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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17일 정사 2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전시에서 임숙영의 글이 방자하다 하여 방목에서 삭제하게 하다. 임숙영의 그 응제문

【문과 전시에서 정문익(鄭文翼) 등 15인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과거시험에서의 응제문(應製文)은 정해진 법식이 있으니, 옛날 사람들은 아무리 과격하고 곧은 말이라도 모두 질문한 제목에 나아가서 도리와 욕심, 공과 사를 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인심이 극악하여 오직 임금을 헐뜯고 욕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으니, 너무나 무리하다. 내가 응시자 임숙영(任叔英)의 응제문을 보니, 그 답이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별도로 제목을 벗어나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패악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또 시관이 합격시켰으니 숙영의 임금이 된 자는 너무도 괴롭지 않겠는가. 그가 만약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상소를 하여 극구 말하였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과거장에서 감히 제목을 벗어나 글을 지어 온갖 말로 비방하였다. 만약 이 글을 합격시킨다면 말세의 경박한 무리들이 반드시 앞을 다투어 군상을 욕하는 글을 미리 지어서 시관의 눈을 현혹하여 합격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이니, 그 폐단은 앞으로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다. 임숙영을 방목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

하였다. 【대책(對策)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춘추(春秋)》를 살펴보니, 세실(世室)의 건물이 무너진 사실을 기록한 것은 조종(祖宗)의 묘당을 닦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대저 조종의 묘당을 닦지 않은 것도 군자가 비난하였는데 하물며 조종의 자리를 삼가지 않고 조종의 서업을 힘쓰지 않아 스스로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떨어뜨리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차지하신 자리는 바로 조종의 자리이며 전하께서 이으신 서업은 바로 조종의 서업입니다. 조종이 이미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얻었으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소홀하게 임하셔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태조와 태종께서 앞서서 이루어 놓으시고 세종과 성종께서 뒤따라 지키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서 거듭 밝히고 두루 미쳐 지금 2백여 년에 이르렀는데, 그 근습(近習)을 다스리고 승순(承順)을 물리치고 사닐(私昵)을 이기고 황녕(荒寧)을 구휼하여 후세에 법을 드리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치평의 은택을 바탕으로 삼아 훈계의 유지를 짊어지셨으니 마땅히 옛 법도를 공경히 이어서 전열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중외의 금법을 엄중히 하여 참소를 멀리 하고, 헌체(獻替)의 법을 높여서010) 부침(浮沈)을 경계하고, 벼슬에 나아가는 도를 맑게 하여 함부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끊고 안일한 습관을 계칙하여 오만함과 게으름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구태 의연하게 하여 나라의 발전이 없단 말입니까. 밝음은 사방 멀리에까지 통촉할 수 있는데도 대궐 안에서 부리는 권력을 살피지 못하며, 의리는 만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데도 욕되게 자리만 지키고 있는 대간을 권려하지 못하며, 덕은 황극(皇極)의 교화를 이룩할 수 있는데도 필부의 간악한 마음을 검칙하지 못하며, 도는 상고의 융성함을 회복할 수 있는데도 한때의 고식을 구제하지 못하니, 이것이 신이 전하를 위하여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중언부언하면서 한 마디 말로 끝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또 《춘추》를 살펴보니, 영숙(榮叔)이 부의를 가지고 옴에 왕이라 하고 천왕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그 덕이 능히 천왕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밟고 선 것은 천위(天位)이며, 다스리는 것은 천직(天職)이며, 받들고 있는 것은 천명(天命)이며,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은 천공(天功)이니, 임금은 마음을 움직이고 대사를 일으킴에 반드시 하늘의 도를 본받습니다. 하늘의 도는 사적으로 좋아하거나 미워함이 없기 때문에 임금의 도도 사적으로 좋아하거나 미워함이 없고, 하늘의 도가 사적으로 기뻐하거나 화냄이 없기 때문에 임금의 도도 사적으로 기뻐하거나 화냄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지 않고서 그 공렬을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혹 하루라도 생각지 않으면 그 덕을 상실하고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곧 뒤이어 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하늘을 본받아야 하는 책무를 가지셨고, 또한 하늘을 본받아야 하는 덕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규방(閨房)을 용인하심으로써 하늘이 전하에게 부여한 위엄이 사랑을 이기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으며, 규잠(規箴)을 닫고 막으심에 하늘이 부여한 간언을 따라 성스러워지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으며, 달리고 다투는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써 하늘이 전하에게 부여한 오직 현자를 임용하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으며, 안일하고 편안함을 즐기심으로써 하늘이 전하에게 부여한 자강 불식하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으니, 이 때문에 충직한 선비가 가슴을 치고 팔을 걷어붙이고 전하를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춘추》를 살펴보니, 기(杞)나라 백희(伯姬)가 와서 며느리를 구한 사건을 굳이 기록한 것은 여자가 국사에 간여한 점을 미워해서인데 대체로 부인의 말이 행하지면 집안이 막히는 법입니다. 전하의 시대에 와서 그러한 폐단이 더욱 심하여져 안에서는 위복(威福)의 문이 열리고 밖에서는 부탁하는 풍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당한 은혜가 아닌데 얻는 것을 남은(濫恩)이라 하고, 정당한 부탁이 아닌데 행하는 것을 행청(倖請)이라고 합니다. 남은과 행청은 비록 어린아이나 노복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수치로 여기는 것입니다만, 행실이 좋지 못한 비루한 사람과 이익을 탐내는 자잘한 사람은 미치지 못할 것처럼 구하고 남에게 뒤질세라 달려갑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명기(名器)를 이로써 훔칠 수 있다고 여기며, 국가의 헌장(憲章)을 이로써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 때문에 궁중이 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춘추》를 살펴보니, 왕자 구(彄)가 졸(卒)하였다고 쓴 것은 그가 관어(觀魚)에 대해 간언한 일이 이러하고 이미 임종한 달을 쓰고 다시 그 날짜까지 쓴 것은 은례(恩禮)의 의리를 보인 것입니다. 대체로 왕자 구가 직간하였기 때문에 《춘추》에서 훌륭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어진 신하만이 말을 다할 수 있으며, 오직 밝은 임금만이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도를 따르지 않고서 군신의 책무를 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국가에 언관을 두는 것은 충간하는 길을 넓히려는 것인데 지난번에 한두 명의 언관이 일을 논하다가 죄를 얻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언관을 두심이 그의 말을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죄를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대개 임금의 결점을 보완하는 자가 도리어 임금에게 죄를 얻은 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위로 조정에서 아래로 초야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을 경계하여 아비는 아들을 경계하고 형은 동생을 경계시켜서 한때의 금기가 되었는데, 이는 언로가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춘추》를 살펴보니, 세관(世官)을 잉숙(仍叔)의 아들과 같이 했다고 쓴 것은 사적인 사랑으로 공적인 선발을 방해했다는 것을 기롱한 것입니다. 대개 관작이라는 것은 국가의 공적인 기구이며 제왕의 중요한 권한이니, 어진이를 우대하고 덕있는 이를 명하는 터전이며 정사를 베풀고 치화를 선포하는 기반입니다. 비록 존비에 순서가 있고 경중은 같지 않으나 각각 맡은 직책이 있어서 국가의 여러 업무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관(官)은 크나 작으나 반드시 그에 맞는 재능을 천거하고, 작(爵)은 높으나 낮으나 반드시 그에 맞는 능력을 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옛날의 이른바 공적인 것이요, 이와 반대로 하면 옛날의 이른바 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공을 따르고 사를 없애는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습니다. 유사(有司)는 재물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임용하는 근본을 삼고, 벼슬하는 사람은 재물의 있고 없음을 헤아려 발신하는 근원을 삼습니다. 더구나 후비의 친척과 후궁의 족속은 은택을 희망하고 녹리를 간구하느라 밖으로는 임금의 외척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그 위세를 떨치고 안으로는 궁궐의 세력을 끼고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가 하면,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일을 꾸미고 임명할 즈음에 분주하여 심지어는 일세 사람들로 하여금 구실거리를 삼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명 단자가 내려지기도 전에 반드시 물색하여 하나하나 세면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전의 친척이고 아무개는 후궁의 족속이다. 지금 아무 관직이 비었으니, 반드시 아무개가 될 것이고, 아무 읍에 수령이 비었으니 반드시 아무개가 될 것이다.’고 하는데, 임명 단자가 내려짐에 이르러서는 그 말과 부합되지 않는 적이 드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조(銓曹)가 금하지 못하며 대간이 논쟁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공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춘추》를 살펴보니, 우(虞)나라가 망하였는데 멸망했다고 말하지 않고 진(晉)나라가 우공(虞公)을 잡았다고 쓴 것은, 그의 세력이 이미 떠남에 대중이 독부(獨夫)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뽑지 못할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심을 두텁게 매고 풍속을 굳건하게 세워서 꺾어도 꺾이지 않고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아야만 비록 내란이 일어나더라도 방지하여 승리하지 못함이 없으며, 비록 외적의 침입이 있더라도 막아서 이기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간혹 그렇지 않은 점이 있어서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뜻을 위에 통하지 못하고, 나라는 백성을 보호하고 있으면서도 은택을 아래에 입히지 못합니다.

게다가 관직을 맡은 사람은 조그맣게 이루어지는 효과를 즐겨서 깊고 먼 염려를 잊으며, 일을 맡은 사람은 한때의 이익에 얽매어 장구한 계획에 소홀하니, 위에서 직분을 태만히 하여 아랫사람들이 생업을 잃고, 위에서 은혜가 적어 아랫사람들이 노여움을 품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전하의 나라가 혼란해지기 전에 먼저 위태로우니, 이는 마치 나무가 속이 썩고 집이 안에서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비록 겉모양은 변함이 없으나 당장에 쓰러지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말로 군신과 상하가 경계하고 면강하여 천명을 맞이하여야 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힘쓰지 않고 한갓 겉치레만 일삼아 마치 태평 시대처럼 여기고 있으니, 다만 전쟁이 사방의 국경 안에서 터지지 않았다 뿐이지 어찌 이러한 상태를 편안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불행하게도 먼저 기근을 당하고 이어서 적이 쳐들어온다고 할 경우, 신은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것 같은 변고가 조석 간에 닥칠까 염려됩니다. 이 때문에 국세가 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금 온갖 법도가 바르지 못하고 여러 정사가 빠진 것이 많으며 경연이 폐지되어 보좌하고 이끌어주는 방편을 잃었으며, 돕고 보호하는 것이 허술하여 자손을 위하는 좋은 도가 없어졌으며, 요역이 그치지 않아 창생이 질고에 빠졌으며, 세금에 법도가 없어 백성이 극도로 곤궁하며, 기강이 날마다 더욱 문란해지고 풍속이 날마다 더욱 파괴되고 인륜이 날마다 더욱 썩어가고 사습(士習)이 날마다 더욱 낮아지며, 재이가 자주 나타나고 변괴가 거듭 출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남과 북으로 침략의 근심이 있어 사방의 오랑캐로부터 지켜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데, 섬 오랑캐는 독을 품고서 틈을 엿보고 산 오랑캐는 흉악한 마음으로 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려스러운 일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유독 앞에 말한 네 가지에 대해 간곡히 말하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덕에 누가 되고 세상의 도가 떨어지고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근심이 생기는 것이 본시 이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전하께서 급선무로 삼으실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이때에 유씨(柳氏) 일문이 조정에 간여하여 낙점(落點)이나 지휘가 모두 지름길이 있었으나 조정의 신하 중에 감히 지적하여 물리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임숙영이 대책으로 인해 첫머리에 언급하였고, 또 이이첨 등이 한창 존호를 올려서 상의 뜻에 아첨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숙영이 책문 끝에 사악한 의논이라고 배척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상이 매우 미워하여 특별히 방목에서 삭제하라고 명한 것이다.

숙영의 대책을 고관이 애초에 뽑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심희수가 애써 주장하여 뽑아 방 끝에 두었다. 급기야 삭제의 명이 내려지자 희수가 장원으로 뽑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희수 역시 이 때문에 자리를 떠났다.】


  • 【정족산사고본】 10책 39권 5장 A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608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註 010]
    헌체(獻替)의 법을 높여서 : 헌가 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신하의 간언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에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에 그른 것이 있으면 신은 그 그른 것을 말씀드려 옳은 것을 이루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는 것에 옳은 것이 있으면 신은 그 옳은 것을 말씀드려 그른 것을 제거하니, 이 때문에 정치가 잘 이루어져 백성의 간여함이 없다." 하였다.

○文科殿試, 取鄭文翼等十人。 傳曰: "策士應製之文, 自有程式, 古人雖或有危言讜論, 皆就所問中題目, 仍爲理欲公私之辨而已。 近來人心極惡, 惟以詬辱君上爲能事, 無理甚矣。 予見擧人任叔英之文, 其所對, 非所問, 而別爲題外悖惡之語, 肆然無忌。 試官又從而取之, 爲叔英之君者, 不亦病乎? 渠若有所懷, 或上章極言則可矣, 乃於場屋, 敢做題外之文, 醜詆無所不至, 若取此文, 則末世浮薄之徒, 必競宿構辱君父之文, 以眩惑試官之目, 而仍爲決科之地矣, 弊將難救。 任叔英, 可削科。"

【其策略曰:臣謹按《春秋》書, 世室屋壞者, 譏其不修, 祖宗之廟也。 夫不修祖宗之廟, 君子猶非之, 況不謹祖宗之位, 不務祖宗之業, 自墜其繼述之道者乎? 今殿下所居之位, 卽祖宗之位也; 殿下所纘之業, 卽祖宗之業也。 祖宗旣憂勤而得之, 殿下固不可忽而莅之。 昔太祖、太宗, 成之於前, 世宗、成宗, 守之於後, 列聖相承, 重熙累洽, 至于今日, 二百有餘載矣, 未嘗不律其近習, 斥其承順, 勝其私昵, 恤其荒寧, 以垂法後世。 殿下席治平之澤, 荷訓戒之旨, 所當祗述舊章, 益篤前烈, 嚴中外之禁, 以遠其讒佞, 崇獻替之規, 以警其浮沈, 淸仕進之道, 以絶其冒濫, 戒恬嬉之習, 以矯其傲惰, 奈何因循苟且, 罔有張皇? 明足以燭四方之遠, 而不能察掖庭之招權, 義足以動萬物之情, 而不能勵辱臺之俱位, 德足以致皇極之化, 而不能檢匹夫之干禁, 道足以復上古之盛, 而不能救一時之姑息, 此臣之所以爲殿下痛哭流涕, 重言復言不一言而止者也。 又按《春秋》, 榮叔之歸, 賵王不稱天者, 以其不克其天也。 故人君所履者天位, 所治者天職, 所奉者天命, 所勤者天功, 人君動心作事, 必法於天之道無私好惡, 故人君之道, 亦無私好惡, 天之道無私喜怒, 故人君之道, 亦無私喜怒。 未有不如此而能成其功烈者也。 或一日不念, 則喪失厥德, 國事日非, 亡隨其後。 今殿下, 旣有法天之責, 亦有法天之德。 然容忍乎閨房, 而天之以威克厥愛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閉塞乎規箴, 而天之以從諫克聖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開導乎奔競, 而天之以任官惟賢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玩愒乎燕安, 而天之以自强不息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此忠讜之士所以痛心扼腕, 不能不恨於殿下者也。 臣謹按《春秋》, 杞 伯姬, 來求婦而必書于策者, 惡其干預國事也, 蓋婦言之得行, 惟家之索。 至殿下之時, 其弊滋甚, 威福之門, 啓於內, 附托之風, 興於外。 非其恩而得之曰濫恩, 非其請而行之曰倖請。 濫恩、倖請, 雖童孺奴僕亦眞可羞, 而無行之鄙夫, 嗜利之細人, 求之若將不及, 就之猶恐或後, 謂朝廷之名器, 可以此而盜之, 謂國家之憲章, 可以此而壞之, 此宮闈之所以不嚴也。 臣謹按《春秋》, 王子彄之卒, 以其有觀魚之諫, 旣書月又書日, 以見其恩禮之義也。 夫王子彄 之直諫, 故《春秋》善之。 是以惟賢臣, 爲能盡言, 惟明君, 爲能納諫, 未有不率此道而能盡其君臣之責者也。 況國家之有言官, 所以恢忠諫之路, 而頃者一二言官, 以論事而得罪, 是殿下之置言官, 非欲以求其言也, 乃欲求其罪也。 夫以補闕於君者, 反以得罪於君。 由是上自朝廷, 下至草野, 皆以言爲戒, 父以戒子, 兄以戒弟, 以中一時之禁忌, 不必不自殿下啓之也, 此言路之所以不開也。 臣謹按《春秋》, 書世官若仍叔之子者, 譏其所以私愛害公選也。 夫官爵者, 國家之公器, 帝王之重柄, 所以優賢命德之地, 宣政出治之基也。 雖尊卑有序, 輕重不同, 然各有所職, 以理國家之庶務, 故官無大小, 必薦其才, 爵無高下, 必擧其能。 如是則古之所謂公者也, 反是則古之所謂私者也。 然循公蔑私者, 世不復有斯人也。 有司者, 視貨之多少, 以爲任人之本, 仕官者, 量財之有無, 以爲發身之原。 況后妃之親戚, 後宮之宗族, 希望恩澤, 干求祿利, 外憑戚里之名, 以張其威, 內挾掖庭之勢, 以濟其欲, 圖謀於注擬之間, 奔走於授任之際, 至使一世之人, 以爲口實。 當除目未下之時, 必物色而數之曰: "某也中殿之親也, 某也, 後宮之族也。 今某官闕員, 某必爲之, 某邑闕倅, 某必得之。" 及除目旣下, 則鮮不符於其言。 然銓曹之不得裁抑, 臺諫之不得論列, 此公道之所以不行也。 臣謹按《春秋》, 虞亡不言滅, 書晋人執之者, 以其勢已去, 猶衆執獨夫也。 故國家之所以存者, 必有不拔之勢, 厚結於人心, 固植於風俗, 摧之而不挫, 動之而不撓, 然後雖內難起, 防之而無不克, 雖外侮至, 禦之而無不勝。 今或不然, 民依於國, 而情不上通, 國保於民, 而澤不下被。 加以當官者, 樂小成之效, 而忘深遠之慮, 仕事者, 苟一時之利, 而忽長久之圖, 上怠其職, 下失其業, 上少其惠, 下藏其怒。 由是, 殿下之國, 未亂而先危, 如木之內腐, 如室之內壞, 雖形色未變於外, 其傾頹可立而待也。 此正君臣上下儆戒勉强, 以迓續天命之時, 而是之不務, 徒事文具, 有若太平之時, 特兵革戰鬪之聲, 未發於四境之內, 曾是以爲安乎? 卽不幸先之飢饉, 繼之以盜賊, 臣恐土崩瓦解之變, 迫在朝夕也。 此國勢之所以不振也。 方今百度未貞, 庶政多闕, 經筵廢曠, 而輔導之方失, 調護虛疎, 而燕翼之道缺, 徭役不息, 而蒼生陷於疾苦, 賦斂無藝, 而赤子極其困窮, 紀綱日益紊, 風俗日益壞, 人倫日益斁, 士習日益卑, 災異屢見, 變怪疊出。 況憂在南北, 守在四夷, 島夷吹毒而伺隙, 山戎稔兇而窺釁。 今日之事, 可虞者如此, 而臣獨惓惓於前四者, 誠以君德之所累, 世道之所降, 百弊之所起, 諸患之所生, 本由於此。 故臣謂殿下之所急者, 莫先乎此也。】

【○時, 柳氏一門, 干預朝政, 落點指揮, 皆有階逕, 而朝臣莫敢指斥。 任叔英, 因對策首言之又, 李爾瞻等, 方欲上尊號, 以媚上意, 叔英終策斥爲邪議。 王甚惡之, 特命削科。 叔英對策, 考官初不欲取, 沈喜壽力主取之, 故置榜末。 及削科命下, 喜壽恨其不置之上第。 喜壽, 亦以此去位。】


  • 【정족산사고본】 10책 39권 5장 A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608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