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비변사 대신 및 유사 당상인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의정부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晬),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상호군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다. 좌승지 이덕열(李德悅), 주서 조즙(趙濈),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이순민(李舜民), 검열 심액(深詻)·이유홍(李惟弘)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 사신(沈使臣)이 이곳에 그대로 머물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1순(旬) 동안 머물겠다고 하였는데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떠날 날짜를 아직까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 신에게 이르기를, ‘수레 30량(輛), 사인(舍人)·가정(家丁) 80여 명을 마땅히 먼저 보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접반사가 묻기를 ‘반드시 10일 전에는 미리 떠날 기일을 알아야만 인부와 말을 조치할 수 있다. 대인(大人)은 서쪽으로 갈 것인가. 남쪽으로 갈 것인가?’ 하니, 그가 답하기를 ‘내가 10여 일 머물면서 부산(釜山)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남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오늘 도감(都監)이 접대할 때에 당상(堂上)이 마땅히 다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가 비록 남쪽으로 간다지만 별로 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개 저 적들이 연속해서 나오니 근일 남쪽은 한 곳도 믿을만한 곳이 없는데, 체찰사와 원수는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장관(將官)들과 수령(守令)들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매우 걱정입니다. 군사를 조발하고 군량을 운반하여 믿을 만한 곳을 수어(守禦)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야만 조치할 수가 있으나, 적이 만약 급히 나오면 나라가 위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고언백(高言伯)의 군사가 비록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각 고을이 판탕되어 궤향(餽餉)을 하기가 아주 어려우니, 군사들이 피곤하면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위급함은 끝내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숫자가 많지 않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일 이곳에 머물던 16진(陣)이 반드시 다 나올 것입니다. 이 적들이 진주(晉州)의 경계를 출입하면서 전라도를 침범할 것같이 하니, 아군이 혹 서로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그것으로써 흔단을 삼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방어할 생각이 없는 듯, 수사(水使)는 수군이 오지 않는다고 핑계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말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임시로 군대를 모집하여 수가 차지 않으면 길 가는 사람까지도 모두 붙잡아 새끼로 묶어 보냅니다. 또 체찰사의 호령은 그런대로 따르지만, 감사(監司) 이하의 호령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군기(軍機)는 일각이 위급한데 더군다나 이처럼 완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양남(兩南)의 일은 그렇지만, 충청도는 조금은 두서(頭緖)가 있으니 괜찮을 듯합니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이 삼년성(三年城)을 지키고자 하여 이미 그곳에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옮겼다고 합니다. 삼년성의 길은 황간(黃澗)·영동(永同)과 접해 있어 적의 길을 차단할 수가 있습니다. 전라도 남원(南原)은 요충지이니 만약 이복남(李福男)이 그대로 그곳을 지키면 반드시 방어할 일이 있을 것인데, 지금은 최염(崔濂)이 가서 지키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역시 요충지인데, 이 두 고장이 궤멸되면 다시는 해볼 수 없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만약 산성(山城)을 지키려고 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각 고을에다 산성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목천(木川)의 백성들이 산성을 쌓기를 원하고 충주(忠州) 역시 그렇습니다. 수백 리 지경에 산성 하나로는 어려운 형세입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전일에 권율이 소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보니, 행장(行長)이 바야흐로 강화(講和)를 말하는데 고성(固城)·곤양(昆陽) 근처에 적도들이 쳐들어왔으므로 이것을 행장에게 말했더니, 행장은 ‘그 적은 나의 무리가 아니다. 조선에서 비록 그들을 죽이더라도 내가 가서 구할 리가 없다.’고 했다 했습니다. 신이 선거이(宣居怡)·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永登浦)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長門浦)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觀望)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 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 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원수(元帥)가 길에서 왜적 5∼6명을 만났다고 하는데, 적이 만약 원수가 고단(孤單)함을 알았다면 말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체찰사 역시 간약(簡約)한 사람인데 행동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罪狀)을 이미 헌의(獻議)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행장(行長)이 지휘(指揮)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하고, 정탁이 아뢰기를,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元均)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중국 장수 이 제독(李提督)이하가 모두 조정을 기만하지 않는 자가 없더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걸 본받는 자가 많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金鸞瑞)와 안위(安衛)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士卒)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李琚)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武將)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 원균이 그의 동생 원전(元㙉)을 보내 승전을 알렸기 때문에 그런 상이 있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거제(巨濟)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永登)·김해(金海)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閑山)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邀擊)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金景訥) 역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胡人)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의 장수로서 서로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김경눌은 매양 공(功)을 세우는 데 뜻을 둔 사람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평일에 자부하던 기개를 어찌 난시(亂時)에 시험하지 않고 있는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신이 임진년에 거느리고 오다가 용인(龍仁)에서 철환을 맞았는데 지금은 순찰사 둔전관(巡察使屯田官)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허탄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평소에 스스로 ‘글은 이름이나 쓸 정도이고 칼솜씨는 사람을 대적할 만하니, 오백의사(五百義士)같은 사람이다.’고 하였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평소에도 활을 잘 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팔에 병이 났습니다."
하였다.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데다가 적들이 천심(淺深)을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 뿐더러 또 건너편 안골(安骨)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어가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하자, 이정형이 아뢰기를,
"신 역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그렇습니다. 원균은 사변이 일어난 처음에 강개(慷慨)하여 공을 세웠는데, 다만 군졸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품이 그처럼 포악한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경상도가 판탕된 것은 모두 원균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 원균은 적과 싸울 때에나 쓸 만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인심을 잃었다는 말은 우선 치지 도외하고 주사(舟師)로 써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억기(李億祺)는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있는데, 쓸 만한 사람이다."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원균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자기 소견대로만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체찰사가 비록 논리적으로 개유(開諭)해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개 나라를 위하는 데는 성심이 있습니다.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움막을 만들고 자면서 역사를 감독해 수축하였습니다."
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상당 산성을 수축할 때에 위력으로 역사를 감독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고, 이 정형이 아뢰기를,
"상당 산성의 역사는 비록 이루어졌지만 도로 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분부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이순신은 그런대로 면종(面從)을 하지만 원균은 노기를 내어 청종(聽從)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공(功)을 빼앗겨서인가? 원균을 좌도 주사(左道舟師)에 임명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2인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신에게 말하였습니다."
하고, 이덕열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權俊)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그때에 왜선 안에서 여인(女人)을 얻어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왜장(倭將)이 3층 누선(樓船)에 앉아서 관(冠)을 쓰고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그 배가 매우 허술하였기 때문에 우리 배와 만나 즉시 부서졌다 한다. 왜선이 지금도 그곳에 있다 하니, 전선(全船)을 포착(捕捉)했다는 말이 반드시 허언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중국 사신을 지대(支待)하느라 주사(舟師)와 격군(格軍)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순신만을 책할 수는 없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불태우는 일을 이순신이 처음에 안위(安衛)와 밀약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불사르니 이순신이 도리어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정형이 아뢰기를,
"변방의 일은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서서히 처리해야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사람의 죄가 그렇기는 하나 지금부터 책려(策勵)해야 합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統制使)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조절하여 절제(節制)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이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사세가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을 중죄에 처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이현충(李顯忠)의 일도 있었으니 반드시 문관(文官)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조절하게 하여 기탄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한다. 그가 이미 통제사가 되었으니, 수군을 모아야 하는데 어째서 정돈하지 않고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겨울이면 격군(格軍)을 풀어준다고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으레 10월이면 격군을 풀어주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신이 남원(南原)에 있을 때, 이순신이 군관을 남원에 보내 군사를 모집하다가 그곳 병방(兵房)을 참(斬)하기까지 하여 백성들이 잇따라 소란하고 곡성(哭聲)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군관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멀고 가까운 친척까지 붙잡아 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군사를 모을 즈음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날에는 군사를 뽑을 때 어떻게 하였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에는 공사천(公私賤)과 잡류군(雜類軍)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에도 어찌 업무(業武)하는 사람이나 제색군(諸色軍)이 없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충청도는 병사를 모집하여 속오군(束伍軍)으로 삼은 자가 5백여 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시발(李時發)이 거느렸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선봉군(選鋒軍) 8백여 명 역시 조련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쓸 만하고 그 외에는 쓸 만한 군사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밖에 어찌 제색 군사(諸色軍士)가 없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선봉군(選鋒軍) 8백 명 외에 출신(出身)·업무(業武)한 사람들을 점차 뽑아야 하는데 원수(元帥)가 충청도에 전령(傳令)하여 1만 명을 먼저 뽑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사(監司)는 부득이 전결(田結)로써 괄군(括軍)하니, 사람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서로 모여 도둑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결(結)로 괄군하면 호미를 든 무리들일테니 소란만 할 뿐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절제(節制)도 아니고 속오(束伍)도 아니므로 의거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8결로 괄군하는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는 이미 속오를 마쳐 품관(品官)으로 파총(把總)을 삼았으니, 만약 조발(調發)함이 있으면 8결로 괄군하는 경우처럼 흩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은 으레 서반(西班)의 직함을 겸하니, 이는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이므로 수령도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한갓 문교(文敎)만을 숭상하여 각 고을에 훈도(訓導)를 두고 있는데, 군사 훈련도 훈도를 설치해야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경기를 보건대 파총의 권한이 수령보다 큽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군사 양성을 위해서는 먼저 군량을 비축하기를 《진서(陣書)》에 인용된 《관자(管子)》에 있는 단속(團束)의 말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결코 군사 양성에 능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조발을 주관하고, 수령은 백성만 다스리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군사 훈련도 훈도의 제도처럼 하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수령은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를 징발하면 며칠 안에 모두 모집할 수 있지만, 충청도의 군사를 징발하면 반드시 때에 맞춰 조발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속오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수령이 고을을 비우고 전쟁에 나아가면 사나운 도적들이 생기게 될 것이니, 이것이 염려입니다. 그리고 변방의 소식을 전하는 일도 반드시 지체될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경기의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령들이 파총(把總)에게 군사를 빌기 때문에 감사(監司)가 중국 사신이 올 때에 인부를 조발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부득이 수령으로 파총을 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군량 운반하는 일을 모두 파총에게 미루고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군량 운반하는 일은 수령이 맡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에게 수군을 나누어 통제하게 하는 일을 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하고자 하면 신의 생각에는 마땅하다고 여기나, 서로 제지하고 방해하는 걱정이 있을까 싶으니, 중국 제도의 참장(參將)이 전쟁을 하면 독전(督戰)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게 해야 합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종사관(從事官)으로 독전하게 하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조절하게 하여 보내야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한효순(韓孝順)에게 독전(督戰)하게 하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독전하는 사람이 한 곳에 있으면 그는 반드시 꺼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또 병사(兵使)는 누구를 대신시킬 것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그곳 인심은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병사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하서(下書)하여 위유(慰諭)하고, 두 사람을 책려해야 합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말로는, 이순신의 군관(軍官)이 원균이 있는 곳에서 돌아왔는데, 군중에서 사설(邪說)로 고동(鼓動)하여 주장(主將)을 배척했다 하여 군관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도량(度量)이 좁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가 종사관까지 보내 품하였는데, 이곳에는 다만 하서만 했을 뿐 별달리 조치한 일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이와같이 하면 말할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지난 겨울에 원수(元帥)의 장계를 보니 ‘감사(監司) 이용순(李用淳)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하였기에 내가 매양 괴이하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개 체찰(體察)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호령이 서로 견제되는 것이 염려할 만하다."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호령이 서로 견제되면 반드시 패하는 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종사관에게 이르기를 ‘원수(元帥)와 체찰사 사이는, 전쟁에 임해서는 품승(稟承)할 겨를이 없으나 보통 때에는 모든 일을 상의하고 의논하여야 한다. 어찌 체찰사가 백성들만 살필 수 있겠는가.’ 하였었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가 한번 호령을 내렸는데, 또 도원수(都元帥)가 호령을 내리니 호령이 여기저기서 나오면 사세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국처럼 한 사람은 군량을 주관하고, 한사람은 군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호(名號)는 다르나 한 아문(衙門)이니, 이 제독(李提督)은 군사를 주관하고 송응창(宋應昌)은 군량을 주관한 일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원수의 뜻은 4∼5만의 군사를 조발하고자 하고, 체찰사의 뜻은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청야(淸野)하면서 기다리고자 하니, 두 사람의 뜻이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하 장관(將官)들이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 만약 한 아문을 만들면 원수는 마땅히 부원수(副元帥)가 될 뿐이며, 도원수(都元帥)로 칭호하면 도원수는 싸움만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밖에서 헤아리건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큰 진(陣)을 만들어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는데는 본도(本道)에 있는 병마로 하고, 부족하면 전라도의 무사(武士)와 충청도의 선봉(選鋒)이 넉넉한데, 왜 전결(田結)로 군사를 뽑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해야 한다. 원균은 오늘 정사(政事)에서 해야 하는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
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요시라(要時羅)와 행장은 후대(厚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뒤에도 기대하는 바가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부(兵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이자(移咨)했는데, 경들의 생각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일본이 부산의 군사를 철수하면 조선이 사신(使臣)을 보낸다…….’ 하였는데, 심유경(沈惟敬)에게 말하기를 ‘만약 부산의 군사를 철수시키면 우리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겠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빨리 의논하여 정하라. 한갓 의논만 할 일이 아니다. 의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물러가 속히 의논해 정하라. 또 손 경략(孫經略)에게는 낱낱이 치보(馳報)할 필요는 없고, 장계(狀啓)가 오면 바로 호응원(胡應元)에게 보이라."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저들이 만약 사신(使臣)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병(大兵)으로 바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황신(黃愼)을 보냈으니, 어찌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57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軍事)
○上御別殿, 引見備邊司大臣及有司堂上。 領敦寧府事李山海、議政府領議政柳成龍、判中樞府事尹斗壽、議政府左議政金應南、知中樞府事鄭琢、慶林君 金命元、戶曹判書金睟、兵曹判書李德馨、兵曹參判柳永慶、吏曹參判李廷馨、上護軍盧稷、左承旨李德悅、注書趙濈、事變假注書李舜民、檢閱沈詻ㆍ李惟弘入侍。 上曰: "沈天使仍留此處乎?" 柳成龍曰: "欲留一旬云云, 而未能的知。" 金命元曰: "出去日期, 時未言之。 昨日謂臣曰: ‘車三十兩, 舍人、家丁, 竝八十餘名, 當先送’ 云矣。" 金睟曰: "接伴使問以必於一旬前期, 預知行期, 然後可以措置夫馬。 大人西下耶, 南下耶?’ 天使答曰: ‘俺留十餘日待釜山人還南歸’ 云矣。" 命元曰: "今日都監接待時, 堂上當更問之。" 上曰: "彼雖南下, 別無所爲。" 成龍曰: "無可爲之事。 大槪彼賊, 連接出來, 近日南方, 無一信地。 體察、元帥, 論議不一, 將官、守令, 莫適所從, 此是悶迫之大者。 調兵、運糧, 守禦信地, 一邊農作, 可以措置, 而賊若急發, 則國事危迫, 不可勝言。 今此高彦伯之軍, 雖下南方, 各官板蕩, 餽餉極難。 軍士瘦困, 則無能爲也。 今日危迫, 不知厥終。" 上曰: "賊數不多。" 成龍曰: "前日留此十六陣, 必皆出來。 此賊出入於晋州之境, 若犯全羅道者然。 我軍或與之相戰, 則必以此爲釁端矣。" 上曰: "全羅道無意於防禦, 水使託言水軍不來云, 是何謂也?" 成龍曰: "臨時括軍, 軍不充數, 則行路之人, 亦皆捉之, 貫索而送之。 且體察號令, 猶或從之, 監司以下號令, 則人不聽從。 軍機一刻爲急, 而況如此其緩乎? 兩南之事則然矣, 至如忠淸道, 則稍有頭緖, 似乎可矣。 兵使李時言, 欲守三年城, 已於此處, 聚軍輸糧云。 三年城路, 接黃澗、永同, 可以把截賊路。 全羅道 南原, 要衝重地, 若李福男仍守此地, 則必有防備之事, 而今則崔濂往守矣。 全州亦是要衝重地, 此二邑潰裂, 則更無所爲。 今此人民, 不知所之。 若守山城, 則不得農作, 人皆以此爲悶。 各於其邑爲山城, 使之且耕且守可也。 木川之民, 願築山城, 忠州亦如之。 數百里之地, 有一山城, 則勢有所難。" 尹斗壽曰: "前日權慄通簡於小臣見之, 則行長方以講和爲言, 而固城、昆陽近處, 賊徒攔入。 此事言於行長, 則行長以謂: ‘此賊非吾徒也。 朝鮮雖廝殺此賊, 我無往救之理’ 云。 臣使宣居怡、李舜臣等率軍, 與永登浦留屯之賊相戰, 則長門浦留屯之賊來救, 與長門浦留屯之賊相戰, 則永登浦留屯之賊來救, 而行長之軍觀望而已。 似可繼援, 而終不來救。 今此之時, 亦隨來隨擊可也。 元帥路遇賊倭五六人云云, 彼賊若知元帥之孤單, 則不可說也。 體察使亦簡約之人, 若持身輕率, 則不可也。 頃日自備邊司, 李舜臣罪狀已爲獻議, 舜臣罪狀, 自上已爲洞燭。 今此之事, 一國人心, 莫不憤惋, 行長指揮, 亦不能爲之, 臨機易將, 雖曰重難, 舜臣似可遞矣。" 鄭琢曰: "誠有罪矣, 危急之時, 不可易將。" 上曰: "予未詳知舜臣之爲人。 性似少慧, 而壬辰以後, 一不擧事, 今此之事, 天與不取。 犯律之人, 何可每每容貸? 元均猶可代之。 唐官李提督以下, 無不欺罔朝廷, 我國之人, 效此者多。 如焚燒等事, 金鸞瑞與安衛密約爲之云, 而舜臣有若自己設策爲之者然, 予深以爲未穩。 如此之人, 雖得淸正之頭, 不可容貸。" 山海曰: "壬辰年, 元均功多云。" 上曰: "不可謂無功。 凡以先登爲貴者, 士卒見而效之。" 成龍曰: "臣家與舜臣洞內, 故臣深知舜臣之爲人。" 上曰: "京城人乎? 成龍曰: "然。 成廟朝李琚之子孫。 臣以舜臣可堪職事, 當初臣薦擧爲造山萬戶。" 上曰: "能文之人乎?" 成龍曰: "然矣。 性稟不爲撓屈, 稍有可取, 故此人爲某處守令時, 臣爲水使薦矣。 壬辰年, 臣於車嶺之路, 聞舜臣爲正憲, 元均爲嘉善, 臣意以爲, 爵賞過濫。 武將志氣易滿, 則不可用也。" 上曰: "其時元均, 送其弟㙉獻捷, 故有是賞。" 成龍曰: "入守巨濟, 則永登、金海之賊, 必有所憚, 而久據閑山, 別無所爲。 今此海路, 亦不邀擊, 烏得無罪? 但恐遞代之間, 事勢似難, 故前日以此啓達。 備邊司豈容護一舜臣哉?" 上曰: "舜臣不可一毫容貸。 武臣輕慢朝廷之習, 不可不治。 舜臣爲造山萬戶時, 金景訥亦以鹿屯島屯田事, 方在其處。 舜臣與景訥, 平日不相得。 舜臣得一胡人於夜半, 欺誕景訥, 景訥至於着裙而奔走。 景訥乃虛疎之人, 如此危地, 不爲戒嚴, 而舜臣則以一般邊將, 不可相戲。 予此事曾已聞之矣。 金景訥每以立功爲心之人, 未知今在何處。 平日自負之氣, 何不試之於亂時耶?" 金睟曰: "臣於壬辰, 率來于龍仁, 中鐵丸, 今則爲巡察使屯田官云。 大槪浮虛之人也。" 上曰: "此人平日, 自以爲書能記名, 劍可敵人, 五百中義士云云。" 金睟曰: "平日不能善射, 而今則臂病。" 廷馨曰: "舜臣以爲, 入守巨濟, 則固知好矣, 閑山島, 則藏船而賊不知淺深, 巨濟則其中雖廣, 藏船無所。 且與安骨之賊相對, 越邊入守似難云云。 其言似當。" 上曰: "入守似難, 於卿所見如何?" 廷馨曰: "臣亦未能詳知, 渠輩之所言如是。 元均自變初慷慨立功, 但不恤軍卒, 致失民心。" 上曰: "性其暴虐乎? 廷馨曰: "慶尙一道之板蕩, 皆由元均。" 上曰: "右相下去時, 以爲唯臨敵之時, 可用之人。 於此可以斟酌。" 應南曰: "失人心之言, 今姑置之, 用之於舟師可也。" 上曰: "李億祺, 予曾見之, 乃可用之人。" 廷馨曰: "不如元均。" 上曰: "元均以己所見爲之, 不爲撓改。 體察使雖論理開諭, 亦不改革云矣。" 成龍曰: "大槪爲國有誠。 築上黨山城時, 造土屋寢處, 而督役修築。" 山海曰: "築上黨山城時, 以威督役, 故人多怨者。" 廷馨曰: "上黨山城, 功役雖就, 旋爲雨壞。" 上曰: "體察使與李舜臣、元均, 有所分付, 而舜臣則渠雖未穩, 猶爲面從, 元均則怒氣勃勃, 不爲聽從云。 此其掩功之故耶? 屬元均以左道舟師, 又以某人, 鎭壓二人如何?" 廷馨曰: "舜臣、元均, 勢不相容。" 金睟曰: "元均每以舜臣掩功之言, 言於臣矣。" 德悅曰: "舜臣奪元均之功, 以爲權俊之功, 不與元均相議, 先爲狀啓。 其時得倭船中女人, 探知事實, 徑爲狀啓云矣。" 上曰: "其時倭將坐三層樓船, 戴冠着棊, 而其船甚爲脆薄, 故與我船相値卽破云。 倭船, 至今置在其處, 則全船捕捉之言, 想必不虛。" 上曰: "全羅道以天使支待, 舟師、格軍, 趁不整齊云。 如此之事, 則不可皆責舜臣。" 金睟曰: "焚燒事, 李舜臣初與安衛密約, 而他人徑先爲之, 舜臣反以爲自己之功。 然其事未可詳知。" 廷馨曰: "邊上之事, 不可遙度, 徐當處之。" 金睟曰: "此若實事, 則不可容貸。" 成龍曰: "渠罪(然)則然矣, 自今可以策勵。" 斗壽曰: "元均、舜臣, 皆爲統制使, 使之協勢可也。" 上曰: "雖以二人, 分爲統制使, 必有調濟節制之人, 然後可也。 元均先登赴戰, 舜臣退而不救, 則事勢似難。" 應南曰: "如此則重罪舜臣可也。" 上曰: "古有李顯忠之事。 必以文官, 調濟二人, 使之有所忌憚可也。 渠旣爲統制使, 則團聚舟師可也, 而何以不爲整齊?" 成龍曰: "冬則放船格云矣。" 金睟曰: "例於十月, 放船格軍, 已成規矩, 以此趁不得整齊。" 斗壽曰: "臣在南原時, 舜臣以軍官, 送于南原聚軍, 至於斬其兵房, 民間繹騷, 哭聲徹天。 招軍官問之, 則捉其遠近一族之故也。 以此觀之, 聚軍之際, 多有不祥之事。" 上曰: "前日抄軍, 何以爲之?" 成龍曰: "前日則公私賤、雜類軍有之。" 上曰: "雖今日, 豈無業武之人及諸色軍乎?" 成龍曰: "忠淸道以募兵, 爲束伍者, 五百餘人。" 上曰: "李時發率領乎?" 成龍曰: "然。 選鋒軍八百餘人, 亦爲操練, 此皆可用之功, 此外無可用之軍。" 上曰: "此外豈無諸色軍士乎?" 成龍曰: "選鋒軍八百外, 出身、業武人等, 可以漸次抄出, 而元帥傳令於忠淸道, 一萬人先爲抄出云, 故監司不得已以田結括軍。 無乃逃避山谷, 嘯聚爲盜乎?" 上曰: "以八結括軍, 則是執鋤之徒也, 騷擾而已。" 應南曰: "非節制、非束伍, 而無依據, 故不得已以八結括軍。" 成龍曰: "如京畿軍, 已爲束伍, 以品官爲把總。 若有調發, 則非如八結之潰散也。" 上曰: "守令, 例兼西班職銜, 此乃領兵之任, 守令不可不赴敵。" 成龍曰: "我國徒尙文敎, 各邑設立訓導, 而訓兵, 有如訓導之設立可也。" 金睟曰: "以京畿觀之, 則把總之權, 重於守令。" 成龍曰: "養兵, 必先備糧餉, 如陣書管子團束之言可也。 然我國決不能養兵。 或以一人, 主其調發, 守令則治民而已, 此事何如?" 上曰: "訓兵如訓導之制, 則似乎可矣。 然守令不可不赴敵。" 成龍曰: "徵京畿兵, 則不日而皆到; 徵忠淸兵, 則必不能趁時調發矣。 此所以不爲束伍之故也。 且守令空官赴敵, 則必有獷悍之盜, 此其可慮, 如邊報傳通之事, 亦必遲滯。" 金睟曰: "詳聞京畿之事, 則守令借軍於把總, 故監司於天使時, 以調發人夫爲難, 不得已以守令兼把總云矣。" 上曰: "守令以運糧之事, 皆推之於把摠乎?" 金睟曰: "運糧之事守令當之。" 上曰: "以元均分統水軍之事, 於判書意如何?" 德馨曰: "渠欲有爲, 臣意以爲宜當, 而恐有掣肘之患。 必如中朝制度, 參將爲戰, 則有督戰之人可也。" 斗壽曰: "以從事官督戰可也。" 上曰: "必以某人, 專爲調濟而往可也。" 成龍曰: "以韓孝純督戰可也。" 上曰: "必有某人, 同在一處, 則彼必忌憚矣。 且兵使, 何人代之?" 金睟曰: "其處人情, 欲以羅州牧使爲兵使云矣。" 成龍曰: "下書慰諭, 策勵二人可也。" 德馨曰: "朴晋言: ‘李舜臣軍官, 自元均處還來, 而自中以鼓動邢說, 排擯主將, 黜其軍官。’ 兩間之事, 漸漸如此。"上曰: "我國之人, 度量狹窄。" 德馨曰: "體察使, 至遣從事官來稟, 而此處但下書而已, 別無處置之事。 今後如前, 則不可說也。" 上曰: "此事非細。 去冬見元帥狀啓, 監司李用淳, 志不得展云云, 予每以爲怪, 到今思之, 蓋指體察之言也。 此人等號令, 掣肘可慮。" 山海曰: "號令掣肘, 必敗之道也。" 上曰: "予謂從事官, 元帥之於體察, 臨戰 之時, 則不暇稟承, 而常時, 凡事相與商確議論可也。 豈有體察, 唯察民事之理乎?" 德馨曰: "體察使發一號令, 都元帥又有號令, 號令散出, 事勢至難。 如中朝, 一人調糧, 一人主兵, 如此爲之如何?" 上曰: "名號雖異, 此乃一衙門, 非如李提督主兵、宋應昌主糧之事也。" 成龍曰: "二人議論相異, 元帥之意, 欲調發四五萬兵; 體察之意, 修築山城, 淸野以待。 二人之意, 互相牴牾, 故以下將官, 莫適所從。 若以爲一衙門, 則元帥當爲副元帥而已, 以都元帥稱號, 則都元帥主戰而已, 自外料度, 不知所處。" 德馨曰: "作大陣, 遮截賊路, 則以本道之兵爲之, 不足則全羅武士、忠淸選鋒, 非不足, 而何以田結抄軍也?" 上曰: "可爲之事, 速爲之可也。 元均今日政, 亦可爲乎?" 廷馨曰: "元均爲統制使, 則事恐不成。 不可率爾, 詳審爲之。" 山海曰: "要時羅、行長, 不可不厚待。 今後猶有所望。" 上曰: "兵部奉聖旨移咨, 而諸卿處置如何?" 成龍曰: "日本撤釜兵, 朝鮮遣使臣云云, 而言于沈惟敬, 若撤釜兵, 則我國, 亦當遣使何如?" 上曰: "予意已諭, 速爲議定。 不必徒爲議論而已。 若以議論言之, 則必擒平秀吉矣。 退而速爲議定。 且孫經略處, 不可一一馳報。 狀啓來, 則卽示胡應元。" 成龍曰: "渠若不受使臣, 以大兵直擣, 則何以爲之?" 上曰: "帝命旣降, 不可不遣使。 旣遣黃愼, 今胡不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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