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학에 가서 문묘에 배알하고, 선비를 책시하여 뽑다
임금이 태학(太學)에 가서 문묘(文廟)에 배알(拜謁)하고, 이어서 선비를 책시(策試)148) 하여 이야(李壄) 등 5인을 뽑아, 아울러 무예(武藝)를 시험하여 곧 장전(帳殿)에서 방방(放榜)149) 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특별히 문무(文武)의 거인(擧人)에게 명하여 어가(御駕) 앞에 나와 서게 하고, 창우(倡優)로 하여금 정희(呈戲)150) 하게 하였다. 식자(識者)는 이것을 한심하게 여겼으나, 대신(大臣) 이하 한 사람도 말리는 자가 없었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하련대(下輦臺)151) 에 나아가 먼저 비망기(備忘記)를 나려 여러 선비들에게 게시하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학교(學校)를 설치하여 사방의 선비를 기르는 것은 대개 바른 학문을 연구하여 착한 것을 가리고 몸을 닦아서 인륜에 근본하고 물리에 밝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글을 짓고 녹(祿)을 구하기만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예전에 전손사(顓孫師)152) 가 녹을 구하는 법을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많이 들어서 의심스러운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 많이 보아서 위태롭게 여기는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참으로 배우는 것이 넓고 가리는 것이 정하고 지키는 것이 요긴한 것일 수 있다면, 녹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올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만세의 격언(格言)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치체(治體)를 잘 아는 자는 적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여 경학을 버리고 녹리(祿利)를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조종(祖宗)께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의이겠는가? 이에 나는 일찍이 세도(世道)를 위해 개탄하지 않은 바 없다.
또 생각하건대, 예전에 안정 호공(安定胡公)153) 이 소호(蘇湖)의 교수(敎授)이었을 때에 부지런히 아칙(雅飭)154) 하여 그 제자의 사기(辭氣)가 여느 사람과 달랐는데, 더구나 저 재주가 많은 여러 선비가 아주 가까이 있어 위아래의 뜻이 온화하게 유통하니, 인도하여 도와주며 격려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아아, 너희 여러 선비는 내 가르침을 공경히 들어 잘 지켜서 잊지 말고 점점 연마하여 성취하면, 그것이 국가와 사문(斯文)의 다행임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크게 성심을 내어 마땅히 각각 맹성(猛省)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성교(聖敎)를 중외(中外)의 학관(學官)에게 반시(頒示)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당습(黨習)이 점점 고질이 되고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려서 과거(科擧)가 공정하지 못하니 선비가 따라서 이 때문에 바른 것을 잃고, 용사(用捨)를 사정(私情)에 따르니, 관(官)이 이 때문에 날로 어지러워지므로, 경학을 버리고 이록(利祿)을 좇는 것은 또한 괴이할 것도 없다. 만약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방도로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하는 거조(擧措)가 있지 않고, 한갓 말로 가르치는 말단의 일에 구구하기만 한다면, 날마다 열 줄의 가르침을 내리더라도 마침내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니, 개탄스럽다.
이때 과거는 사정(私情)에 따르는 것이 많으므로, 민암(閔黯)의 아들 민장도(閔章道)가 글을 못하는 사람으로서 다만 세력에 의지하여 외람되게 급제하니, 온 세상이 놀랐다. 사관(史官)도 민가(閔家)에 아첨하지 않는 자는 아니나, 눈으로 그 일을 보고서 적은 것이 이러하였으니, 공론을 알 수 있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23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5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48]책시(策試) : 경의(經義) 또는 시정(時政) 등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논술하게 하는 문과 시문(試問)의 한 가지.
- [註 149]
방방(放榜) : 조선조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합격 증서를 주던 일. 문무과(文武科)의 대과(大科)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홍패(紅牌)를,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백패(白牌)를 각각 내려 주었음.- [註 150]
정희(呈戲) : 춤과 노래를 바치는 것으로서 극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을 말함.- [註 151]
하련대(下輦臺) : 임금이 연(輦)에서 내리는 대.- [註 152]
전손사(顓孫師) : 공자(孔子)의 제자. 자(字)는 자장(子張)임.- [註 153]
안정 호공(安定胡公) : 송대(宋代) 호원(胡瑗). 안정은 호(號).- [註 154]
아칙(雅飭) : 바른 일을 하도록 신칙함.○壬辰/上詣太學謁文廟, 仍策士, 取李壄等五人。 兼試武藝, 卽於帳殿放榜, 及還宮, 特命文武擧人, 進立於駕前, 使倡優呈戲, 識者爲之寒心, 而大臣以下, 無一人請止者。 是日曉頭, 上御下輦臺, 先下備忘記, 令揭示多士曰: "設庠序學校, 以養四方之士者, 蓋爲其講劘正學。 擇善修身, 本乎人倫, 明乎物理者也。 豈徒作文干祿而已哉? 昔顓孫師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誠能學之博, 擇之精, 守之約, 則祿不干而自至矣。’ 此豈非萬世之格言耶? 竊觀比來, 世降俗末, 士習不古, 經明行修, 曉達治體者少。 而尙文辭遺經業, 趨祿利者滔滔, 豈我祖宗興學作人之本意哉? 予於此, 未嘗不爲世道發一嘅也。 仍記昔安定胡公, 嘗爲蘇湖敎授孜孜雅飭。 其第子之辭氣, 異乎常人。 矧伊濟濟章甫, 密邇尺五, 上下情志, 譪然流通, 誘掖激勵, 寧不在玆? 咨! 爾多士, 敬聽予訓, 服膺勿失, 漸磨成就, 則其爲國家斯文之幸, 可勝言哉? 稟出心腹, 宜各猛省。" 左議政睦來善請以聖敎, 頒示中外學宮。 許之。
【史臣曰: "黨習漸痼, 倖門大開, 科選不公, 士趨以之失正, 用捨循情, 官方以之日紊, 遺經業趨利祿, 亦無足怪。 倘不以大公至正之道, 有大警動大振作之擧, 而徒區區於以言敎之末, 則雖日下十行之敎, 終爲無益之歸, 可慨也已。】
是時科選多循私, 閔黯子章道, 以不文, 徒藉勢力而濫與焉, 一世駭之。 史臣亦非不悅於閔家者, 而目見其事, 所記如此, 公議可見也。
- 【태백산사고본】 25책 23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5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