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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2일 임자 3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별전에 나아가 대신·육경·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육경·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돈녕부사(領敦領府事) 이산해(李山海),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이덕형(李德馨), 형조 판서 이헌국(李憲國), 예조 판서 심희수(沈喜壽),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 호조 판서 이광정(李光庭), 이조 참판 이희득(李希得), 호조 참판 유영길(柳永吉), 병조 참판 이준(李準), 형조 참판 김신원(金信元),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상의(李尙毅), 가주서(假注書) 소광진(蘇光震)·윤황(尹煌), 기사관(記事官) 윤훤(尹暄)·유석증(兪昔曾)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머물러 두고 식량을 조치하는 등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어제 장관(將官)들의 기색을 보니 화를 내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3만 명을 머물러 두려고 하는 것은 우리 나라를 겁주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곤란한 점을 말하여 모두 철수하고 이곳에 머물러 두지 않으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저쪽의 자문이 오기 전에 빨리 회답하지 않는가? 여러 대신이 헤아려 조처하라. 그리고 둔전(屯田)·축성(築城)·연병(鍊兵)·관량(管糧)019) 할 사람의 성명을 적어 보내 달라고 하였으니 그 또한 써서 보내라."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식량은 감사(監司)가, 육병은 병사(兵使)가, 수병은 수사(水使)가 담당하여 각각 그 주관이 있고, 이밖에는 또 다른 관원을 차송할 수 없습니다. 중국 장수는 우리 나라의 사체를 몰라서 적이 물러간 뒤에는 하나같이 중국의 관원처럼 일을 분담시키려고 합니다. 관장할 인원의 성명을 써서 보내는 것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몇 명의 군사를 남겨 두어야겠는가? 군사의 수를 먼저 정한 뒤에 식량의 다과(多寡)도 요량할 수 있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전일 자문에는 1만 명으로 요청하였는데 만일 부득이하다면 1만 5천 명만 남겨야 하고 이밖에 더 남기면 어렵습니다. 1만 5천 명의 식량으로 15만 석이 소요됩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마련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1년간 소요되는 쌀은 9만 석입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지금 추곡은 이미 바닥이 났는데 앞으로의 비용이 적지 않으니 금년 추수 전까지 결코 이어서 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야 이미 체모가 없다지만 중국 사람도 그와 같이 처신하였다. 어제의 일로 말하자면 내가 여러 장수와 선후책(善後策)을 강정(講定)하는 자리이니 그 일이 매우 중대함에도 그 기상과 언어를 보니 중국인의 기상도 아니고 예절을 차리는 기풍이 조금도 없으므로 매우 한심스러웠다. 무장(武將)은 말할 것도 없고 학사(學士)라는 무리도 다 그 모양이니 천하의 일이 그래도 잘 될 것인가. 또 한 가지 우스운 일이 있다. 어제 저녁에 군문(軍門)020)조선의 재상을 불러서 촛불을 들고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으니 이것이 적을 방어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가. 번국(藩國) 사람으로 하여금 중국 사람의 풍채를 우러러보게 하는 데는 참으로 곤란한 처사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중국 사람이 시속 습관이 잘못 들어서이다. 내가 중국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식견이 있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서 급사(徐給事)의 말로는 형야(邢爺)같은 자는 중국에서 쉽게 볼 수 없다고 하였으나, 군문이 하는 일은 볼 만한 것이 없고 조정을 기만하는 일에 못하는 것이 없다."

하니,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서 급사가 하는 말이 ‘왜적을 죽이지도 않고 지금 태평연(太平宴)을 열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 급사가 나와 상면하여 고하기를 ‘내가 이곳에 와서 들으니 여러 장관이 미진한 일이 많이 있다고 하여 황공하고 부끄러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의 군대와 병마로 별도로 스스로 일어날 계획을 세우라. 지금 우리 군사가 많이 나왔으나 이룬 일이 뭐가 있는가. 우리 군사는 믿을 수 없다.’ 하였다. 신하가 조정을 기만하고서 무슨 일을 이루겠는가."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왜교성(倭僑城)에서 행장(行長)이 한밤중에 철수하여 도망갔는데 다음날 유 제독이 비로소 들어가 점거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이 물러가 텅 빈 성이라면 어린 아이라도 들어가 점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어제 내가 형 군문유 제독파추(播酋)021) 를 정벌할 때의 일을 들으니 극히 가공할 일이었는데 이번에 양야(兩爺)가 또 조정을 기만하였다. 우리 나라가 바른대로 주본을 올리면 기만한 죄상을 적발하는 것 같아 주본을 올리지 못하지만 저들이 이미 그 초본(草本)을 보았으니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군문이 초본을 보고 매우 노하였다고 하는데 유 제독도 노기를 부린다면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양야가 전일에 양응룡을 공격할 때 조정을 기만하여 일이 종결된 것으로 주본을 올려 함께 승진되기까지 하였는데 양응룡이 다시 배반하였으니, 필시 과도관(科道官)이 탄핵하여 ‘형 군문이 전일에 조정을 기만하더니 이번 동정(東征)의 일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요문울(姚文蔚)이 상본(上本)하자 황상(皇上)이 내각(內閣)·구경(九卿)·과도관에게 회의하라 하고 성지(聖旨)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 복제(覆題)를 보니 저번에 이미 조사를 면제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 대한 조사를 면제한 것이 전에 이미 조치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중국에는 올바른 논의가 없다. 이번에 적이 물러간 것이 과연 정응태(丁應泰)의 공이란 말인가. 중국은 사람마다 조정을 기만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으니 나는 일찍이 속으로 웃으면서 ‘이와 같이 한다면 사기는 진작될 리가 없다.’고 하였다."

하자, 이헌국이 아뢰기를,

"아무리 중국이라 해도 어찌 조종조(祖宗朝)부터 그러하였겠습니까. 그 말류의 폐단이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사를 머물러 두는 일은 아직 천천히 해야 하니 앞으로 큰일이 있을 것이다. 서 급사(徐給事)는 외면만 알 뿐이고 이번에 흉적에게 화친의 조건으로 인질을 보내는 곡절은 반드시 모를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모 유격(茅遊擊)022) 이 적에게 보낸 글을 보니 왕자와 배신(陪臣)을 다 들여보내기로 허락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적이 어찌 하루아침에 까닭없이 물러갔겠는가. 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자와 배신을 보낸다고 하였는데 저들이 만약 그것으로 꼬투리를 잡는다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국이 이 일을 모르게 해도 되겠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형 군문(邢軍門)에 대해서는 모두 원만하고 후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어제의 일로 보면 극히 놀라운 일로 그 노기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마 제독(麻提督)023) 도 노하여 이덕형을 앞에 두고 꾸짖었으며, 양 경리(楊經理)는 별로 여러 말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광정(李光庭)은 아뢰기를,

"마 제독의 말이 ‘내가 국왕과 매우 친밀하고 다른 장관들도 다 그렇다고 말하였는데, 어제 내가 성난 소리로 크게 말하여 체모를 잃었다. 국왕이 화를 내지는 않던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접반사의 말로 보면 온순한 듯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형 군문은 강단(剛斷)이 없는 데다 재능과 슬기도 없다. 전일에 유정(劉綎)과 일을 함께 하여 군문이 유정에게 이처럼 구속을 받는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유정은 군문을 얕본다. 전일에 유정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내가 묻기를 ‘군문은 일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니 유정은 ‘군문이 만약 강단이 있다면 내가 장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호판(戶判)은 한 나라의 재정을 맡은 직임인데 자주 교체하고, 경상 감사도 차출하지 않아 지금까지 보내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를 여러 달이 지나도록 차송하지 않으니 매우 한심하다. 어제 좌상(左相)에게 말하였지만 적합한 사람을 빨리 차송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경상도는 토지가 비옥하여 병화(兵火)를 겪었어도 재력이 약간 남았다고 하니 감사를 오늘 내일 안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곳은 인재와 재물의 부고(府庫)이니 만큼 경상도를 수습한다면 전라도도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대신을 보내 수습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는 누가 적당한가? 이곳에서 의논해서 결정하여 오늘 정사를 실시해도 좋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관상감 제조를 겸하고 있습니다. 역서(曆書)를 반사(頒賜)하는 법이 조종조에는 매우 완비되어 팔도의 수령에게 다 내려주었는데, 지금은 겨우 대신에게만 주고 있으며 게다가 봄철이 이미 늦었는데 아직 반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전에 찍은 역서 4∼5천 권은 정응태 때문에 그같이 폐기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이미 들어갔으니 사용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중국 사람이 우리 나라의 역서를 많이 사 갔으니 정응태가 트집을 잡고자 한다면 금년의 역서만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정응태란 위인은 온통 사기(邪氣)로 차 있으니 그의 생각이 이에 이른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생트집을 잡으려고 하면 어찌 전일의 역서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사용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사용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고, 윤두수이산해가 아뢰기를,

"중국 장수가 이미 갔으니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 감사 문제는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적당한 사람들을 어제 이미 계달하였습니다. 품계가 높은 자는 다 탈이 있습니다. 조정 인물들의 재기(才氣)의 장단(長短)은 상께서 통촉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대신은 반드시 자세히 알 것인데 경들의 말은 모두 의례적인 말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는 비변사가 천거한 것으로 반드시 적합한지는 신도 모른다고 이미 계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를 금년에는 결코 수습하지 못하겠다. 봄이 이미 늦었는데 아직 아무런 조치가 없다."

하니, 이광정(李光庭)이 아뢰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감사가 없고 도사(都事)와 종사관이 있어도 모두 먼 곳에 있으므로 품보(稟報)할 일도 가끔 신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우도(右道)는 전부가 비어 있으니 반드시 별도로 조처해야 하는데 동해(東海)는 극히 험난하여 적이 침범하지 못하니 동해안 진보(鎭堡)의 군사를 부산으로 옮긴다면 좋을 듯합니다. 호조 정랑 이영도(李永道)가 ‘동래(東萊)기장(機張) 등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싶어하니 만약 나에게 조치하게 한다면 수습할 수 있다.’ 하였고, 이상신(李尙信)도 ‘우도를 이영도에게 맡겨 수습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보리 종자는 영천(榮川)풍기(豊基) 등지에 조금 저축이 있으니 옮겨다가 씨앗을 뿌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성채(城寨)가 매우 험난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쌓았던가?"

하니, 이광정이 아뢰기를,

"성을 쌓은 돌이 아주 무거워 운반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성의 토대는 대단히 넓었으니 윗부분은 차츰 뾰족한 모양이었으며, 성문의 길은 구부러져 곧장 달려 들어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석성(石城)의 높이는 2장(丈)이고 석성의 위에 또 토벽(土壁)을 1장 높이로 쌓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에 한 말인가?"

하니, 이광정이 아뢰기를,

"성이 견고한 데다 철환(鐵丸)을 비오듯 쏘아대므로 함락시키기가 어려운데 부산서생포(西生浦)에 있는 성이 모두 그렇습니다. 적이 물러가던 날 신의 군관(軍官)들이 바라보니, 전선이 온 바다를 뒤덮고 가는데 바닷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그 중에 한 척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가는데 중국 사람인 듯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성은 우리 나라 성의 제도와 너무도 다르다. 우리 나라는 서쪽에 있는 성채가 극히 볼 것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은 지모가 없다고 하겠다. 왜인을 우리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중국 대인(大人)들은 주야를 불문하고 서로 찾아다니는데 예절이 번거로우면 어지러워지는 법이다. 나는 중국 사대부도 이와 같이 밤에 나다니는지 모르겠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대인들은 밤에 술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마도 중국의 시속이 잘못된 것 같다.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유 제독이 여기 머물고 싶어한다는데 사실 그런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호남에 있을 때 들으니, 유 제독대연춘(戴延春)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형야(邢爺)가 나를 이 땅에 머물러 두려고 하나 나는 노모(老母)가 있어 머물기가 매우 어렵다.’ 하였다는데, 이는 군문의 뜻을 먼저 탐지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대연춘이해룡(李海龍)에게 ‘유(劉)의 이 편지는 먼저 스스로 머물고 싶어하는 뜻이다.’고 말하였고, 유 제독이억례(李億禮)를 불러 묻기를 ‘이 의정(李議政)과 국왕의 뜻은 어느 장수를 머물러 두고 싶어하던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머물고 싶어하는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 제독(李提督)024) 이 전일 들어갈 때 신이 말을 만들어 ‘고생하셨다.’고 고하니, 제독이 답하기를 ‘본국 장수는 본국에 있더라도 집에 있지 못하니 이 나라에 나온 것이 무슨 고생이겠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중국 장수는 항상 집안에 있는 날은 적은데 이 나라에 나오면 소득이 매우 많은 데다 군졸의 반찬값으로 나오는 월은(月銀)025) 도 많이 착복하니 그가 머물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부당하다. 조정이 나눠 준 군사들의 은전을 어찌 그와 같이 한단 말인가. 따로 자기 몫의 은전이 있을 텐데 말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중국 사람들이 염치가 전혀 없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매우 많다."

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유 제독은 황제의 명을 받고 적을 치러 나왔으면서도 마침내 적은 치지 않고 도리어 그들과 강화를 하였으니 매우 무상(無狀)합니다. 적이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성첩(城堞)을 허물어 성을 함락시킨 것처럼 하고, 땅에 묻은 시체의 머리를 잘라 자신이 잡은 것처럼 하는 등 조정을 기만하는 행위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유장(劉將)이 당초에 예교(曳橋)를 진격하여 포위한 지 15일 만에 퇴각하고 매우 후회하였으나 적이 물러간 뒤에 적의 성을 돌아보고는 비로소 함락시키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세가 어떻던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예교는 산이 길게 바다로 뻗어나와 양쪽은 해변이고 한쪽은 육지와 이어져 있는데 성을 다섯 겹으로 쌓아 외성(外城)을 함락시키더라도 내성이 또 있으므로 결코 함락시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적의 가옥이 밖에서 보면 한 채도 없는 것 같으나 안에 들어가 돌아보면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장(行長)은 그처럼 험난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면서 어찌하여 물러갔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아마도 수병(水兵)이 두려워 물러갔을 것입니다. 수병이 연일 혈전을 벌였는데 당선(唐船)은 선체가 작아 큰 바다에서는 좋지 않으나 작은 포구에 드나들며 탄환을 쏘고 칼을 쓰는 데에는 매우 신통하였습니다. 지난해 10월 28일 싸움에서는 왜적의 시체가 부지기수였고 11월 3일의 싸움에서도 죽은 왜적이 많았습니다. 소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니 행장의 집이 동쪽에 있었는데 중국 화전(火箭)이 그 집에 떨어지니 서쪽의 왜적이 모두 동쪽으로 달려가 불을 껐습니다. 이때 육병(陸兵)이 진격하면 성사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 신이 이억례(李億禮)를 불러 유 제독에게 ‘바로 지금 진격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유 제독은 끝내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유정이 항상 하는 말이 ‘양호(楊鎬)는 용병(用兵)할 줄 몰라서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나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틀림없이 이길 형세인데도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장이 수병이 무서워서 철수한 것이 아니고 혹시 진 제독(陳提督)유 제독이 한 마음이 되어 강화한 것은 아닐까?"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 두 장수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유정오종도(吳宗道)를 보내 진인(陳璘)에게 길을 터 적을 내보내라고 요청하니, 진인오종도를 크게 꾸짖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술책이 아닐까. 필시 겉으로만 그랬을 것이니 진 대인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강화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18일에 이순신(李舜臣)진인에게 말하기를 ‘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에 당도할 것이니 나는 먼저 가서 요격하겠다.’ 하니, 진인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듣지 않고 요격하기로 결정하고서 나팔을 불며 배를 몰아가자 진인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는데, 중국 배는 선체가 작은데다 뒤쪽에 있으므로 그저 성세(聲勢)만 보였을 뿐이고 등자룡(鄧子龍)과 진인 두 사람이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병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된 말인 듯하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수병의 대첩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신이 종사관(從事官) 정혹(鄭㷤)을 보내 알아보니 부서진 배의 판자가 바다를 뒤덮어 흐르고 포구에는 무수한 왜적의 시체가 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굉장한 승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이렇게 적을 토벌한 일이 없었으니 혹 과장된 말이 있더라도 크게 포상하여 다른 사람을 권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본국 출신 15인이 등자룡(鄧子龍)에 배에 함께 탔다가 다 전사하고 공주(公州) 출신 한 사람만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 전투 상황을 알아보니 장하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 군문이 수전(水戰)의 공을 포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군문은 유정과 교분이 두텁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개유정이 한통속이면 일이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 대신들이 헤아려 조처하라."

하니,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만 경리유정과 절친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정응태(丁應泰)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유정정응태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정응태를 어리석다고 하는가?"

하자, 이헌국이 아뢰기를,

"정응태는 흉험(凶險)하긴 하나 대체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성품은 순진하고 착한 듯하나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요동(遼東)에서 어떤 노파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어찌하여 만세덕을 귀국에 보내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호는 부하를 잘 단속하여 일로에 피해가 없으나 만 경리는 부하를 단속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경리가 나올 때에 모든 사람이 다 군사가 말썽을 부릴 것이라고 하였으나 신이 함께 행군하면서 보니 별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는데 만약 그의 군사가 말썽을 부린 것을 알면 필시 벌을 무겁게 주고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위풍(威風)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 경리가 저번에 나에게 하는 말이 ‘내가 귀국이 무함받은 일을 밝혀 주려고 하니 귀국이 즉시 자문(咨文)을 완비하여 보내오면 내가 제본(題本)을 하겠다.’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도 기뻐서 자문을 재촉하여 보냈으나 전혀 대답이 없으니 보잘것없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승락하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감히 사람을 속였으니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단을 한번도 사양한 적이 없다. 중국 사람을 접대할 때 예단은 폐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다만 조금도 사양하는 마음이 없었다. 양 경리(楊經理)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신도 문방(文房)에 사용하는 물건을 증정하였는데 모두 받고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위인은 천성이 비루한 사람이다. 얼굴을 마주 대해서는 승낙하고 뒤돌아서서는 답을 하지 않으니 제주(題奏)하리란 것은 기대할 수 없고, 회답까지도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상께서 중국 장수를 영접할 때 반드시 남대문 밖 연못가에서 하다가 대간의 계청에 따라 강가에 나가 영접하는데 이같은 풍설(風雪) 속에 매일 강가에 거둥하시는 것은 매우 미안합니다. 또 예부터 중국 장수는 으레 홍제원(弘濟院)에서 영접하였습니다. 지존의 몸이 멀리 나가 수고하시는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나라 임금의 거둥이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강가에서 영접하는 일은 지나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남겨 두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빨리 의정(議定)하여 자문을 만들어 보내라. 또 대신이 정문(呈文)하도록 하라. 군사 숫자는 1만 5천으로 요청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1만 명으로 요청하고 상황이 부득이하면 5천 명을 더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상 밖의 일을 말하겠다. 저쪽에서 만약 ‘3만 명에서 줄이면 즉시 철수하여 돌아가겠다.’ 하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예상 밖의 일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신들이 이 자리에서 강정(講定)해야 한다. 자문을 보내든 정문을 하든 1만 5천으로 요청했을 때 저쪽에서 되었다고 하면 좋지만 만약 ‘외로운 군대를 머물러 둘 수 없다. 양원(楊元)도 외로운 군사로 크게 패하였다.’고 하면 어찌해야겠는가? 그리고 중국 장수의 말이 무서워 양식의 유무를 생각하지 않고 많은 숫자를 주둔시키라고 청하면 필시 큰일이 생길 것이다. 경창(京倉)에는 몇 섬이 있고 팔도에는 몇 섬이 있는가? 큰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있는 것인데 7년 전쟁 뒤에 흉년이 한 번도 들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현재 창고에 곡식이 없으니 믿는 것은 금년 농사뿐이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금년이 풍년이 될지 흉년이 될지 알 수 없고 2월부터 8월까지 도저히 공급하고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은 이와 같으니 경들의 생각을 말하여 속히 강정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수령은 철저히 가려 의망해야 한다. 오늘 탄핵하였는데 다음날 도로 쓰니 대간의 말이 옳다면 여러 해를 폐기하더라도 좋다. 그런데 이 무슨 사체(事體)인가."

하고, 또 이르기를,

"탄환만한 작은 나라에 소소한 고을들을 무엇 때문에 나누어 설치하였는가. 제(齊)나라 땅은 컸지만 70여 개의 성에 지나지 않았다. 전국 3백 60고을에 공(龔)·황(黃)026) 을 어디서 얻겠는가. 마치 객사(客舍)의 길손과 같으니 속담에 이른바 관가 돼지 배앓이하는 격인데 자주 교체하니 이 무슨 도리인가. 내 생각은 3백의 수효를 중요시하지 말고 통합하여 줄이고 싶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통합하여 줄였다가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더욱 피폐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과 같은 말은 나도 들었다. 내 생각은 반드시 그와 같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 불가함을 피력했을 뿐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시행할 수 없으나 지금처럼 개혁하는 때는 할 수가 있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적이 비록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지만 그들은 교활하고 병력이 막강하니 다시 군사를 일으키려 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적이 군사를 징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징병과는 달리 각각 통령(統領)027) 이 있으니 다시 거병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적이 물러간 뒤로 사람들이 기뻐하여 적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는 극히 무리한 생각이다. 옛날부터 어찌 이와 같은 적이 있었는가. 중국 군사가 머무른다면 인심이 의지할 데가 있겠지만 이제 만약 철수하여 돌아가면 양남(兩南)의 인심은 필시 모두 불안해 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성지(城池)와 기계는 얼마나 조처하겠는가. 왜적이 소규모로 나오더라도 절대로 방어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오랫동안 대신을 보지 못하다가 오늘 말이 나왔기 때문에 말을 하겠다. 지금 민심은 극도로 고통을 겪고 있으니 중국 군사에 대한 지대(支待)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백성들이 혹 안다고 하더라도 변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중국 장수가 들어간 뒤에 혹시 대중을 불러모아 거사하는 무리가 있다면 현재의 군사와 기계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백성의 원망이 이미 극에 이르렀으니 어찌 모두가 선량한 백성이겠는가. 나라 밖의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날 화가 염려스럽다. 경성은 40리의 빈 성이고 군대는 도성을 보위하는 것인데 지금 경기의 군사는 몇 천명이나 있는가?"

하였다. 홍여순(洪汝諄)이 아뢰기를,

"국사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명령이 행해지지 않은 데서 온 결과입니다. 나라에 기강이 없어진 지가 오래인데 근일에는 더욱 심하여 날로 쇠퇴하고 해이해져 상께서 전교를 내리시더라도 전교만 받들 뿐이고 문서만 왕복할 뿐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조정에서 벌을 준다면 징계될 길이 있겠지만 지금은 이미 그렇지 못하므로 주관이 없이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날짜만 보냅니다. 근래의 일이 날로 위망(危亡)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조금도 떨치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오늘 상께서 이와 같이 전교하시고 대신이 이와 같이 아뢰더라도 내일은 모두 헛말로 돌아가 버리고, 그 중에 조금 생각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 시점에서는 국사를 할 수가 없다고 말하니 이것이 고질적인 폐습이 되어 실로 개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반드시 기강을 부지한 다음에야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판서(判書)028) 가 기강을 부지하려는데도 상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부지하지 못하였습니까. 대체로 우리 나라는 비변사가 필시 나라를 망칠 것입니다. 비변사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변사의 설립은 중묘조(中廟朝) 중년 이후에 비롯되었는데 그 당시 대신이 별국(別局)을 설치하면 반드시 뒤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 과연 그렇습니다. 방자(幇子)나 군졸 등에 관한 일을 병조에 물으면 비변사가 안다 하고 나라의 재정과 군량 등에 관한 일을 호조에 물으면 역시 비변사가 안다고 하니 대체로 보면 비변사 때문에 일을 그르칩니다. 대규모로 무사를 시취하였으나 끝내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유홍(兪泓)이 살아 있을 때 항상 하는 말이 ‘양계(兩界)의 무사를 시취하여 적을 쳐야 된다.’ 하므로 신이 그것을 잘못된 계책이라 하였는데 신의 말이 옳았습니다."

하고, 이헌국이 또 아뢰기를,

"봄날씨가 차고 밤은 깊은데 오랜 시간 옥체를 수고롭게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전교하시더라도 일을 종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없을 것이니 신들은 물러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장 눈앞의 일로 말하면 위로는 중국 장수가 모두 우리 나라에 불쾌한 감정을 갖고 있고, 아래로는 군사들이 쌀·소금·간장 등의 일로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나라는 재력이 미치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모두 노여워하고 있는데 접대까지 끊긴다면 군졸의 일은 굳이 말할 것이 없고 거칠고 사나운 무장(武將)이 한두 사람이 아니니, 다급히 말하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이고 느긋하게 말하면 우리 나라를 불쾌하게 생각하여 온갖 헛소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유사(攸司)는 이점을 유념하여 다른 관아에 일을 미루지 말고 국사만을 생각하여 잘 접대해서 들여보내야 하며, 대신 또한 담당 유사를 규찰하라. 내가 허약하고 병이 있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매일 접대하는 것은 스스로 좋아서가 아니고 반드시 잘 접대하여 들여보내고 싶어서이다."

하니, 이준(李準)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중국 군사가 자기들을 잘 접대하지 않았다고 하여 민간에서 약탈해갈 것이라고 의심하는데, 어제 중국 장수가 드러내놓고 약탈하겠다고 말하였으니 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호조가 재물을 축적해 두더라도 어디다 쓸 것인가. 다만 잘 대접해서 들여보내야 한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강 유격(姜遊擊)이 저번에 하는 말이 ‘유 제독이 들어오면 매우 곤란할 것이다.’ 하였고, 유격이 또 경리에게 고하기를 ‘이의정이 시장 사람들에게 쌀을 중국 군사에게 바꿔주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어제 군문(軍門)에게 또 그 말을 하였습니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강 유격이 처음에 도성에 들어와서는 우리 나라가 잘 대접한다고 매우 기뻐하다가 유 제독의 글을 본 뒤로는 자꾸 화를 내는데, 그는 대개 경리의 측근으로서 신임받는 자입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중국 사람이 시장의 쌀을 헐값으로 빼앗듯이 하여 사가기 때문에 시장 사람이 가게를 닫고 팔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 유격은 경박한 사람이다. 그날 말투에 화난 빛이 많이 있었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그날 밤중에 유격이 신을 불러 유 제독의 글을 주면서 ‘지금 즉시 국왕에게 입계하라.’ 하였는데 뜻밖에 대궐에 들어와 진달하느라 그 게첩을 빨리 입계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장수와 군사를 접대하는 일에 좌상(左相)이 정성을 다하니 정승의 체모는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유 제독은 좌상이 그가 공이 없다고 말한 것에 화를 내고 있고 형 군문은 좌상이 쌀을 바꿔주지 말라고 한 것에 화를 내고 있어 두 대인의 원망이 다 좌상에게 있으니 좌상은 이 점을 알고 잘 조처하라."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 한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다만 소신이 미열(迷劣)하여 잘 주선하지 못함으로써 국사를 그르쳤습니다. 유 제독예교(曳橋)에서 퇴각한 뒤로 모든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가 용맹이 없다고 말하고 또 도성에 들어온 뒤에는 내가정(內家丁)029) 이 우리 나라 방자를 거느리고 우리 나라 일을 모두 탐문한다고 하며, 경리아문의 장수도 ‘이의정이 지난날 양 경리의 배신(陪臣)으로 있을 때는 적극 잘 대접하더니 이제는 전혀 전과 같지 않다.’ 하였습니다. 만 경리의 하인과 신은 접촉할 일이 없는데도 모두 신이 찾아와 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물력이 금년보다 조금 나아서 양호(楊鎬)가 나올 때는 조금 잘 대접하였습니다. 만야(萬爺)가 나올 때 연로에서는 별로 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나 성에 들어와서는 실망하여 화를 내며 ‘그대 나라가 나를 양야와 같이 대접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상의(李尙毅)가 아뢰기를,

"밤이 이미 늦었고 날씨도 추운데 상께서 오랫동안 인대(引對)하시니 매우 미안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자리를 파하고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6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농업-전제(田制) / 재정-국용(國用) / 과학-역법(曆法)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건설-건축(建築)

  • [註 019]
    관량(管糧) : 식량 관리.
  • [註 020]
    군문(軍門) : 형개(邢玠).
  • [註 021]
    파추(播酋) : 파주 토관(播州土官) 양응룡(楊應龍).
  • [註 022]
    모 유격(茅遊擊) : 모국기(茅國器).
  • [註 023]
    마 제독(麻提督) : 마귀(麻貴).
  • [註 024]
    이 제독(李提督) : 이여송(李如松).
  • [註 025]
    월은(月銀) : 매월 받는 은전(銀錢).
  • [註 026]
    공(龔)·황(黃) : 한(漢)나라 때의 순리(循吏)인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곧 선량한 수령을 말함.
  • [註 027]
    통령(統領) : 통솔하는 자.
  • [註 028]
    판서(判書) : 홍여순(洪汝諄).
  • [註 029]
    내가정(內家丁) : 안에서 부리는 하인.

○上御別殿, 引見大臣、六卿、備邊堂上。 領敦寧府事李山海海原府院君 尹斗壽、左議政李德馨、刑曹判書李憲國、禮曹判書沈喜壽、兵曹判書洪汝諄、戶曹判書李光庭、吏曹參判李希得、戶曹參判柳永吉、兵曹參判李準、刑曹參判金信元、同副承旨李尙毅、假注書蘇光震尹煌、記事官尹暄兪昔曾入侍。 上曰: "留兵措糧等事, 何以爲耶?" 李德馨曰: "昨見諸將官氣色, 多有忿厲之色。 欲留三萬者, 是欲刦我邦, 或言以難事, 盡欲撤去, 不欲留此之意也。 然則不可說也。" 上曰: "不待彼之咨文, 何不作速回答耶? 諸大臣商量處之。 且屯田、築城、鍊兵、管糧之人姓名, 開錄送之云, 亦爲書送。" 德馨曰: "糧餉則監司, 陸兵則兵使, 水兵則水使, 各有其主, 此外又不可差送他員。 唐將不識我國事體, 賊退之後, 欲爲分釐, 一如天朝官員矣。 該管人員姓名, 書送何難?" 上曰: "當留幾箇兵耶? 先定兵數後, 糧之多寡, 亦可料理。" 德馨曰: "前日咨文, 以一萬爲請。 如不得已, 則當留一萬五千, 此外難以加留。 一萬五千之糧, 十五萬石矣。" 上曰: "此邦可以措辦乎?" 德馨曰: "一年該用米九萬石矣。" 尹斗壽曰: "今者秋穀已盡, 前頭費用, 不爲些少, 秋成之前, 決難繼用矣。" 上曰: "我國之旣不成樣, 天朝之人, 亦如是處之。 以昨日之事言之, 予與諸將官, 講定善後之事, 其事至重, 而觀其氣象、言語, 非中華人氣象, 小無禮讓之風, 極爲寒心。 武將不足說, 學士輩皆然矣, 天下之事尙可爲乎? 又有一笑事, 昨夕軍門, 招朝鮮宰相, 執燭點面, 此有關於禦賊乎? 使外藩之人, 想望風采, 誠所難也。" 上曰: "天朝之人, 時習誤入矣。 予見天朝人多矣, 有識者亦然。 徐給事言, 如邢爺者, 朝未易多得云, 而軍門所爲無足可觀, 欺罔朝廷, 無所不至。" 李憲國曰: "徐給事言: ‘不殺倭賊, 今爲太平宴, 可駭之事’ 云, 此言是矣。" 上曰: "給事面告於予曰: ‘俺來此聞之, 諸將官多有未盡之事, 俺爲惶愧。’ 且言: ‘本國組練兵馬, 另爲自振之計。 今天兵多數出來, 所成何事? 天兵不可恃也’ 云云矣。 人臣欺罔朝廷, 何事可成?" 李憲國曰: "倭橋 行長, 半夜撤遁, 翌日, 劉提督始爲入據云矣。" 上曰: "賊退城空, 雖小兒, 可以入據。" 上曰: "昨日予聞邢軍門劉提督播酋征伐時事, 極可畏也。 今者兩爺, 又爲欺罔朝廷。 我國則直奏, 是似摘發欺罔之狀。 奏本雖不上達, 彼旣見其草, 事極難矣。" 李憲國曰: "軍門覽草, 極怒云矣。 劉提督若發怒, 則極爲可慮。" 上曰: "兩爺前日攻楊應龍, 欺罔朝廷, 以結局上本, 幷蒙褒陞, 而也復叛, 科道參云: ‘軍門前旣欺罔, 今東征之事, 亦如此也’ 云矣。 李德馨曰: "姚文蔚上本, 皇上令內閣、九卿、科道官會議, 聖旨時未下云矣。" 上曰: "予見其覆題, 有云前已免勘。 蓋我國之免勘, 前已爲之, 我國全未聞矣。 大槪天朝無正論。 今番賊退, 丁應泰之功乎? 天朝人人以欺罔爲能事。 予嘗自笑曰: ‘如是則士氣不足尙也。’" 李憲國曰: "雖天朝, 豈自祖宗朝如此乎? 其流之弊然也。" 上曰: "留兵姑徐, 將有大事。 徐給事只知外面而已, 今番和送兇賊曲折, 必不知矣。" 李德馨曰: "伏見茅遊擊送于賊中之書, 則王子、陪臣, 皆許入送矣。" 上曰: "兇賊豈一朝無端退去乎? 此必無之事也。 以王子、陪臣爲言, 而彼若執而爲辭, 則厥終何以爲乎? 使天朝未之聞知可乎?" 沈喜壽曰: "軍門, 皆言其渾厚底人也, 以昨日事見之, 則極爲駭愕。 怒鋒難當。 麻提督亦發怒, 面責李德馨, 經理則別無雜言矣。" 李光庭曰: "麻提督言: ‘俺與國王甚厚, 他將官皆言之矣, 昨日俺厲聲大言, 使無形迹。 國王無乃怒耶?’ 云云矣。" 上曰: "以接伴使之言見之, 則似順矣。" 上曰: "軍門旣無剛斷, 且無才智。 前日與劉綎同事, 予意以爲, 軍門拘於劉綎如是矣。 劉綎則眇視軍門矣。 前日劉綎南下時, 予問曰: ‘軍門, 主張之人也, 何以言也?’ 劉綎曰: ‘軍門若剛斷, 則俺不得爲將矣。" 李憲國曰: "戶判乃一國度支之任, 而頻數遞易, 慶尙監司亦未差出。 至今不送, 極爲可慮。" 上曰: "監司累月不爲差送, 極爲寒心。 昨日言于左相矣, 可合之人, 速爲差送可也。" 李憲國曰: "慶尙道土地沃饒, 雖經兵火, 物力稍存云。 監司今明日內發送可也。 人才之府庫、財物之府庫, 若收拾慶尙道, 則全羅道亦可收拾矣。 且別遣大臣, 收拾爲當。" 上曰: "監司誰可當者? 此處議定, 雖今日爲政可也。" 李憲國曰: "臣忝冒觀象監提調。 頒曆之法, 祖宗朝則甚備, 八道守令, 盡爲賜給, 今則謹賜大臣矣。 春節已晩, 尙未頒曆。 前刊曆書四五千卷, 以丁應泰之故, 如彼棄之。 今則已入去, 用之似無所妨。 唐人我國曆書, 多數買去。 欲作言, 則不特今年曆也。" 上曰: "禮曹議處可也。" 沈喜壽曰: "之爲人, 邪氣所鍾, 念之至此宜矣。 若欲生病, 豈無前日曆書?" 上曰: "然則用之可乎?" 李德馨曰: "用之何妨?" 尹斗壽李山海曰: "將已去, 用之宜當。" 上曰: "慶尙監司何不答之?" 李德馨曰: "可當之人, 昨日已達矣, 秩高者, 皆有頉矣。 朝廷才氣長短, 自上洞燭矣。" 上曰: "予何知之? 大臣必詳知。 卿等之言, 皆循例之言也。" 李德馨曰: "此備邊司薦也。 必合與否, 臣亦不知, 已爲啓達矣。" 上曰: "慶尙道今年則決不可收拾。 春節已晩, 尙無措置等事矣。" 李光庭曰: "賊退之後, 監司無有, 雖有都事及從事官, 皆在遠地, 雖稟報之事, 時或來問於臣矣。 右道一空, 必須別樣處置。 東海極險, 賊不得犯。 東海堡軍, 移入於釜山, 則似爲便當。 戶曹正郞李永道言: ‘東萊機張等地, 人欲入居, 若以吾使之措置, 則可以收拾。’ 李尙信亦言: ‘以右道委於李永道, 收拾可也’ 云矣。 牟種則榮川豐基等地, 稍有餘儲, 移轉落種則似好。" 上曰: "賊寨甚險云, 何以築之?" 李光庭曰: "城石極重, 難可運之, 且城基則甚廣, 而上端則漸銳, 城門回曲, 難得馳入。 石城高二丈, 石城之上, 又築土壁一丈矣。" 上曰: "賊城難拔云, 何以言也?" 李光庭曰: "城旣堅固, 鐵丸如雨, 是以難拔矣。 釜山西生浦皆然。 賊退之日, 臣之軍官輩, 望見賊船蔽海而去, 海水不得見。 有一船鼓吹而去, 蓋唐人也云矣。" 上曰: "賊城與我國城制, 絶遠矣。 我國西方城寨, 極爲無狀, 我國人可謂無算。 以比我國人, 則霄壤不侔矣。" 上曰: "天朝諸大人, 勿論晝夜相訪。 禮煩則亂。 予言天朝士大夫, 亦如是夜行乎?" 李憲國曰: "諸大人喜爲夜飮矣。" 上曰: "蓋天朝時習, 似爲誤入。 豈有此道?" 上曰: "劉提督欲留此地云, 然耶?" 李德馨曰: "在湖南時, 劉提督簡通于戴延春曰: ‘邢爺欲留俺於此地, 俺有老母, 留之甚難。’ 此蓋先探軍門之意也。 延春李海龍曰: ‘之此簡, 先自欲留之意也’ 云矣。 劉提督招問李億禮曰: ‘李議政及國王之意, 欲留何將?’ 云云矣。" 上曰: "其欲留, 何意歟?" 李德馨曰: "李提督前日入去之時, 臣措辭告以辛苦, 提督答曰: ‘天朝將官, 雖在中朝, 不得在家。 出來此邦, 有何辛苦?’ 云云。 蓋天朝將官, 在家之日常少, 而出來此邦, 所得甚多, 且軍卒鹽菜月銀, 亦爲多斂, 其欲留者此也。" 上曰: "此亦未安。 朝廷頒給軍兵之銀, 何如是爲之乎? 自有渠銀矣。" 上曰: "天朝人廉恥都無, 不可知之事, 甚多矣。" 李山海曰: "劉提督受命討賊, 而終不討賊, 反與之和, 無狀之甚也。 賊退之後, 始入毁破城堞, 若陷城者然, 掘屍斬頭, 若獲得者然。 欺罔朝廷, 至於此極。" 李德馨曰: "將當初進圍曳橋, 十五日而退兵, 將甚悔。 及賊退之後, 巡審賊城, 則始知其難陷矣。" 上曰: "形勢何如?" 李德馨曰: "曳橋有山斗起, 兩邊濱海, 一面連陸, 城築五周, 雖陷外城, 內城又有, 決難陷矣。 且賊之家舍, 自外見之, 則似無一家, 入內巡審, 則不知其數矣。" 上曰: "行長如是據險, 何以退遁乎?" 李德馨曰: "蓋畏水兵而退遁矣。 水兵連日血戰。 唐船體小, 若於大洋中則不好, 而其於出入小浦, 放丸用劍, 極其精妙。 二十八日之戰, 屍不知其數, 初三日之戰, 死亦多。 小臣登高見之, 則行長之家, 在於東邊, 唐火箭落於其家, 西邊之, 全數東走救火。 若於此時, 陸兵進攻, 則可得成事, 臣招李億禮, 請於劉提督曰: ‘此時可以進擊’ 云, 則竟不從矣。" 上曰: "不入之意, 何意也?" 李德馨曰: "劉綎每言: ‘楊鎬不解用兵, 多殺軍兵。 俺欲不殺一人, 而蕩平賊突’ 云矣。 大槪有必勝之勢, 畏怯不入云矣。" 上曰: "行長非畏水兵而撤渡, 無乃陳提督劉提督, 作爲一心講和乎?" 李德馨曰: "兩將, 胥不相好。 吳宗道, 請於陳璘, 開途出賊, 陳璘大責吳宗道, 終不許之云矣。" 上曰: "無乃術耶? 此必外貌爲之。 大人不許, 則和事不成矣。" 李德馨曰: "十八日李舜臣言於陳璘曰: ‘賊之援兵, 數日內當到, 我當先往邀擊。’ 將不許, 李舜臣不聽, 決意邀擊, 吹角行船, 將不得已隨後。 唐船則體小, 且在後尾, 只示聲勢而已。 但鄧子龍陳璘, 登板屋船, 入戰云矣。" 上曰: "水兵大捷之說, 恐是過重之言也。" 李德馨曰: "水兵大捷, 則不是虛言也。 小臣遣從事官鄭㷤往探, 則破毁船本板, 蔽海而流, 浦口屍積在, 不知其數。 以此見之, 可知其壯捷也。" 李憲國曰: "討賊無如此時。 雖或有過重之言, 不可不優奬, 以勸他人。" 李德馨曰: "本國出身十五人, 同載於鄧子龍之船而皆死, 公州出身一人生還, 問其相戰曲折, 則可謂壯也。" 上曰: "邢軍門欲不褒水戰之功, 此何意歟?" 李德馨曰: "軍門與劉綎相厚之故也。" 上曰: "一心, 則事極難矣。 大臣商量處之。" 沈喜壽曰: "萬經理亦與劉綎相切云矣。" 李憲國曰: "丁應泰則愚人也, 劉綎應泰之比也。" 上曰: "何以應泰爲愚乎?" 李憲國曰: "雖凶險, 蓋愚人也。" 上曰: "經理何如人乎?" (冗喜壽)〔沈喜壽〕 曰: "性似純善, 而殊無所爲之事。" 李憲國曰: "遼東有老嫗, 謂我國人曰: ‘爾國何以歸?’ 蓋楊鎬則善於檢下, 一路無弊, 萬經理不能檢下之故也。" 沈喜壽曰: "經理出來時, 人皆言軍兵作挐, 及臣跟行, 則別無作弊之事矣。 若知其作挐, 則必重究不貸, 但無威風, 人皆不畏矣。" 上曰: "經理頃日謂予, 俺欲辨白貴邦受誣之事。 貴邦卽完咨文送來, 則 俺當爲題本云云。 予聞此言, 深用喜悅, 咨文催促送之, 則了無對答之言, 可知其無狀也。 人之然諾必重, 而乃敢欺人, 予以爲無用之人也。 且禮單一不辭讓。 天朝人相接之時, 禮單不可廢也, 但小無辭讓之心矣。 楊經理則一不受之。" 沈喜壽曰: "臣亦文房所用之物呈之, 皆受不辭矣。" 上曰: "其爲人, 天品卑陋之人也。 當面旣諾, 背面不答, 題奏不可望, 回答亦不爲, 此何道理?" 李憲國曰: "當初自上, 迎慰天將, 必於南大門外蓮池邊, 臺諫啓請, 乃於江上出迎。 如此風雪, 逐日動駕於江上, 極爲未安。 且自古天將, 例迎於弘濟院矣。 遠勞玉體, 甚爲未安。 國君之擧動, 豈宜如是?" 沈喜壽曰: "江上迎慰過矣。" 上曰: "留兵之事, 何以爲乎? 速爲議定, 搆咨以送。 且大臣呈文可也。 兵數則以一萬五千, 請之可乎?" 李德馨曰: "以一萬請之, 如不得已, 則加以五千似當矣。" 上曰: "以意外之事言之, 彼若曰: ‘若減三萬, 卽當撤回’ 云, 則何以爲乎? 意外之事, 不可不留念, 諸大臣在此講定可也。 送咨文, 或呈文, 以一萬五千爲請, 彼曰是可也云, 則好矣, 若曰不可以孤兵留屯, 楊元亦以孤軍大敗云, 則奈何? 且畏天將之言, 不念糧餉有無, 多數請留, 必生大事。 京倉有幾石, 八道有幾石乎? 大兵之後, 必有凶年, 而七年之後, 一不失稔, 幸也。 今者穀不在庫, 而所恃者, 今年之農也。" 尹斗壽曰: "今年之豐歉, 不可知也, 農前自二月至八月, 萬無接濟之理矣。" 上曰: "予意則如此, 卿等之意, 速爲講定。" 上曰: "守令當極擇擬望可也。 今日彈劾, 明日還用, 臺諫之言若是, 則雖累年廢棄可也。 是何事體?" 上曰: "彈丸小邦, 小小縣邑, 何以分置? 地雖大, 不過七十餘城。 三百六十州, 何處可得? 如逆旅之過人, 諺所謂官猪腹痛也。 數數遞易, 此何道理乎? 予意則三百不關, 欲合而小之。" 尹斗壽曰: "合而小之, 不得其人, 則尤爲傷敗。" 上曰: "如卿之言, 予亦聞矣。 予意非必欲如是, 陳其不可耳。 且在平日, 則不可得爲, 而如此改時, 亦可爲也。" 上曰: "賊雖撤渡, 賊情狡詐, 兵力强悍, 雖欲更擧, 有何難乎? 賊之發兵, 非如我國之徵兵, 各有統領, 更擧何難? 自賊之退, 人情喜悅, 以爲賊不更來, 極爲無理。 自古豈有如此賊乎? 天兵若留, 則人心有賴, 今若撤還, 則兩南人心, 必皆危懼。 城池、器械, 幾何辦措? 雖小小出來, 萬無防禦之理矣。" 上曰: "久不見大臣, 今日發言故言及矣。 今民心極苦。 天兵支待, 不得已之事, 民或知之, 亦不可謂無變也。 天將入去之後, 設有嘯聚之徒, 則軍兵、器械, 可以禦之乎? 民怨已極, 豈皆良民? 外賊不畏, 內禍可慮。 京城乃四十里空城也。 兵者衛國。 今者畿邑之兵, 有幾千耶?" 洪汝諄曰: "國事之至此者, 紀綱不立, 號令不行之所致也。 國之無紀久矣, 近日尤甚, 日就凌夷解弛, 雖自上如(敎)〔是〕 傳敎, 只承聞而已, 只文書往復而已。 如是而朝廷若加罪罰, 則庶有懲戒之路, 而今旣不然, 故遷就退托, 悠泛度日。 近來之事, 日就危亡, 小無振起之念。 今日自上如是敎之, 大臣如是啓之, 明日竝歸於空言。 其中稍有計慮者, 則必曰當此時, 不可爲國事。 此爲痼弊, 實難改革。 必須扶持紀綱, 然後庶可收拾。" 李憲國曰: "判書扶持紀綱, 而自上不許扶持乎? 何不扶持乎? 大槪我國, 以備邊司, 必亡國矣。 不設備邊司, 則國不危矣。 備邊司設立, 始於中廟朝中年以後, 其時大臣以爲設立別局, 必有後弊, 今果然矣。 幇子、軍兵等事, 問于兵曹, 則曰備邊司知之; 國儲、軍餉等事, 問于戶曹, 則曰備邊司知之。 大槪以備邊司誤事矣。 大擧取武士, 竟歸於無用。 兪泓生時, 常言: ‘試取兩界武士, 討賊可矣’ 云云, 臣以爲失計。 臣言是矣。" 李憲國曰: "春寒夜深, 久勞玉體。 雖終夜傳敎, 無補於結局矣, 臣等可以退去矣。" 上曰: "以目前之事言之, 上則天將, 皆不快於我國, 下則軍兵, 以大米、鹽醬等事, 無不發怒。 此邦則物力不及, 衆情皆怒, 支待亦絶。 軍卒之事, 固不足說, 麤悍武將, 固非一二。 急言之則將有不測之禍, 緩言之則不快於我國, 造作虛言, 無所不至矣。 攸司留念, 勿以推委於他司, 只念國事, 善待入送可也。 大臣亦宜檢飭該司。 予之殘劣有病, 誰不知之? 然日日接待, 非自樂爲, 必欲善待入送。" 李準曰: "國人皆疑唐兵以不善支待, 搶掠於民間。 昨日天將, 直言其搶掠, 極爲可慮。" 上曰: "雖戶曹儲積, 何用? 只可善待入送。" 李德馨曰: "姜遊擊頃日言: ‘劉提督入來, 則極難云云’, 遊擊又告於經理曰: ‘李議政使市人, 不許換大米於唐兵云云’, 昨日軍門又言之矣。" 沈喜壽曰: "姜遊擊當初入城, 深喜我國之善待, 及見劉提督之書, 每爲發怒, 大槪經理之親信者也。" 李憲國曰: "唐人持小價, 怯奪市上大米, 以故市人閉肆不賣云矣。" 上曰: "遊擊來, 此輕躁人也。 其日辭氣, 多有怒色。" 沈喜壽曰: "其日夜半, 遊擊招臣, 給劉提督書, 此刻入啓云, 不意詣闕, 陳達其揭帖, 不速入啓也。" 上曰: "天將、天兵接待之事, 左相盡心爲之。 相人體貌, 亦然也。 劉提督則怒左相言其無功, 軍門則怒左相不許換大米。 兩大人之怨, 俱在於左相, 左相知而善處。" 李德馨曰: "小臣一身, 顧不足惜, 但小臣迷劣, 不能周旋, 以悞國事。 劉提督 曳橋退兵之後, 我國之人, 皆言其無勇, 且入城之後, 內家丁率我國幇子, 我國之事, 無不打聽云矣。 經理衙門將官亦曰: ‘李議政曾爲楊經理陪臣, 極力善待, 今日頓不如前’ 云。 萬經理下人, 與臣無相接之路, 皆言臣之不來見也。" 沈喜壽曰: "前年及上年, 物力稍優於今年, 楊鎬出來時, 稍爲善待。 爺出來, 一路別無作弊之事, 入城缺望, 怒曰: ‘爾邦待俺, 不如爺’ 云矣。" 李尙毅曰: "夜已向闌, 天日且寒, 自上久爲引對, 極爲未安。" 遂罷黜。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6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농업-전제(田制) / 재정-국용(國用) / 과학-역법(曆法)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건설-건축(建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