수의(收議)하도록 하명(下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할 것이나, 복제(服制)의 일을 지금 와서 운운하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예조에서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서문중(徐文重)·이세백(李世白)·신완(申琓)은 예(禮)를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였고,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은 모두 헌의(獻議)하지 아니하였으며, 유상운(柳尙運)은 말하기를,

"국휼(國恤) 때 사친(私親)의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면 감히 사친(私親)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데, 또 어찌 벗을 수 있겠는가?’라는 글이 있는데, 이 부분이 근래 호례가(好禮家)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아니하고 그 문답(問答)이 각기 다른 곳입니다. 다만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다를 뿐더러, 이미 아침저녁 임금이 계신 곳의 시의와도 같지 아니합니다.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사친(私親)의 복제(服制)를 입는 자는 일찍이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므로 감히 사친(私親)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 일이 없었는데, 단지 ‘또 어찌 복을 벗을 수 있겠는가?’라는 글을 가지고 상복을 벗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갓 사친(私親)의 상에 복제(服制)를 넘기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오로지 조정에서 시의(時宜)를 참작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널리 채용하여 일대(一代)의 제도를 이루도록 하소서."

하였다. 유신(儒臣)들에게 순문(詢問)하니, 좌찬성(左贊成) 윤증(尹拯)은 헌의(獻議)하지 아니하고,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는 말하기를,

"선사(先師) 송시열(宋時烈)이세귀(李世龜)의 물음에 답하기를, ‘국장(國葬) 뒤에 택일(擇日)하여 소상(小祥)·대상(大祥)을 거행하는데, 뜻을 잘 기울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유감이 없게 한다. 옛날에는 상기(喪期)에 기한이 없었으니, 비록 몇달을 더하더라도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궤전(饋奠)201) 하는 데에 또 몇 달을 하더라도 또한 이것은 정(情)을 표시하는 일단(一端)이다.’라고 하였고, 최규서(崔奎瑞)에게 답한 데에는 이르기를, ‘옛날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의 소상(小祥) 때 마침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국휼(國恤)을 당하자, 간략하게 제수(祭需)를 마련해 곡(哭)을 하고 일을 거행하였으며, 국장 뒤에 택일하여 연사(練事)202) 를 거행하였다. 이것은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것에 알맞게 하였으니, 통행(通行)하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민진장(閔鎭長)에게 답한 데에서는 이르기를, ‘졸곡(卒哭)은 반드시 국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택일하여 거행해야 하나, 다만 명문(明文)이 없어서 감히 질언(質言)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이민장(李敏章)에게 답한 글에는 이르기를, ‘국휼 중의 사대부의 장사(葬事)에 대해서는 이미 금령(禁令)이 없었으니, 예절의 본의에 있어서도 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단지 장사한 뒤에 으레 은제(殷祭)가 있기 마련인데, 종묘(宗廟)·산릉(山陵)으로 정향(停享)할 때를 당하여 신자(臣子)의 마음이 실로 편안키 어렵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장사한 뒤에 우제(虞祭)를 폐하는 것도 또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비록 우제(虞祭)를 거행하더라도 강쇄(降殺)하여 퇴계(退溪)의 기제(忌祭)의 설(說)과 같이 거행한다면, 혹 무방(無妨)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설로 보건대, 사가(私家)에서는 졸곡(卒哭) 전에 은제(殷祭)를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기(禮記)》의 증자문(曾子問)에서 논한 귀절의 대목에 이르면 아주 까다롭고 불분명한 점이 있는데, 이와 같은 따위의 귀절은 전의(傳疑)203) 라고 의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찬선(贊善)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08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註 199]
    은제(殷祭) : 성대한 제사.
  • [註 200]
    대방(大防) : 예(禮).
  • [註 201]
    궤전(饋奠) :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드림.
  • [註 202]
    연사(練事) : 연제(練祭).
  • [註 203]
    전의(傳疑) : 경전의 의심스러운 점.

○行副司直李鳳徵上疏曰:

該曹所定服制中, 禧嬪當爲齊衰朞, 是與諸後宮無異也。 以臣昏昧, 亦有驚愕。 夫配體至於六年之久, 則今者爲大行王妃持制, 比後宮, 輕重似有差殊, 在該曹, 所當先稟上旨。 且考典禮, 參酌名義, 務合於至當道理, 而殿下亦宜再三詢覆而處之者也。 臣曾以節目供奉講定事, 疏陳大略, 則今此獻議, 亦一義也。 大臣謂士大夫私喪未除者, 當除於國喪卒哭前, 引《禮經》證之, 此尤訝惑。 曾子問曰: "大夫、士有私喪, 可以除之矣, 而有君服, 其除也如何?" 孔子曰: "有君喪服於身, 不敢私服, 又何除焉? 於是乎有過時而不除也。 君之喪服除而後殷祭, 禮也。" 此謂君服在身, 則雖有私服, 亦不敢服, 不敢服則除不除, 非所論也, 必待君喪服除而後殷祭, 則然後乃可除也。 殷祭備三獻、諸文, 卽二祥之祭也。 君喪在先, 私喪在後, 則不敢服私喪之當服者, 其可除私喪已服之服於君喪未除之前乎? 古今異宜, 雖不可待君服之除, 而未卒哭先除私服, 大段不安。 若今日改一節, 明日又改一節, 則大防漸壞, 將至於人不知國有喪, 非細慮也。 大臣以除服不當過時, 爲孔子曾子之問, 此則見於何經也? 朝士之在喪者, 不爲擧論於儀註者, 與在職臣僚, 無異同故也。 各以品秩, 依儀註受衰, 則喪禮乃嚴, 私分亦安。 以帽袍成服者旣是, 則其以笠領 【笠, 白笠, 領, 布直領。 朝士持私服者, 以此成服。】 者, 不過未究禮經本意也。 不可以已往之事, 置之, 願聖明將數節, 更令大臣、儒臣博議之, 在外原任大臣處, 亦宜有旨收議。

答曰: "疏辭令該曹議大臣, 而服制事, 今玆云云, 殊未穩當也。" 禮曹議于諸大臣, 徐文重李世白申琓辭以不知禮, 南九萬尹趾完皆不獻議, 柳尙運以爲: "國恤時私喪除服, 不載於《五禮儀》, 而禮有有君喪服於身, 不敢私服, 又何除焉之文。 此近世好禮家, 論議不一, 問答各異者也。 第古今異宜, 旣與朝夕君所之時不同。 士大夫持私制者, 曾無君喪服於身, 不敢私服之事, 而只就又何除之文, 不許除衰, 徒爲私喪踰制之歸。 惟在朝家參酌時宜, 博采群議, 以成一代之制。" 詢于儒臣, 左贊成尹拯不獻議, 贊善權尙夏以爲: "先師宋時烈李世龜之問曰: ‘國葬後擇日, 行二祥, 用意宛轉, 公私無憾。 古者喪期無數, 雖加數月, 何害於義? 饋奠之, 又加數月, 亦是申情之一端也。’ 其答崔奎瑞曰: ‘昔沙溪老先生小祥, 適値仁穆王后國恤, 略設祭需, 哭而行事, 國葬後擇日行練事。 此酌古適今, 可以通行而無疑矣。’ 其答閔鎭長曰: ‘卒哭必俟國葬後擇日行之, 第無明文, 不敢質言。’ 其答李敏章曰: ‘國恤中士大夫葬事, 旣無禁令, 於禮意, 亦無所害, 而但葬後, 例有殷祭, 當宗廟、山陵停享之時, 臣子之心, 實爲難安。 因此而葬後廢虞, 亦所不忍, 雖行虞祭, 而降殺行之, 如退溪忌祭之說, 則或似無妨。’ 觀於此數說, 則私家殷祭之不能行於卒哭前者, 可知矣。 至於《曾子問》所論, 句語之間, 儘有艱晦。 如此等處, 疑以傳疑可也。" 上命從贊善議施行。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08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