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사 귤강광이 내빙하다
일본 국사(日本國使) 귤강광(橘康廣)이 내빙(來聘)하였다. 일본에 천황(天皇)이 있어 참람하게 기원(紀元)065) 을 호칭하나 국사에는 간여하지 않고 국사는 관백(關白)이 청단(聽斷)한다. 관백을 대장군(大將軍)이라 부르기도 하고 대군(大君)이라 부르기도 한다. 황(皇)과 왕(王)의 칭호가 같기 때문에 관백을 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원씨(源氏)가 관백 노릇한 지 2백여 년이 되었는데 평수길(平秀吉)이 그를 대임하였다.
평수길은 본디 천례(賤隷)로 조상의 유래를 모르는 사람이다. 관백이 품팔이하며 빌어먹는 것을 발탁하여 군사로 삼았는데 전투를 잘하여 많은 공로를 쌓았기 때문에 대장이 되었다. 관백의 정월(旌鉞)066) 을 빌어서 먼 지방의 반역자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인이 그의 참월(僭越)함에 분노하여 도리어 관백을 공격해 죽였다. 수길이 회군하여 전쟁에 승첩하고 이어서 원씨(源氏)를 대대적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군사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승리를 거두어 제도(諸島)를 병탄하였는데 영토가 66주이며 정병 1백만을 훈련하였으니 일본이 이처럼 성대함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 평수길은 오만하여 의기양양한데다가 또 국내의 환란을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중국을 침범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세(前世)에 뱃길로 절강(浙江)을 침범하려 하다가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먼저 조선을 점거하여 육지로부터 진병(進兵), 요계(遼薊)를 엿보려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들어 아는 바가 없었으니, 이는 그 나라는 법이 엄하여 행인(行人)067) 이 한 마디 말도 누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평수길이 자기의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한 것을 처음 들었으나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평수길이 말하기를,
"우리 사신은 매양 조선에 갔으나 조선의 사신은 오지 아니하니 이는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귤강광을 보내어 통신(通信)을 구청(求請)하였는데, 서신의 사연이 매우 거만하여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왔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귤강광도 사납고 거만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문득 조롱하고 비난하였다. 이때 교리 유근(柳根)이 선위사(宣慰使)였고 예조 판서가 압연관(狎宴官)이었다. 귤강광이 고의로 연회석상에서 호초(胡椒)를 흩어놓으니 기공(伎工)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줍고 전혀 질서라고는 없었다. 귤강광이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귤강광이 돌아갈 적에 그 서계(書契)에 답하되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수길이 크게 노하여 귤강광을 멸족하였는데 귤강광이 우리 나라에 편을 들어서 그 소청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의심해서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2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70면
- 【분류】외교-왜(倭)
- [註 065]
○日本國使橘康廣來聘。 日本有天皇, 僭號紀元, 而不預國事, 國事聽於關白。 關白稱大將軍, 或稱大君, 以皇王同稱, 故關白不得稱王。 源氏爲關白二百餘年, 而平秀吉代之。 秀吉者, 本賤隷人, 不知自出。 關白拔之於傭丐, 爲卒伍, 善戰積功爲大將, 至假關白旌鉞, 討叛遠道, 國人怒其僭越, 反攻關白殺之。 秀吉回軍戰捷, 仍大殲源氏, 自立爲關白。 用兵四克, 幷呑諸島, 提封六十六州, 鍊精兵百萬, 日本之盛, 古未有也。 秀吉志滿意得, 又慮內患, 遂欲侵犯中國, 以前世舟犯江浙, 終不得意, 欲先據朝鮮, 從陸進兵, 以窺遼、薊, 而我國邈然無聞知。 蓋由其國法嚴, 行人不洩一辭也。 我國初聞秀吉弑君簒國, 而亦不詳其故矣。 秀吉言: "我使每至朝鮮, 而朝鮮使不至, 是, 卑我也。" 遂使康廣, 來求通信, 書辭甚倨, 有天下歸朕一握之語。 康廣亦傑驁, 對我人語, 輒嘲諷。 時, 校理柳根爲宣慰使, 禮曹判書狎宴。 康廣故散胡椒於席上, 伎工爭取之, 無復倫次。 歸館語譯官曰: "此國紀綱已毁, 幾亡矣。" 康廣之還, 但答其書契, 而稱以水路迷昧, 不許送使。 秀吉大怒, 族殺康廣, 疑康廣右我國, 不遂其請也。
- 【태백산사고본】 5책 2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70면
- 【분류】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