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공이 있는 석성과 이여송의 사당을 평양에 지어 제사지내다
이여송(李如松)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영하(寧夏)에서 승첩(勝捷)을 거뒀을 때 공을 사양하여 봉작을 받지 않았는데,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난 뒤에 승진하여 태자 태보 좌도독(太子太保左都督)이 되었다. 이여송이 우리 나라에 올 때, 그 아버지인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바로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출신인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여송이 30여 세의 나이로 처음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는 안빈(顔鬢)이 매우 청수하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수염에 흰 것이 섞여 있었다. 그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를 위하다 보니 이처럼 반백(斑白)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왜군의 성한 기세에 겁을 먹어 벽제(碧蹄) 전투에서 불리했던 뒤로는 신중을 기하여 싸우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화의(和議)가 그 사이에 개재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상이 명하여 평양에 사당을 세운 뒤 석성(石星)과 이여송을 제사지내고 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양원(楊元)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고 사액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3면
- 【분류】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왕실-사급(賜給)
○李如松容貌魁傑, 宇量寬洪。 行軍臨陣, 鈐束得宜, 所過皆便之。 寧夏之捷, 讓功不封, 及破平壤, 陞爲太子太保左都督。 如松之東(萊)〔來〕 , 父寧遠伯 成樑追與書: "朝鮮乃吾先祖鄕, 汝其勉之。" 如松嘗以其書, 私示伴使曰: "家敎如此, 敢不爲貴國盡力?" 或言: "其先乃我理山郡出, 而我國人未詳。" 如松年三十餘初來, 顔鬢甚韶, 還自嶺南, 鬚有白莖, 謂我人曰: "爲爾國, 斑白如此。" 然憚於倭盛, 自碧蹄戰不利, 持重不戰, 亦由和議間之故也。 後, 上命建祠于平壤, 祀石星及如松, 而以如栢、張世爵、楊元配, 賜額武烈。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3면
- 【분류】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