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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4월 12일 기사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육릉의 참봉의 전직·봉화대 설치·절수의 폐단 등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았다. 이조 판서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이사영(李思永)이 일찍이 함흥의 육릉(六陵) 참봉을 준원전(濬源殿) 참봉으로 전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관제(官制)를 변경시키는 일을 경솔하게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재행(才行)이 현저한 이를 골라서 아뢰도록 하고, 이조(吏曹)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보게 하여 임명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여가 또 말하기를,

"희빈 궁방(禧嬪宮房)에서 덕산(德山)에다가 전지를 샀는데, 그 고을 백성과 송사가 있었습니다. 송관(訟官)이 궁차(宮差)076) 를 가두었는데 그 사건이 아직 끝나기 전에 내수사(內需司)에서 그 송사를 해궁(該宮)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라고 청하니, 여기에는 틀림없이 민원(民怨)이 있을 것입니다. 도신(道臣)에게 일임하여, 송관(訟官)을 특별히 뽑아서 공평하게 판결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 참의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신이 회양(淮陽)대죄(待罪)077) 하고 있을 때에 북로(北路) 봉화(烽火)가 때때로 통보해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근래 병조에 있으면서는 아차산(峩嵯山)의 봉화는 한 번도 이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바다와 산이 가려 그렇다면 어찌 회양에는 전해지고 아차산에는 전해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거듭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구(金構)가 말하기를,

"관동(關東)과 관북(關北) 지방은 산세가 높고 험하여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 있습니다. 봉화대를 산중턱 이하에다 설치해야 마땅하겠으나, 국력(國力)으로 보아 또한 증설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로는 이미 우후(虞候)에게 명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강원도도 사실을 잘 밝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박필명(朴弼明)을해년078) 정식(定式)을 반포한 뒤의 궁장(宮庄)으로 절수(折受)된 토지를 혁파할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이탄(李坦)이 말하기를,

"온 천하의 땅이 임금의 땅이 아닌 것이 없는데, 그것이 일단 궁가(宮家)에 소속되면 백성들이 경작(耕作)을 못합니다. 을해년의 정식은 사람마다 우러러 흠모하는 바이며, 왕언(王言)이 한 번 전파되면 도로 회수(回收)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흔쾌히 따르소서."

하고, 수찬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이탄(李坦)은 민폐(民弊)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은 성덕(聖德)에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을해년의 정식은 팔도의 백성들이 똑같이 우러러보았는데, 오늘에 와서 지금 새로 규식(規式)을 정한다고 하교하신다면, 어찌 성덕에 큰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부터 규식을 정하자는 것은 을해 정식을 폐지하자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박필명(朴弼明)이 말하기를,

"권상유의 말은 매우 합당합니다. 애당초 궁가(宮家)에 급가(給價)한 것은 대개 민폐를 근심해서였는데, 지금은 이미 급가도 하고 또 절수(折受)까지 하니, 이 때문에 신이 그칠 줄 모르고 간쟁하는 것입니다."

하고, 권상유이탄도 반복해서 이를 논하고, 모든 승지들도 계속해서 말했지만,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35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94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사법-재판(裁判) / 인사-관리(管理) / 군사-통신(通信) / 재정-상공(上供) / 농업-전제(田制)

  • [註 076]
    궁차(宮差) : 궁가(宮家)에서 보낸 역원(役員).
  • [註 077]
    대죄(待罪) : 관리가 그 관직에 있는 것을 겸손하여 이르는 말.
  • [註 078]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己巳/上御宣政殿, 受常參。 吏曹判書李畬言: "李思永嘗請咸興六陵參奉, 轉敍濬源殿參奉, 然官制變通, 不可輕議。 宜使道臣, 擇其才行表著者以聞, 自吏曹更加詢訪, 始爲差除似宜。" 上可之。 又曰: "禧嬪房買田於德山, 與縣民相訟。 訟官方囚宮差, 事未竟, (內需寺)〔內需司〕 請上其訟于該宮, 此必有民怨。 仍付道臣, 別擇訟官, 從公査決, 實合事宜。" 從之。 兵曹參議金鎭圭曰: "臣待罪淮陽時, 見北路烽火, 時或報至, 而近在兵曹, 聞峩嵯山烽火一不至。 若曰海山相阻, 則豈傳於淮陽, 而不傳於峩嵯山耶? 宜有以申戒之也。" 兵曹判書金構曰: "關東、關北, 山勢高峻, 雲霧常晦。 宜置烽臺於山腰以下, 而國力亦難於增設矣。" 上曰: "北路旣命虞候, 看審以啓。 江原道亦使覈實以聞。" 持平朴弼明, 申請罷乙亥定式後宮庄折受者, 上不許之。 校理李坦曰: "普天之下, 莫非王土, 而一屬宮家, 民不得耕。 乙亥定式, 人皆欽仰, 王言一播, 不可還寢。 願聖上快從之。" 修撰權尙游曰: "李坦以民弊爲言, 然臣意竊恐有累於聖德。 乙亥定式, 八路同仰, 而今乃以自今定式爲敎, 豈不大傷於聖德乎?" 上答以自今定式者, 非廢乙亥定式之意也。 弼明曰: "尙游言甚切至。 當初給價宮家, 蓋軫民弊, 而今則旣給價而又折受, 此臣所以爭執而不知止者也。" 尙游反復論之, 諸承旨亦繼以爲言, 而上終不聽。


  • 【태백산사고본】 39책 35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94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사법-재판(裁判) / 인사-관리(管理) / 군사-통신(通信) / 재정-상공(上供)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