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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 11월 1일 을축 3번째기사 1570년 명 융경(隆慶) 4년

이준경 등의 건의에 따라 정공 도감을 설치하다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어떤이가 권철(權轍)에게 말하기를,

"정공 도감을 둔 목적은 원래 각읍의 공진(貢進)을 균평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옛날에는 풍요했던 주현(州縣)이 지금은 궁핍한 경우도 있고, 옛날에는 있었던 물산(物産)이 지금은 없기도 하고, 민호(民戶)가 옛날에는 많던 것이 지금은 줄어든 경우도 있고, 옛날에는 농사짓던 전야(田野)가 지금은 묵어 있는 곳도 있으니, 마땅히 각읍의 물산의 유무, 민호의 다과, 전야의 황벽(荒闢) 그리고 전곡(錢穀)의 풍색(豊嗇)을 조사하여 공진의 수를 각기 알맞게 책정해야만 공진이 균평해져 백성들이 실혜(實惠)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작은 고을은 큰 고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곳이 있는데도 정해진 공물의 수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어서 크고 작은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작은 고을 백성일수록 더욱 무거운 짐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는 고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하니, 권철이 이르기를,

"그와 같은 큰 정책은 명세지재(命世之才)가 아니고는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주군(州郡)에서 필요한 온갖 관용(官用)을 일체 백성에게 부과하지 말고 창곡(倉穀)으로 마련한다면 백성들이 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어떤이가 이르기를,

"고을이 빈부가 같지 않아 큰 고을은 지탱할 수도 있겠지만 작은 고을은 창곡이 많지 않은데, 수령들이 틀림없이 공(公)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교묘한 명목을 붙여 백성을 수탈할 것이다. 수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창곡이 바닥이 나 경용(經用)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으나, 권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426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공물(貢物)

○設正供都監。 李浚慶等建議, 請設局詳議, 以袪代納奸濫之弊, 從之。 以三公領之, 選朝士之有識者爲郞屬。 初欲革弊利民, 而上意務循前例, 大臣亦憚於更張, 秪以文簿, 筆削勘定, 卒無利益。 客有語於權轍曰: "正供都監, 本欲均列邑之貢進也。 而州縣或昔饒而今乏; 物産或昔有而今無; 民戶或昔衆而今寡; 田野或昔治而今荒, 當觀各邑物産之有無、民戶之多寡、田野之荒闢、錢穀之豐嗇, 改定貢進之數, 各得其當, 則貢進均平, 而民受實惠矣。 今也不然, 小縣不啻大州十分之一, 而其所定貢物, 略有差等而已, 無大小之別。 小縣之民, 尤苦役重, 此不可不改者也。" 曰: "如此大政, 非命世之才不能也。 但州郡百需爲官用者, 一切不賦於民, 皆以倉穀自備, 則民可休息。" 客曰: "州郡貧富不同, 大邑則或可支持, 小邑倉穀無多, 守令必不免憑公營私, 巧立名目, 以取於民。 假使不取於民, 若倉穀已盡而經用不可支, 則將何以處之?" 不以爲然。


  •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426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공물(貢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