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가 왜적을 방비하는 일을 회계하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적진에 임하여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그 상황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천리의 밖에서 헤아리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만 거제(巨濟)의 수륙(水陸) 형세를 헤아려볼 때, 적병이 현재 영등(永登)·장문(場門) 등에 둔거(屯據)하고 있으면서 책루(柵壘)를 굳게 하고 해안에 임하여 수비를 하며 기계를 많이 설치해서 느긋한 자세로 지친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으니,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육군(陸軍)이 견내량(見乃梁)을 따라 건너려고 했다면, 적은 반드시 남쪽 해안에 복병을 설치하고 있다가 우리의 군사가 그 아래에 배를 대고 반쯤 내려 미처 진형(陣形)을 갖추지 못했을 때를 이용하여 적이 뒤에서 습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반드시 전체의 군대가 힘쓸 수 없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니, 이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여러 장수들이 안 될 것을 알고 진(陣)을 함께하여 중지하거나, 주사(舟師)와 같이 싣고 함께 진격하였기 때문에 비록 승첩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패배에는 이르지 않은 것이니, 이는 불행중 다행이었습니다. 대체로 거제도는, 북변(北邊)의 영등·장문에 현재 적의 방비가 삼엄하니 육군으로 선공(先攻)하기는 불가합니다. 다만 주사(舟師)로 바다를 왕래하면서 공격할 형세를 취하여 적병이 만일 그들의 배를 구원하려고 놀라 바다로 나오게 되면 그때 접전을 할 수가 있겠지만 지금은 적병이 우리 군대가 올 줄을 먼저 알고 굳게 수비하고 나오지 않으니 그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만일 육지로부터 공격을 하려면 견내량 등으로는 안 되고, 한산도(閑山島)를 경유해야 합니다. 사사(射士)중에서 길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뽑아서, 적진의 사면 숲에다 분산하여 매복시켜 출몰하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군사의 많고 적음을 모르게 하고, 밤에는 그들의 책막(柵幕)을 기습하기도 하고 낮에는 잠복하여 있다가 나무하는 왜병을 저격하기도 하면서 적이 오면 숨고 적이 가면 다시 모여 적으로 하여금 소요를 일으켜 불안스럽게 한다면 열흘이 못 되어서 그들의 기세가 위축될 것입니다. 이같이 한 뒤에 주사가 때때로 돛을 올리고 위용을 떨치면서 공격하여 초멸하려는 태도를 취하면, 만에 하나 도망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릇 병가(兵家)의 일이란 비교하자면 바둑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바둑에는 선수(先手)와 후수(後手)가 있는데, 소위 ‘처음에 털끝만큼 틀린 것이 뒤에는 천리나 어긋난다.’는 것으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의 이 거사는 먼저 기일(期日)을 정하고 또 통문(通文)을 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먼저 알고 예비를 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로 불가한 이유이고, 처음에 거사 기일을 27일로 정하면서 주사(舟師)의 정돈 여부를 살피지 않아 결국 여러 번 거사 기일을 물렸으니 둘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또 거제의 적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조금밖에 안 된다고 한 것을 다시 자세히 탐지해 보지도 않고 있다가 군사가 적군의 진영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적군의 무리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가 의구심을 가졌으며, 적선(賊船)을 이미 높은 곳에 끌어 올려 매놓은 것조차 모르는 등 염탐을 자세히 하지 못하였으므로 아군이 놀라 움직일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니 세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병법(兵法)에 수 많은 말이 있지만, 그 요체를 찾아보면 ‘공견(攻堅), 공하(攻瑕)’한 마디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견고한 곳을 따라 공격하게 되면 허술한 곳도 모두 견고하게 되고, 헛점이 있는 곳을 따라 공격하게 되면 허술한 곳도 모두 견고하게 되고, 헛점이 있는 곳을 따라 공격하면 견고한 곳도 모두 허술해지는 것으로서, 비유하자면 돌을 캘 적에 틈난 곳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돌을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바로 왜변이 일어난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일찍이 생각지 못한 것으로서, 다만 오합지졸(烏合之卒)로 아무 것도 모른 채 함부로 행동하면서, 전혀 병가(兵家)의 기정(奇正)368) 과 적진의 강약(强弱)이 있음을 몰랐으니 거사할 때마다 매번 불리한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비단 거제의 거사만을 지적해서 한 말이 아니라 여러 장수들의 용병(用兵)이 대개가 이렇다는 것을 일괄해서 논한 것으로 한 가지 일로 아울러 논함으로써 후일의 경계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사가 이미 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또 경상 감사 홍이상(洪履祥)이 의거한 원균(元均)의 첩보(牒報) 내용으로 보면, 공을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약세만 내보이고 업신여김을 당함이 너무 심하며, 육군과 수군을 겨우 어렵게 수합(收合)하여 한 가지 이익도 얻지 못하고 돌아오므로써,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동요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삼군(三軍)의 마음이 원수(元帥)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의당 원수 자신이 진정(鎭定)하고, 분부하고 약속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각기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 전처럼 진로를 차단하고 별도로 배치하여 후일을 도모하도록 해야 합니다. 도원수가 남원(南原)에 직접 오지 않아 원근의 군사들 마음에 의구심을 갖도록 해서도 안 되니, 이 또한 적절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급히 본진(本陣)으로 돌아가도록 하여 조금도 지체하지 말게 하고, 각 장수들의 접전에 대한 보고가 서로 다른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허위로 보고한 폐단도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급히 치계하도록 하소서. 거사한 뒤에 틈이 이미 생겼고, 소서비의 사신이 또 적진으로 돌아갔으니,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거제의 왜적이 필시 고성(固城) 등에서 노략질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웅천(熊川)이나 김해(金海)의 적도 반드시 동요할 것이니, 주사는 비록 한산도로 되돌아가더라도 별도로 경선(輕船)을 뽑아 해구(海口)에 복병을 설치하도록 하고, 의령(宜寧)의 육군도 나누어서 파수하여 십분 경계를 엄하게 하되, 잠시도 태만히 하여 일을 그르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육군의 수효를 상고(相考)해 보면, 별초 난군(別抄闌軍)이 1천 수 백여 명, 군안(軍案)에 들어 있는 다른 군인이 8백여 명, 선거이(宣居易)가 거느린 포·살수(砲殺手)·아병(牙兵)이 1백 40여 명, 이일(李鎰)이 거느린 군사가 2백 10여 명등으로 모두 합하여 계산해도 2천 수 백 명에 불과합니다. 들리는 바로는 ‘양호(兩湖)와 각 도의 새로 출신(出身)한 무사들이 식량을 대신 내거나 또는 말을 바친다.’고 하며 ‘혹은 사사로이 장수에게 청탁하여 집에 있는 자가 매우 많아 진중에 남아 있는 군사는 모두 용잡(庸雜)한 민병(民兵)으로서 쓸모없는 자들이다.’고 하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도원수가 십분 검칙(檢勅)해서 군율을 엄숙하게 한 뒤에야 일을 도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각 진영의 군사를 모군(某軍)출신 모도인(某道人) 몇 명, 민병(民兵)이 몇 명, 포·살수가 몇 명, 군관(軍官)이 몇 명이라는 식으로 시급히 상고하여 치계하도록 하고, 여러 읍(邑)중에서도 제일 많이 보내지 않은 곳이 어디며, 몇 명이나 되는지 이름을 적어 계문(啓聞)할 것을 주야(晝夜)를 가리지 말고 도원수와 체찰사에게 행이(行移)하고, 한편으로 모든 뒷 일에 대한 적절한 방책을 헤아려 처치할 것을 자세히 갖추어 별도로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계문(啓聞)하도록 아울러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 【국편영인본】 33책 56권 31장 B면【태백산사고본】 22책 372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註 368]기정(奇正) : 권도와 정도.
○備邊司回啓曰: "臨陣節制機會, 變於斯須, 千里之外, 固難遙度。 但以巨濟水、陸形勢料之, 則賊兵方屯據永登、場門等處, 堅築柵壘, 臨岸拒守, 多設機械, 以逸待勞, 攻之未易。 且陸軍, 從見乃梁欲渡, 則賊必於南岸設伏, 若我軍泊舟其下, 乘其半下, 未及成陣之際, 賊從後蹙之, 則必有全軍不振之憂, 此甚危道。 惟幸諸將, 知其不可同陣, 乃止, 與舟師同載共進, 故雖不得勝捷, 而亦不至於敗衂, 此則猶以爲不幸之幸也。 大抵巨濟一島, 北邊永登、場門, 則賊方(巖)〔嚴〕 備, 不可以陸兵先攻。 只當以舟師, 往來洋中, 以作形勢, 賊若欲救其船, 驚動出海, 則始可轉戰。 今賊先知我師之來, 而堅守不出, 其勢無如之何也。 若欲從陸攻之, 則不可由見乃梁等處, 且當由閑山島。 精抄射士詳知道路之人, 分散設伏於賊營四面林藪叢薄之中, 隱見出沒, 使賊不測多少, 或夜襲攀其柵幕, 或潛兵抄擊樵採之倭, 賊來則無見, 賊去則還聚, 使賊騷然不安, 則不過旬日, 而其勢自縮矣。 如此然後, 從舟師時時揚帆張威, 若將攻勦之狀, 則萬一有遁去之理。 凡兵家之事, 比之則有如着碁。 碁有先着之手, 有後着之手, 所謂差毫釐, 而謬千里, 不可以不察也。 今此一擧, 旣爲先定期日, 且爲通文, 使賊先知而預爲之備, 其不可者一也。 初定師期於二十七日, 不問舟師整齊與否, 屢退師期, 其不可者二也。 巨濟之賊, 或云留者甚少, 而不復再爲詳探, 及師到賊營, 始聞賊衆遍滿, 而諸軍爲之疑懼, 又不知賊船, 已爲掛置於高處, 其體探不審, 而驚動無疑, 其不可者三也。 兵法千言萬語, 求其要歸, 不過於攻堅、攻瑕一語。 故從堅處而攻之, 則瑕者皆堅; 從瑕處而攻之, 則堅者皆瑕。 譬如伐石, 苟不乘其罅隙, 石豈動乎? 此乃自變初以來, 諸將之所未嘗經意者, 只以烏合之卒, 冥行妄動, 全不知兵家有奇正, 敵陣有强弱, 無怪乎屢擧而屢不利也。 今此云云, 非但指巨濟一擧也。 統論諸將用兵, 大槪如此, 故因一事而竝論之, 以爲後戒矣。 舟師旣爲無功, 且以慶尙監司洪履祥所據元均牒報之辭觀之, 則非但無功, 其示弱取侮亦甚, 而陸軍、水軍, 艱難收合, 未得一利而還, 軍心無不動搖。 當此之際, 三軍心膽, 在元帥一身, 所當身自鎭定, 分付約束, 使諸將各還其所, 仍舊把截, 別爲布置, 以爲後圖可也。 都元帥不可身到南原, 以疑遠近之心, 此亦恐非事宜也。 急速還陣, 毋或少緩, 而各將所報接戰形止, 多有異同, 不無報不以實之弊, 更爲詳覈, 急急馳啓, 而擧事之後, 釁隙已啓, 而小西飛之使, 又往賊陣, 前頭之事, 極爲可慮。 巨濟之賊, 必搶掠於固城等處; 熊川、金海之賊, 亦必動擾。 舟師則雖還閑山島, 而別抄輕船, 設伏海口; 宜寧陸軍, 亦須分頭把守, 十分戒嚴, 不許時刻怠慢誤事焉。 相考陸軍之數, 則別抄闌軍一千數百餘名; 軍案所率他軍八百餘名; 宣居易所率軍、砲、殺手ㆍ牙兵一百四十餘名; 李鎰所率軍二百十餘名, 合而計之, 不過二千數百名。 傳聞兩湖及各道新出身武士等, 或稱代糧, 或稱納馬, 或私請於將帥, 出來在家者甚多, 而陣中留軍, 則皆是庸雜民兵之無用者云, 不勝寒心。 如此等事, 都元帥所當十分撿勑, 使軍律整肅, 然後可以有爲。 各營軍士, 某軍出身、某道人幾名, 民兵幾名, 砲、殺手幾名, 軍官幾名之類, 火迫相考馳啓, 而列邑中尤甚未起送者幾人乎, 亦爲擧名啓聞事, 不分晝夜, 行移于都元帥、體察使處, 而凡干善後事宜, 料理處置, 一邊詳具, 別遣從事官啓聞事, 竝知會何如?" 啓依允。
- 【국편영인본】 33책 56권 31장 B면【태백산사고본】 22책 372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