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광해군일기[정초본]36권, 광해 2년 12월 27일 무술 4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이항복이 체직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다

좌의정 이항복이 또 상소하여 체직되기를 구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얼마 전에 대간이 사람을 공정하게 뽑지 않았다고 하면서 시험을 주관한 자를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항복이 대신으로서 처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편치 않아 상소하여 사직을 구한 것인데,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항복은 청렴 결백으로 내면을 바로잡고 문장의 화려함으로 밖을 수식한 것으로써 선조(先朝) 때부터 온 세상의 으뜸이 되어왔다. 그래서 오늘날의 어진 재상을 말할 때면 반드시 항복을 꼽곤 하였다. 왕이 처음 즉위하던 때에 그를 재상으로 세웠으며, 사방의 군사를 전담하게 하였으니, 안팎의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 그렇다면 항복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능과 덕이 안을 닦고 외부의 침략을 물리칠 만하다고 판단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며 온갖 노력을 다할 것만을 생각하여 알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을 죽을 때까지 계속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큰 은혜에 보답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재능과 덕이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을 알았다면 당장에 몸을 이끌고 물러감으로써 대신이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온전히 했어야 한다. 항복이 의정(議政)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 2년이 된 지금, 임금의 덕은 날로 어그러져가고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지며, 변방의 근심은 날로 어려워져가고 백성의 곤궁은 날로 깊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항복은 일에 임하여서는 뒷걸음질치며 한마디 말을 하여 임금을 바로잡거나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아 나라를 보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묘당이 드린 의논은 한바탕 부질없는 해학이 되어 세속의 웃음거리가 되곤 하였다. 또 명을 받들어 임하게 되어서 부정을 행하는 작태를 보고도 바로잡아 처벌하여 국가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지 못하고, 손을 놓은 채 구차하게 동의하여 끝내 그 간사한 짓을 하게 버려두었다. 공론이 나오고 난 뒤에도 또 과감히 간사한 작태를 바로 지적하여 비리를 바로잡지 못하고, 뒤이어 변명을 늘어놓아 왜곡되게 한 두 사람을 비호하려 하였으니, 군자의 마음은 처사가 광명 정직하다는 것으로 그를 일러 말할 수 있을까. 장상(將相)의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집이 가난하여 텅 비었고, 막중한 권세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대문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손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훌륭한 명성이 완전히 추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 【정족산사고본】 8책 3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596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左議政李恒福, 又上章乞遞, 不允批答。 頃者臺諫, 以取人不公, 請罪主試者。 而恒福以大臣得漏焉, 故不安於心, 上章乞免, 王不許。

    【【史臣曰: "恒福, 廉潔飭內, 文華飾外, 自先朝爲一世冠冕稱。 今賢相必曰恒福。 曁王訪落之初, 爰立作相, 專戎四道, 可謂內外寄重矣。 爲恒福者, 顧其才德, 足以修內而攘外, 則宜鞠躬盡瘁, 思竭其力, 知無不爲, 死而後已, 以答不世之恩。 如其自知其才其德, 不足以當此, 則奉身而退, 不俟終日, 以全大臣事君以道之義可也。 恒福, 官以議政爲名者, 二年于玆矣。 當此之時, 君德日益虧, 朝政日益亂, 邊憂日益艱, 民困日益深。 而恒福臨事却步, 未嘗出一言以格君, 畫一策以補國, 廊廟獻議, 剩造一場詼諧, 以資世俗笑謔之具。 且承命臨軒, 目覩循情, 而不能匡正糾劾以肅朝綱, 束手苟同, 竟使必售其奸。 及公論旣發之後, 又不敢直指奸狀, 以正是非, 從而爲之說, 曲爲一二人營護之地, 其可謂君子之心, 處事光明正之道耶? 但身都將相, 室如懸罄, 手握重權, 門無私客, 以此令名不全墜。】】


    • 【정족산사고본】 8책 3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596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