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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29일 경신 2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경기의 고을을 순찰하는 일로 떠나는 경기등 사도 도체찰사 유성룡을 인견하다

경기등 사도 도체찰사(京畿等四道都體察使) 유성룡이 경기의 고을을 순찰하는 일로 배사(拜辭)하니, 상이 인견을 명하였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이르기를,

"경이 순심(巡審)을 가는데 순심하고는 즉시 돌아오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순심을 한 후에 머물면서 할 일이 있으면 머물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부사(副使)도 있으니 즉시 올라와야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기민(畿民)들이 들어가고자 하므로 방비하면서 농사도 짓고 성도 지키게 하려 합니다. 여강(驪江)이상의 강탄(江灘)을 순심한 다음, 죽산(竹山)·양성(楊城)·안성(安城) 등처 및 수원(水原)·강화(江華)까지 갔다가 돌아올 계획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한 산성은 누가 지킬 만한가?"

하니, 답하기를,

"승장(僧將) 유정(惟政)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강(京江)의 선박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아뢰기를,

"모르겠습니다. 또 이번 적은 매우 어렵습니다. 중국 군사가 혹시 와서 구하더라도 왜적들은 반드시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기계와 성벽을 수선하고 인력을 다 동원할 뿐입니다. 경기와 충청도는 다소 방비가 되어 있고,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사이에 덕주 산성(德周山城)이 있는데 이시발(李時發)이 영(營)으로 삼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죽령과 조령 사이를 이시발이 담당하는가?"

하니, 아뢰기를,

"조령 동쪽과 죽령 서쪽에 성이 있는데 항아리 형세로 절벽이 높은 것이 완연히 삼각산 백운대(白雲臺)와 같습니다. 잠시 한 길을 열어놓아 사람들의 왕래를 허용하는데, 은밀해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로는 누가 적당한가?"

하니, 아뢰기를,

"이정암을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구차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인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정암은 살활(殺活)을 제대로 할 재간이 없다."

하니, 아뢰기를,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이 재간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래 질병이 있다. 조인득(趙仁得)은 느슨한 호인(好人)이어서 하는 바가 어떤지 모르겠다. 영상이 오늘 떠나는데, 이는 실로 경이 관장한 땅이니 천거하는 것이 옳다. 강찬(姜燦)은 실로 해서(海西) 사람이어서 감사를 제수하고자 하는데, 상중(喪中)에 있다고 하니, 소(疏)를 올려 사피하는 즈음에 늦어질까 염려된다."

하니, 아뢰기를,

"그 사람은 소활하고 잔약하여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저 감사를 구해 보내야 하니, 경은 모름지기 추천하라."

하니, 아뢰기를,

"비록 근시(近侍)하는 사람이라도 잘 선택하여 차송(差送)해야 합니다. 신은 듣건대 군사를 훈련하는 등의 일은 유영순(柳永詢)이 가장 힘을 쓴다고 합니다. 【영순은 바로 좌부승지(左副承旨) 유영순(柳永詢)인데, 이날 인견하는 연중(筵中)에 있었다. 】 신이 잘 모르면서 견문한 바를 아뢰었었는데, 지금에야 그가 힘써 심력(心力)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도(調度)하는 일에 있어서도 유영순이 역시 잘 합니다."

하자, 유영순이 아뢰기를,

"상께서 통촉하시어 모르는 것이 없으시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간 중국 사신으로 인하여 민력(民力)이 다하였으니, 양방형(楊方亨)은 사람이 아니다. 조서(詔書)를 받든 신하로서 어떻게 이처럼 탐욕스러울 수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에는 탐욕의 풍조가 크게 일어 회뢰(賄賂)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지고 간 물건도 모두 용사(用事)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중국을 믿어 회생(回生)하고자 하는데, 중국 사람들의 하는 짓이 이러하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중국의 재신(宰臣)들이 우리 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중국 군사들이 반드시 그대 나라를 침요(侵擾)할 것인데도, 그대 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와서 호소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평소 ‘조선은 근후(謹厚)한 풍속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인재가 일본보다 못하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완성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의논이 많아서 귀결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으니, 이적(夷狄)의 간이(簡易)함만도 못합니다." 【이것을 규간(糾諫)하지는 않고 도리어 임금의 실언을 맞장구치니 옳지 않다. 상께서 도리어 미안하다고 하교하여 후회하는 단서가 보이니 다행이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미안한 말이었다. 내가 미안한 말인 줄 아나 우연히 발설한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의론만 좋아하여 형식이 지나치고 질이 없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고자 하나 등넝쿨이 감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랏일은 자연 이루어지질 못합니다. 이런 때는 비록 선인(善人)이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 비록 시류의 병폐를 적중한 것이나 역시 선(善)을 진술하고 사(邪)를 막으며 현인을 천거하는 대신의 말은 아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본(奏本)의 초(草)를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니 마땅히 중국으로 올려보내야 하는데, 【그 한 조항에 ‘일본의 공순한 정상이 날로 천총(天聰)에 들리고, 우리 나라의 위태로운 정상은 조정에 들리지 않고 있다.’하였다. 】 병부에서는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병부의 자문(咨文)에 ‘일본이 공순하다.’라는 말이 있어 이렇게 한 것이니, 병부에서는 반드시 자기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것이다. 중국의 일 역시 아주 어렵다. 과도관(科道官)을 모조리 혁파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석성(石星)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나라를 위해 백방으로 경영하였는데, 만약 청정(淸正)이 온다는 말을 듣는다면 석성도 반드시 놀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성은 선한 선비라 할 수 없다. 기망(欺罔)하기만 힘쓰니, 이는 반드시 권신(權臣)일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스스로 사람에게 속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비록 속임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왜 강화에만 편중했는가? 지난번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보니, 석성의 말이 있었는데 ‘이후부터는 왜(倭)에게 「적(賊)」자를 붙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떠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머물라."

하였다. 중사(中使)가 배반(杯盤)으로 유성룡과 부사 노직(盧稷)을 공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남한 산성에서 가서 본 것을 나를 위해 한 폭(幅)의 그림으로 그려 보내라. 나는 대궐 안에서 지시하고자 한다."

하니, 유성룡 등이 배사(拜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봄바람이 매우 차니 속히 돌아오라."

하고, 마장(馬粧) 한 벌을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58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京畿等四道都體察使領議政柳成龍巡審畿邑事拜辭, 上命引見。 上御別殿謂曰: "卿巡審, 巡後卽還來乎? 成龍曰: "巡審後, 有可留而有爲事, 則欲留之耳。" 上曰: "然則亦有副使, 可卽上來。" 成龍曰: "南漢山城, 畿民欲入, 故欲爲防備, 且耕且守。 驪江以上江灘巡審後, 竹山(楊城)〔陽城〕 安城等處及水原江華而還來伏計爾。" 上曰: "南漢山城, 誰可守之?" 曰: "僧將(惟正)〔惟政〕 。" 上曰: "京江舟艦幾何?" 曰: "不知。 且此賊極難矣。 天兵雖或來救, 必不懼。 在我當脩繕, 盡人力然後已。 京畿忠淸, 稍有防備矣, 兩嶺之間, 有德周山城, 李時發爲營。" 上曰: "兩嶺之間, 李時發爲之乎? 曰: "之東、之西有城, 有甕形, 絶壁斗起, 宛似三角白雲臺。 暫開一路, 許人往來, 隱縈無人知者。" 上曰: "黃海監司, 得誰可者?" 曰: "非不知仍任李廷馣爲苟且, 而難於才, 故如是矣。" 上曰: "廷馣無殺活矣。" 曰: "誠如聖敎, 無幹辦之才。" 上曰: "元有疾矣。 趙仁得弛緩好人, 未知所(謂)〔爲〕 如何。 領相今日出去, 實卿所掌之地, 可以薦擧。" 上曰: "姜燦, 實海西人, 欲除監司, 聞其在喪, 陳疏辭避之際, 恐有遲延也。" 曰: "其人疎殘, 恐未當大事。" 上曰: "莫如先得監司送之, 卿須薦之。" 曰: "雖近侍之人, 極擇差送。 臣聞之, 鍊兵等事, 永詢最爲用力云。 【永詢, 卽左副承旨柳永詢, 是日在引見筵中。】 臣誤以聞見啓之, 今始悉其務用心力。 至於調度等事, 柳永慶亦能爲之。" 永詢曰: "有上洞燭, 無不知之,不勝惶恐。" 上曰: "此去天使, 民力已竭, 楊方亨不人不人。 何以以奉詔之臣, 而貪冒至此?" 成龍曰: "中原貪風大振, 賄賂公行。 今此持去之物, 皆爲塞用事者之口云矣。" 上曰: "予欲恃天朝而得生, 天朝之人所爲如此, 奈何? 是故天朝宰臣, 言于我國使臣曰: ‘天兵必侵擾汝國, 而汝國無一人來訴者’ 云。" 成龍曰: "如是故中原常稱朝鮮謹厚成風。" 上曰: "我國人才, 短下於日本矣。" 成龍曰: "作舍道傍, 三年不成。 我國人多議論, 不能得歸一之議, 政如聖敎, 不如夷狄之簡易。" 【不以此糾諫, 而反以將順其失, 不美也已, 自上反以未安敎之, 似有悔端, 幸矣。】 上曰: "此言未安之語。 予知其未安, 而偶然發也。" 成龍曰: "我國多好議論, 文勝而實無, 如美木欲長,而藤蘿糾結, 使不得長。 我國之事, 自然不成矣。 此時雖善人, 不能爲矣。" 【此言, 雖中時病, 亦非大臣陳善閉邪擧賢薦人之言也。】 上曰: "奏本草已啓下, 當爲上送天朝, 【其一款曰: "日本恭順之狀, 日聞於天聽, 小邦阽危之形, 不達於朝廷云。"】 而兵部必不悅矣。 但兵部咨, 有日本恭順之言。 如是爲之, 兵部必知其指自家也。 中原之事, 亦極難也。 科道官, 盡罷革。" 成龍曰: "石星自始至終, 爲我國經營百度。 若聞淸正之來, 必動念矣。" 上曰: "石星不可謂善士矣。 務爲欺罔, 此必權臣矣。" 成龍曰: "自誣於人耳。" 上曰: "初雖見誣, 竟何偏重和事? 頃見聞見事件, 有石星言, 今後勿以, 着賊字云。 蓋可知其心。" 成龍曰: "辭去。" 上曰: "姑留。" 中使以杯盤, 餽成龍及副使盧稷。 上曰: "卿往見南漢山城, 爲予寫出一幅圖形送之。 予欲指點於重宸之內耳。" 成龍等拜辭, 上曰: "春風甚寒, 速爲回還。" 以馬粧一部賜之。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58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