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는 관원과 군현의 제거를 비변사와 논하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국토는 작은데 군현(郡縣)이 너무 많아 3백여 읍에 이르고 있다. 내가 이제 군현을 없애고 합쳐 2백 개쯤으로 만들려 하는데 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어찌 다시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비변사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필요없는 관원을 없애고 군현을 합침으로써 민력(民力)이 여유 있게 하고 쌓인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참으로 힘써야 될 정치로서 옛날에도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상께서 늘 우리 나라가 국토는 협소한데 군현이 너무 많음을 염려하여 군현을 합치고 인재를 골라 맡기는 일에 간절히 마음을 두고 계시니 이런 점에 상의 계획이 미치게 된 것이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다만 이 일은 그 사이에 곡절(曲折)이 많아 이해(利害)가 상반(相半)되고 민심이 또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많으니, 충분히 헤아려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국은 주·군(州郡)이 비록 적긴 하지만 한 군이 다스리는 속현(屬縣)이 매우 많아 모두 영장(令長)을 두었으니, 이는 바로 우리 나라의 현령(縣令)과 현감(縣監)에 해당합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기재된 것을 보면, 패군(沛郡) 한 경내에 속현이 37개이고, 위군(魏郡)의 속현은 18, 거농(鉅農)의 속현은 20, 상산(常山)의 속현은 18, 청하(淸河)의 속현은 14, 탁군(涿郡)의 속현은 29, 평원(平原)의 속현은 43이며, 다른 곳도 이와 비슷한데 제후국(諸侯國)은 그 속에 들지 않았으니, 중국에서 지역을 나누고 관직을 설치한 제도를 상고할 수 있습니다.
고려(高麗) 때 외관(外官)의 제도를 보면, 대도호부(大都護府)는 3품 이상인 부사(府使) 1명, 4품 이상인 부사(副使) 1명, 법조(法曹) 1명, 의원 1명, 사문사(師文師) 1명을 두었고, 중도호부(中都護府)는 부사(府使)·판관·법조 각 1명을 두었습니다. 주·군(州郡)을 다스리는 원리(員吏)들의 품계는 동일했고 모든 현(縣)은 영(令) 1명, 위(尉) 1명을 두었고, 작은 현은 감무(監務) 1명을 두었습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필요없는 관직을 모두 혁파하여 아무리 큰 읍이라 하더라도 목사(牧使)·부사(府使)·판관(判官)만 두었을 뿐인데, 이제 또 작은 현을 합병하여 큰 읍을 만들고 관원은 다만 한 사람으로 다스리게 한다면, 일을 처리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 듯싶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항상 합병하는 것을 중난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중에 또한 합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있다면, 이런 경우는 마땅히 국가의 일이 안정된 뒤에 거리의 원근, 민가의 다소, 민심의 편부(便否) 여부 등을 융통하고 피차간의 형편을 참작해서 영구한 계획을 세운 뒤에야 비로소 폐단이 없이 시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다만 일시의 폐단 때문에 다시 다른 일을 논하지 않고 조급하게 합치게 되면 민심이 이미 불평스러워하는 터에 소송의 판결과 곡식의 수납·방출 및 병참을 지공(友供)하는 일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방애(妨礙)가 있게 될 것이니, 경솔하게 시행해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음죽(陰竹)의 경우는 무극역(無極驛)과 직선 거리로 40여 리인데 여주(驪州)에 합치면 죽산(竹山)과 충주(忠州) 사이의 거리가 현격히 멀어져 형세가 공활(空闊)해짐으로써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가령 다른 곳으로 합친다 해도 오늘날의 형세로 말하면 음죽을 결코 없앨 수 없는데, 더구나 현재 산성(山城)을 수축하는 등의 일이 있는데이겠습니까. 신들의 의견은 본현(本縣)을 그대로 두고 주관(主官)이 요량해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음죽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다만 군현에 관한 일은 참으로 아홉 마리의 양(羊)을 열 사람이 기른다는 말과 같다. 사람마다 각자 소견이 있으니 굳이 똑같아야 될 필요는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6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31면
- 【분류】행정(行政) / 역사-고사(故事) / 사법-법제(法制)
○傳曰: "我國, 國小而郡縣太多, 至於三百餘邑。 予方欲削而竝之, 爲二百許, 陰竹縣監, 豈可復立? 令備邊司更議處之。" 備邊司回啓曰: "汰去冗官, 合省郡縣, 使民力有紓, 而積弊稍去, 固是爲政之所務, 前古亦有行之者矣。 聖敎每患我國地方偏小, 而郡縣太多, 拳拳於合幷擇任之擧, 睿算所及, 實非偶然。 但此事其間曲折多端, 利害相半, 民情又多不便者, 不可不十分商量而處之也。 中國州郡雖小, 而一郡所領, 屬縣甚多, 而皆有令長, 卽我國縣令、縣監之類也。 以《漢書地理志》所載觀之, 沛郡一境, 屬縣三十七; 魏郡, 屬縣十八; 鉅農, 屬縣二十; 常山, 屬縣十八; 淸河, 屬縣十四; 涿郡, 屬縣二十九; 平原, 屬縣四十三。 他倣此, 而諸侯國不與焉。 其分地設官之制, 可考也。 高麗之時, 外官之制, 大都護府, 則有府使一人, 以三品以上爲之, 副使一人, 四品以上爲之, 判官一人, 六品以上爲之, 七品以下, 司錄兼書記一人、法曹一人、醫一人、師文師一人; 中都護府, 則府使、判官、法曹各一人; 知州郡, 員吏品秩同; 諸縣, 令一人、尉一人; 小縣, 則置監務一人。 我朝盡革冗官, 雖大邑, 不過牧ㆍ府使、判官而已。 今又合幷小縣, 倂爲大邑, 而官員則只使一人治之, 恐非所以制事便民之術也。 故臣等之意, 常以合幷爲重難者, 以此也。 其中亦有不得不合幷者, 此則當於事定之後, 通融道里遠近, 民戶多少, 人情便否, 酌量彼此之勢, 爲永久之圖, 然後始得無弊而可行也。 不然, 而但以一時殘弊之故, 更不論他事, 草草合幷, 則民情旣有不平, 至於聽斷詞訟, 斂散糶糴, 出站支待等事, 節節皆有妨礙, 恐不可輕易施行。 至於陰竹, 則無極驛直路四十餘里, 而合幷於驪州, 則竹山、忠州之間, 道里懸遠, 形勢虛闊, 不可控扼。 假使他處合幷, 而以今日之勢言之, 陰竹決不可廢。 況方有修葺山城等事? 臣等之意, 仍置本縣, 主官料理爲便, 故敢啓。" 上曰: "陰竹事, 依啓。 但郡縣事, 眞所謂九羊而十牧。 人各有見, 不必苟同。"
- 【태백산사고본】 39책 6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31면
- 【분류】행정(行政) / 역사-고사(故事)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