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와 소문을 통해 공신 도감과 각인의 왜인 정벌의 공에 대해 논의하다
공신 도감이 아뢰기를,
"정왜(征倭)의 공(功)에 대해서 지금 마련했는데, 신들은 모두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니므로 단지 그 당시의 장계와 소문에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임진년에 순안(順安)에 진을 치고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행조(行朝)의 성원(聲援)이 되고 중국군으로 향도(嚮導)하고 토병(土兵)을 수합(收合)하여 모양을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순찰사 이원익의 공인 듯합니다. 전에 신들이 왜적을 치는 데 구관(句管)한 공이 있었다고 계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바다에서의 승전과 권율의 행주에서의 승전은 전교대로 마련하였습니다. 이억기(李億祺)는 전라 수사로서 초반의 한 곳 싸움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 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였습니다.
권응수(權應銖)는 영천(永川)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좌도(左道)를 보전시켰고,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를 지키면서 성을 보전하고 적의 명장을 죽여 왜국에가지 소문이 나게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켜 보전하므로써 강화(江華)를 통행하기에 지장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드러나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진주성을 지킬 때 이광악(李光岳)이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성중(城中)에 들어가 처음에는 성 지키는 일을 지휘하다가 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海上戰)에 있어서는, 이순신은 권준(權浚)·이순신(李純信)·안위(安衛)·배흥립(裵興立)의 공이 크다고 하였고 원균은 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積)의 공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미 수공(首功)에 참여되었으니 그들의 편장(褊將)들의 논공(論功)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율의 행주의 싸움에서 조경(趙儆)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협력하여 지휘하였으니 이 편비(褊裨)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응서(金應瑞)와 고언백(高彦伯) 등은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은 없으나 여러해 동안 싸움을 한 공이 있는데 이들 역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병들은 비록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켜 한쪽 방면을 보전한 자는 불가불 논상하여야 합니다.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실로 곽재우(郭再祐)의 힘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 녹훈(錄勳)을 마련할 때에 호종(扈從)에 대해서는 많게 하고 이들에게는 너무 소략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공로에 보답하고 뒷사람들을 권장함에 있어서도 미안한 듯하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수공(首功)이고 그 이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차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하였다. 간혹 그 가운데에 잘하였다고 하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논공(論功)을 함에 있어서는 조정의 의논을 따르겠다. 다만 반드시 지극히 공평하게 하여 외람되지 않게 하라. 또 여러 해 동안 싸운 공을 논한다면 김응서와 고언백 두장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호종한 것을 녹공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육지(陸贄)가 일찍이 말하였다. 가령 육지가 조금이나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호종한 신하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요리나 하고 말고삐나 잡던 천한 자들까지 모두 익운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름이 맹부(盟府)020) 에 들어 있는 자가 35인이나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정왜(征倭)의 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사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 【태백산사고본】 92책 15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448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註 020]맹부(盟府) : 공신을 기록한 문서.
○功臣都監啓曰: "征倭之功, 今方磨鍊, 而臣等俱非在陣目見之人, 只憑其時狀啓及聽聞之表表者, 試爲拈出。 壬辰, 順安陣, 遮遏賊路, 爲行朝聲援, 天兵嚮導, 收合土兵, 得以成形者, 似是巡察使李元翼之功。 前日臣等, 啓請句管征倭功者, 以此也。 李舜臣、元均海上之捷, 權慄 幸州之捷, 則當依傳敎磨鍊, 李億祺, 以全羅水使, 雖不參於初頭一處之戰, 而其後終始同參。 權應銖, 攻永川之賊, 左道得以保全。 金時敏, 守晋州, 全城殺賊名將, 聲聞倭國、李廷馣, 守延安全城, 使江華之路, 通行無礙。 此人等表表, 在人耳目。 晋州守城時, 李光岳以昆陽郡守, 入城中, 初有指揮守城之事, 及時敏死後, 又能力戰却賊。 李、元海上之戰, 李舜臣則以權浚、李純臣〔李純信〕 、安衛、裵興立, 功多爲言, 元均則以李雲龍、禹致績, 功在人右爲言。 李、元旣已參首功, 則其褊將等論功, 何以爲之? 權慄幸州之捷, 趙儆爲中衛將, 協力指揮, 則此褊、裨等, 亦何以爲之? 金應瑞、高彦伯等, 無對陣克捷之功, 而有積年枕戈之勞。 此等亦何以爲之? 義兵雖無大段成功, 其中首擧義, 保全一面者, 不可不論。 慶尙右道保全, 實由於郭再祐之力。 此人何以爲之? 大槪磨鍊錄勳時, 豐於扈從, 而太略於此輩, 則不但人懷缺望之心。 其於酬勞勸後, 似爲未妥。 敢稟。" 傳曰: "我國將士之禦倭, 正如驅羊而攻虎。 李舜臣、元均海上之捷, 爲首, 此外權慄之戰幸州, 權應銖之復永川, 差强人意, 其餘無聞焉。 或其所稱能事, 不過曰僅守一城而已, 其所論功, 當從廷議。 但必以至公, 毋使猥濫。 且若論枕戈之勞, 則似不止金、高兩將。 竝參酌施行。"
【史臣曰: "酬勞報功, 國家莫重之擧也。 以莫重之擧, 而輕施於人, 豈不大可惜哉? 扈從之不當錄功, 陸贄曾言之。 使贄而少知酬報之道, 當時從臣, 能不形渥? 而況燻腐贄御之賤, 竝參翊運之列, 名藏盟府之中者, 三十有五人, 其何以免後世之譏議哉? 至於征倭之功, 雖是天朝將士之力, 對陣克捷, 不無其功, 而乃欲豐於從臣, 而略於戰士, 可謂失酬報之道矣。"】
- 【태백산사고본】 92책 15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448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