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9월 1일 임자 3/5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우리 나라에 공이 있는 석성과 이여송의 사당을 평양에 지어 제사지내다
국역
이여송(李如松)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영하(寧夏)에서 승첩(勝捷)을 거뒀을 때 공을 사양하여 봉작을 받지 않았는데,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난 뒤에 승진하여 태자 태보 좌도독(太子太保左都督)이 되었다. 이여송이 우리 나라에 올 때, 그 아버지인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바로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출신인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여송이 30여 세의 나이로 처음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는 안빈(顔鬢)이 매우 청수하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수염에 흰 것이 섞여 있었다. 그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를 위하다 보니 이처럼 반백(斑白)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왜군의 성한 기세에 겁을 먹어 벽제(碧蹄) 전투에서 불리했던 뒤로는 신중을 기하여 싸우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화의(和議)가 그 사이에 개재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상이 명하여 평양에 사당을 세운 뒤 석성(石星)과 이여송을 제사지내고 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양원(楊元)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고 사액하였다.
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9월 1일 임자 3/5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우리 나라에 공이 있는 석성과 이여송의 사당을 평양에 지어 제사지내다
국역
이여송(李如松)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영하(寧夏)에서 승첩(勝捷)을 거뒀을 때 공을 사양하여 봉작을 받지 않았는데,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난 뒤에 승진하여 태자 태보 좌도독(太子太保左都督)이 되었다. 이여송이 우리 나라에 올 때, 그 아버지인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바로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출신인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여송이 30여 세의 나이로 처음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는 안빈(顔鬢)이 매우 청수하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수염에 흰 것이 섞여 있었다. 그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를 위하다 보니 이처럼 반백(斑白)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왜군의 성한 기세에 겁을 먹어 벽제(碧蹄) 전투에서 불리했던 뒤로는 신중을 기하여 싸우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화의(和議)가 그 사이에 개재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상이 명하여 평양에 사당을 세운 뒤 석성(石星)과 이여송을 제사지내고 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양원(楊元)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고 사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