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을 보존할 것·원왕을 풀 것·수령을 가릴 것 등에 관한 생원 유숙의 상소
생원(生員) 유숙(柳潚)이 상소하였다.
"생원 유숙은 주상 전하에게 상언합니다. 신은 태학생으로서 2백 년 동안 국가에서 길러 온 교화에 훈도되었는데, 주상께서 욕을 보고 계시는데도 목숨을 바치지 않고 적과 함께 한 하늘 아래 살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흉적을 제거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고 안으로는 충언을 드리거나 책략을 올리지 못하여 조금도 보조하는 일이 없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학궁은 쑥밭이 되고 유생은 영락되었기 때문에 비록 제생들과 회의하여 소를 올려 시정의 크고 급한 것을 진언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舟楫]가 고장났을 땐 박[瓢]으로도 건널 수 있고, 질병이 극심할 땐 하찮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있으며, 국가가 망할 때에는 한 마디 말로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니, 신 한 사람만으로 족하거늘 어느 겨를에 사방의 많은 선비들을 취합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심혈을 피력하여 우러러 성상을 번거롭게 합니다.
아, 오늘날의 형세는 급박합니다. 적이 문정(門庭)에 버티고 있건만 전수(戰守)할 방책이 없는가 하면, 백성들은 구렁텅이에 쓰러지고 부자간에 서로 잡아먹으려는 실정이어서 나라의 패망이 경각에 달렸는데, 신자(臣子)된 입장에서 어찌 입을 다물고 말이 없이 전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사람마다 심력을 다하고 의지를 분발해서 기모(奇謀)를 발휘하고 비계(秘計)를 획책하여 전하께서 적을 치는 데 만분의 일이라도 돕고자 하지 않을 자 없습니다. 그러나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고 책략에는 상하(上下)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둔전(屯田)과 염철(鹽鐵)을 중요시하나 신만은 그것을 염려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은 조총(鳥銃)과 창검(槍劍)을 우선으로 여기나 신만은 그것을 취하지 않습니다. 신이 말씀드리려는 것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것으로 오직 일의 급한 것과 책략의 제일인 것에 있을 뿐입니다. 이른바 급한 것과 제일이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민심을 보존하고, 둘째는 원왕(冤枉)을 풀어주고, 세째는 수령(守令)을 가리고, 네째는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는 일입니다. 민심이 보존되면 근본이 튼튼하고 나라가 평안한데 적이 어떻게 감히 업신여기겠습니까. 원왕이 씻어지면 원정(原情)대로 법을 정하매 죽어도 여한이 없으며, 수령을 가리면 백성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여 보장이 될 수 있으며, 상벌이 분명하면 공이 있고 죄가 있음에 따라 모두 권면하고 징계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생각을 간절히 하여 백성 보기를 환자처럼 하고 은혜를 널리 베풀어 백성을 어린애 보호하듯 하셔야 할 일입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그 누구인들 교화에 젖지 않으리오마는, 먼 지역의 백성들은 성상의 인자한 마음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고 오막살이 집에는 아직도 성상의 혜택이 미치지 않으므로 민심의 흩어짐이 날로 달로 더욱 심해 가니, 신은 그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번에 전하께서 토목 공사를 일으키시자 민심이 이반했고, 왕자가 전택(田澤)을 널리 점령하자 민심이 이반했고, 궁인(宮人)이 방납(防納)을 전담하고 시리(市利)를 독점하자 민심이 이반했고, 역적의 옥사가 연달아 일어나 무고한 사람이 죄를 모면할 수 없자 민심이 이반했고, 북민(北民)을 추쇄(推刷)할 때 그 해가 친족의 친족, 이웃의 이웃에 파급되자 민심이 이반하였으며, 가까이는 도하(都下)의 백성, 멀리는 팔도(八道)의 백성이 아우성치지 않는 자가 없어 이마를 찌푸리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이 우리를 이처럼 학대한다.’ 하니, 그들의 마음이 이반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러므로 문을 열어 적을 받아들이고 욕이 왕자에 미치게 하고 사나운 자를 도와 포악한 짓을 하여 그 해독이 외이(外夷)보다 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용만(龍灣)으로 떠나지 않으셨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신들은 모를 일입니다.
지금은 개나 쥐 같은 무리들이 작당하여 작게는 백명, 크게는 수백 명으로 없는 데가 없습니다. 경기와 황해도는 절반이 도적의 소굴이 되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전부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왜구(倭寇)의 걱정쯤은 다급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염려하는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448) 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서 장차 만연되어 도모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까 하는 일입니다. 만일 한두 흉도(兇徒)가 의외의 변을 꾸민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애통해 하는 교지(敎旨)를 자주 내리시어 백성과 함께 경시(更始)를 하고 흩어진 마음을 더욱 취합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유신(維新)의 교화(敎化)를 입게 하시며, 한 무제(漢武帝)가 윤대(輪對)에서 조서를 내린 것449) 처럼 하여 지난 날의 후회를 명시하고,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말한 것450) 과 같이 하여 앞으로 오는 경계를 알게 하소서. 또 행행(行幸)하실 때에는 병위(兵威)를 성하게 베풀고 시위(侍衛)하는 신하는 극히 씩씩하고 용맹이 있는 자를 골라서 뜻하지 않는 환난을 방비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들으니, 한명이라도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는 일을 성인은 하지 않는다 합니다. 원왕을 풀어주는 일은 참으로 성인이 베푸는 측은한 정치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최영경(崔永慶)을 무고로 인정하여 특별히 신원을 시켰으니, 사림(士林)에 있어서 누가 감격해 울지 않았겠습니까. 지하의 혼백은 은혜와 원망을 잊는다 해도 인간의 논의는 시비를 가리우기 어려운 것이라 이는 뭇 사람이 함께 분통해 하는 바입니다. 전번에 권간(權奸)이 국권을 잡자 은밀히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하여 역적을 빙자해서 무고한 사람을 죄로 얽었으니, 죽은 자가 최영경 한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서사(書辭)로 죄에 걸린 자도 있었고 혹은 유언(流言)으로 죄에 몰린 자도 있었는데, 그들이 다 역적의 무리였겠습니까. 대개 역적은 화심(禍心)을 품고 유명(儒名)을 가탁하므로 비록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진 자라도 혹 모를 수 있는데, 하물며 범연하게 겉으로만 사귀고 조정에서 서로 보고 한갓 그 얼굴만 알고 그 마음은 알지 못하는 자이겠습니까. 진실로 역모를 마음 속으로 아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형적을 감추고 밤에는 모이고 낮에는 흩어지며, 다닐 때는 남이 볼까 두려워하고 말할 때는 남이 들을까 무서워합니다. 그 모사가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을 기약할 수 없고 그 당이 패하고 안 패하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데, 어찌 성명을 무관한 문자상에 올려서 후일에 멸족될 계제를 만들수 있겠습니까. 그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인데 옥사를 다스릴 때에 옥석 구분(玉石俱焚)의 탄식이 없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상패(喪敗)가 어찌 그 원통함의 소치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대신에게 물어 대신이 ‘옳다.’ 하고 대간에게 물어 대간이 ‘옳다.’ 한 연후에 그 중에서 역당(逆黨)에 무관한 자를 골라서 일일이 밝혀 분석하여 역당은 역당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여겨서,초옥(楚獄)의 누설자(縲絏者)451) 로 하여금 연급(連及)의 화를 면하게 하고 오구(梧丘)의 왕사자(枉死者)452) 로 하여금 억울한 죽음의 원통함을 영원히 끊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들으니, 백성의 휴척(休戚)은 모두 수령에게 달려 있다 합니다. 아무리 자상하고 화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잘한다고 칭송받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불학 무식한 무부(武夫)이겠습니까. 요즘 전하께서 무부로써 수령을 삼아 팔도의 내군(內郡)을 모두 맡기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무부가 수령이 되면 사욕을 채울 뿐만 아니라 오로지 상전 섬기는 일만을 일삼아 이익을 탐해서 온갖 욕심을 충족시키니, 잔존한 생민이 그것을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군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달려갈 경우 간리(奸吏)들이 작폐하고, 적을 치는데 용감스럽다고 한다면 의리를 가지고 군사를 일으킨 자는 모두 유신(儒臣)으로서 이정암(李廷馣)·우성전(禹性傳)·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같은 이가 바로 이에 해당하고 무부는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문사(文士)로서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를 택하고 음관(蔭官)으로서 능력과 재간이 있는 자를 뽑아서 주현(州縣)을 맡기고, 내지의 무관 수령은 요충지로 나누어 보내어 조아(爪牙)의 구실을 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들으니, 백성들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것은 모두 상과 벌에 매여 있다 하는데, 그 경중·취사의 권한을 편리한 대로만 한다면 어떻게 나라의 다스림에 유용하겠습니까. 우선 한두 사람을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병(李覮)은 처자와 형제를 버리고 몸을 나라에 바쳐 종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으니, 비록 개자추(介子推)의 정성453) 이라 하더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데, 승진의 상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애석히 여기기를 ‘공훈과 지위가 같은 자는 웃 반열에 올려 주지 않음이 없는데 이병만 빠졌으니,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합니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卒)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 주첩(奏捷)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伏劍)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하기를 ‘군사 전체를 패몰시킨 경우도 은사(恩赦)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데, 신각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 이광(李洸)은 자신이 장수의 자리에 처하여 강병(强兵)을 거느리고서도 군부(君父)를 남보듯이 하고 국난에 달려가지 않았으니,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잠깐 감옥에 갇혔다가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니 형벌에 대한 실수가 큽니다. 이 사람을 죄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베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는 이병의 공로를 살피고 신각의 공훈을 생각하여 승급시키고 포증하시며, 또 이광의 죄를 가하여 일국(一國)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삼군(三軍)의 의기를 고무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아,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에 군국(軍國)의 일이 매우 많은데 신이 유독 이 네 가지를 말씀드린 것은, 인심의 거취에 천명이 따르고 은혜와 억울함을 베푸는 바에 재앙과 경사가 응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수령을 택한 뒤에야 백성이 안정된 처소를 얻게 되고 반드시 상벌이 분명한 뒤에야 사람들이 즐겨 쓰일 것이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와 책략의 으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58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411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註 448]진승(陳勝)과 오광(吳廣) : 진승과 오광은 중국 진(秦)나라 사람으로 이세(二世) 때 어양(漁陽)으로 수자리 살러 가다가 때마침 큰 비가 와서 길이 막힌 탓으로 도착 시기를 놓쳤다. 진나라 법은 시기를 놓치면 목을 베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은 "지금은 도망가도 죽고 거사를 도모해도 죽을 것이니, 이러나 저러나 죽을 바에야 거사하는 것이 옳다." 하고는 도위(都尉)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결국은 진나라에 패하고 말았으나 이들의 거사가 도화선이 되어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거병(擧兵)으로 진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진섭 세가(陳涉世家).
- [註 449]
한 무제(漢武帝)가 윤대(輪對)에서 조서를 내린 것 : 한 무제가 만년에 흉노(兇奴)에게 윤대의 땅을 빼앗기고 애통한 내용이 담긴 조서를 내려 과거의 잘못을 후회한 일이 있다. 《한서(漢書)》 서역전 찬(西域傳贊).- [註 450]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말한 것 :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반란을 일으켜 경사(京師)를 침범하자 당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피난갔다가 뒤에 이성(李晟) 등에 의해 경사가 수복되자 다시 환궁하게 되었다. 온갖 고초를 겪은 덕종은 봉천의 행궁(行宮)에서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을 때 전의 잘못을 한없이 후회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린 바 있다. 《당서(唐書)》 권7.- [註 451]
초옥(楚獄)의 누설자(縲絏者) : 초옥의 누설자란 한 명제(漢明帝) 때 있었던 초왕 영의 옥사(獄事) 때의 연루자를 말함. 초왕(楚王) 영(英)은 한 광무(漢光武)의 여섯째 아들로 초왕에 봉해졌는데, 소시에는 유협(遊俠)을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황로(黃老)·부도(浮屠)의 학을 즐기며 방사(方士)와 교유하였는데 뒤에 역적으로 몰려서 결국 자살하게 되었다. 그런데 억울한 연루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여러 해 동안 판결을 내지 못한 것을 한랑(寒郞)이란 사람이 가서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함. 《후한서(後漢書)》 권72.- [註 452]
오구(梧丘)의 왕사자(枉死者) : 죄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가리킴. 제 영공(齊靈公)이 사냥갔을 때 무죄한 다섯 장부(丈夫)를 죽여 그들의 머리를 잘라 묻었는데, 그뒤에 경공(景公)이 오구(梧丘)에서 사냥할 때 꿈에 다섯 장부가 나타나서 무죄함을 호소했다. 경공은 그곳을 파서 다섯 해골을 찾아내어 장사를 잘 지내주었다 한다. 《안자(晏子)》 잡하(雜下).- [註 453]
개자추(介子推)의 정성 : 개자추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진 문공(晉文公)이 망명해 있을 때 19년 동안을 정성껏 모셨다. 문공이 환국하여 임금이 된 후 신하들에게 상작(賞爵)을 주면서 개자추는 빠뜨리니, 그는 모친과 함께 면산(綿山)에 숨어버렸다. 그뒤에 문공이 초빙하였으나 나오지 않자 면산에 불을 질러 나오게 하였는데,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서 죽었다.○生員柳潚, 謹上言于主上殿下:
伏以臣(大)〔太〕 學生也, 沐浴二百年樂育之化, 而主辱不死, 與賊俱生, 外之不能除兇樹勳, 內之不能納忠獻策, 罔效涓埃尺寸之補, 臣之罪大矣。 第以黌序草萊, 章甫零落, 雖欲與諸生, 會議抗章, 以陳時政之大且急者, 末由也已。 然舟(揖)〔楫〕 之權, 一瓢可濟; 疾病之極, 寸藥可瘳; 國家之亡, 片言可救, 則臣之一人足矣。 奚暇待四方之多士哉? 敢瀝肝血, 仰瀆天聽。 嗚呼! 今日之勢急矣。 賊據門庭, 戰守無策, 民盡丘壑, 父子相食, 國之顚隮, 將在轉頭間, 則爲臣子者, 豈可含糊忍默, 以負殿下哉? 是以人人, 莫不竭其心力, 奮其忠憤, 發一奇謀, 畫一秘計, 以助殿下討賊之萬一。 然務有緩急, 策有上下, 屯田、鹽鐵, 是人之所重, 而臣獨不慮; 鳥銃、劍(勢)〔戟〕 , 是人之所先, 而臣獨不取。 臣之所言者, 其諸異乎人, 而惟在務之急、策之上也。 夫所謂急者上者何? 一曰, 保民心; 二曰, 伸冤枉; 三曰, 擇守令; 四曰, 明賞罰。 民心保, 則本固邦寧, 敵何敢侮; 冤枉伸, 則原情定法, 死無餘憾; 守令擇, 則治民練兵, 可以保障; 賞罰明, 則有功有罪, 必皆勸(徵)〔懲〕 。 此乃殿下, 念切如傷, 惠深若保。 凡在陶甄, 孰不浹洽? 然遐裔之氓, 或昧聖心, 蔀屋之下, 尙阻天澤, 民心之散, 日益深、月益甚, 臣不敢知, 厥故何其? 頃者殿下, 興土木而民心離; 王子廣占田澤而民心離; 宮人專(方)〔防〕 納權市利而民心離; 逆賊之獄連起, 無辜者, 亦不得脫而民心離; 推刷北民之際, 害及於族之族, 隣之隣而民心離。 邇而都下之民, 遠而八道之民, 罔不嗷嗷然, 蹙額而相告曰: ‘吾王之虐我也如是。’ 其心之離, 厥惟舊哉! 是以開門納賊, 辱及王子, 助桀爲虐, 毒甚外夷。 殿下若不早巡龍灣, 則臣等未卜厥終如何? 今則狗鼠輩, 嘯聚爲徒, 小則百, 大則數百, 無處無之。 京畿、黃海, 半歸萑蒲之藪; 忠淸、全羅, 摠入逋逃之淵。 噫! 倭寇之憂, 非所急也。 臣恐陳勝、吳廣, 復起於今日, 將至蔓〔延〕 難圖也。 如有一二兇徒, 搆意外之變, 則其孰能禦之哉? 臣願殿下, 屢下哀痛之旨, 與民更始, 益保渙散之心, 致民維新, 如漢 武帝 輪對之詔, 明示旣往之悔; 如唐 德宗 奉天之言, 使知方來之戒; 且於行幸之際, 盛陳兵威, 侍衛之臣, 極擇壯勇, 以備其不虞之患, 幸甚。 臣聞殺一不辜而得天下, 聖人不爲, 則伸冤枉, 固聖人惻隱之政也。 殿下, 旣以崔永慶爲無辜, 特加伸雪, 凡在士林, 孰不感泣? 吁! 地下之魂, 恩怨雖忘, 而人間之議, 是非難掩, 此輿情之所共憤痛者也。 頃者, 權奸專國, 陰圖異己, 憑藉逆賊, 羅織無辜, 死者不止永慶一人。 或有以書辭抵罪者, 或有以流言抵罪者, 此皆逆賊之黨乎? 蓋逆賊, 包藏禍心, 假托儒名, 雖至親至密者, 容或不知, 況泛然外交, 朝行間相見, 而徒知其面, 不知其心者乎? 苟有心知逆謀者, 必藏形匿跡, 夜聚、晝散, 其行也恐人之見, 其語也畏人之聞。 其謀之成不成, 未可期, 其黨之敗不敗, 未可保, 豈可煩姓名於不關文字上, 爲他日滅族之階乎? 其不與於逆謀, 章章明矣, 而按獄之際, 不無玉石俱焚之嘆, 安知今日之喪敗, 未必不此冤之所致也? 臣願殿下, 詢諸大臣, 而大臣曰: ‘可’; 問諸臺諫, 而臺諫曰: ‘然’ 然後, 擇其中不涉於逆黨者, 一一昭釋之, 以逆黨爲逆黨, 以士林爲士林, 使楚獄之縲絏者, 獲免連及之禍; 使梧丘之枉死者, 永絶沈首之冤, 幸甚。 臣聞之, 民之休戚, 皆由於守令。 雖以慈祥、愷悌之人, 猶有所不稱, 況不學、無術之武夫乎? 近日殿下, 以武夫爲守令, 八道內郡, 亦皆任之, 何哉? 武夫之爲守令也, 非徒肥己, 專事爲人, 以利啗之, 苟充衆慾, 孑遺生民, 其可支乎? 若以爲關於禦敵, 則領兵赴戰, 奸吏作弊, 爲勇於討賊, 則仗義興師者, 皆於儒臣, 若李廷馣、禹性傳、趙憲、高敬命、金千鎰, 是也, 而武夫則無聞焉。 臣願殿下, 擇文士之才望者, 簡蔭官之能幹者, 爲州爲縣, 而以內地武守令, 分遣要衝之地, 以爲爪牙之用, 幸甚。 臣聞之, 人之勸戒, 皆由於賞罰。 其輕重取舍之柄, 或有所便, 則其何以措一國之治哉? 姑擧一二人言之。 李覮捐妻子、棄兄弟, 以身許國, 終始扈駕, 雖介子推之誠, 無以過也, 而不蒙超陞之賞, 人皆惜之曰: ‘同功一體者, 無不揚于上列, 而覮獨不及, 如何如何? 申恪出萬死, 提孤軍大戰, 先士卒一當百, 直擣巢窟, 獻(醎)〔馘〕 八十, 而不沾奏捷之功, 反受伏劍之誅, 人皆冤痛曰: ‘全師覆沒者, 無不蒙恩赦, 而恪獨無辜死。’ 李洸, 則身居巨閫, 手握强兵, 越視君父, 不赴國難, 則罪罔貸也, 而暫繫囹圄, 還歸田里, 失刑大矣。 此而不罪, 他又何誅? 臣願殿下, 察李覮之勞, 念申恪之功, 超陞之褒贈之, 而又加李洸之罪, 整肅一國之紀律, 鼓動三軍之義氣, 幸甚。 嗚呼! 方與賊對壘之日, 軍國之務非不多, 而臣獨以四者爲言者, 特以人心之去就, 天命隨之; 恩冤之所施, 殃慶應焉。 守令必擇而後, 民獲其所; 賞罰必明而後, 人樂爲用。 此固非今日之務之急, 而策之上乎? 謹昧死以聞。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34책 58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411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註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