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정현룡이 올린 육진 오랑캐의 반란에 대한 치계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이 치계(馳啓)하였다.
"영건 보(永建堡) 휴악(鵂嶽) 부락(部落)에 이거(移居)한 반추(叛酋) 이라대(伊羅大)의 심복인 거추(巨酋) 역수(易水)가, 그들이 사는 부락의 북쪽에 석봉(石峯)이 우뚝 솟아 높이가 백장(百丈)쯤 되고 삼면(三面)은 깎은 듯하여 일면(一面)만 겨우 발을 붙일 만한 곳에다 석성(石城)을 높이 쌓아서 적(賊)의 소굴을 만들었는데 오랑캐 중에 가장 강하여, 홀라온(忽刺溫)·돗골(都叱洞)·니사은(尼舍隱) 등과 같은 곳의 우지개(亐知介) 등이 비록 백 배의 군사를 동원하여 포위하고서 여러 날을 공격하여도 함락하지 못하고 항상 패퇴(敗退)를 당하기 때문에 이 소굴을 거점으로 한 이후로는 더욱 흉모(兇謀)를 부려 스스로 웅장(雄長)이라고 하면서 다시 귀화(歸化)하지 않은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물 위아래의 생·숙여진(生熟女眞)이 두려워하여 휩쓸리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물 위는 거괴(巨魁) 이탕개(尼湯介)와 율보리(栗甫里) 등이 전후 주사(誅死)되어서 고립되어 후원하는 자가 없어 우리 변경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였는데, 임진(壬辰)의 변란의 틈을 엿보아 해를 끼치려는 계책을 하였습니다. 각진(各鎭)의 병력이 그때만 해도 아직은 당당하였기 때문에 감히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다가, 지난해 기근과 전염병을 치른 뒤에 반적(叛賊)의 잔당이 들어와 난동을 부리자 역수(易水)가 갑자기 비적(匪賊)의 마음이 생겨서 이라대(伊羅大)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여 원근의 여러 종족을 불러모으고 홀라온(忽刺溫)까지도 연결하여, 동관(潼關)을 수호(守護)하는 농민을 연속하여 약탈하고 영건보(永健堡)와 미전진(美錢鎭)의 성을 계속하여 포위하니, 각 지역의 오랑캐 추장이 모두 덩달아 준동하였습니다. 진·보(鎭堡)의 수장(守將)이 모두 중과부적(衆寡不敵)이므로 백성들이 마음놓고 경작을 하지 못해 강 근처의 민전(民田)이 태반은 묵었고, 결실한 곡식도 거두어 들이지 못한 것이 많아 백성에게 끼친 재앙이 전후 말할 수 없이 크며, 배반한 변방의 추장들이 이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변방의 백성에게 공갈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건 보가 포위된 뒤에 책략을 세우고, 포획할 뜻을 겸 순찰사(兼巡察使) 이희득(李希得)에게 이미 통문(通文)하고 그 사실을 대강 치계하였으나, 병마(兵馬)와 성지(城池)가 번종(藩種) 중에서는 가장 강하고 험하기 때문에 속히 주토(誅討)를 하지 못하였는데, 경원(慶源) 지경의 거추(巨酋)와 다호리(多好里) 등의 부락을 탕멸(蕩滅)한 뒤로 병사들의 위엄이 약간 진작되어 사기가 백배나 올랐습니다. 은밀히 여러 장수에게 분부하여 각자 거느린 군사 도합 1천 3백 25명과 항왜(降倭)359) 25명을 모두 종성부(鍾城府)의 동건(童巾) 덕하동(德下洞)에 모이도록 하여 병마를 쉬게 한 뒤, 여러 장수와 약속하여 병사들은 하무[枚]를 물리고 말은 입을 얽어, 길을 나누어 진격해서 역수(易水)의 상·중·하의 부락을 일시에 포위하였습니다. 역수는 스스로 범한 죄를 알고서 여자와 노약자는 미리 석성(石城)에 옮겨 들어가게 하였고, 장정 오랑캐들이 소굴에 있으면서 변(變)을 기다리고 있다가 군마(軍馬)의 소리를 듣고 피리를 불어 무리를 모아 일시에 입성(入城)하여 굳게 닫아 걸고 수비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아군(我軍)은 한편으로는 불을 지르면서 굴을 파고, 한편으로는 항왜(降倭)를 시켜 성 아래에 들어가도록 독려한 다음 아군이 뒤따랐습니다. 역수는 오랑캐 말로 크게 부르짖기를 ‘홀자온에 청병(請兵)을 한 지 이미 5일이 되었으니 너희와의 혈전(血戰)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구경이나 하겠다.’고 하였는데, 부르짖어 떠들어대는 말들이 심한 욕지거리였습니다.
그들은 문 양편에 기를 세우고 화살과 돌을 쏘고 던져대어 누구도 감히 접근할 수가 없었는데, 항왜 등은 화살에 맞거나 돌에 맞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위장(衛將)과 계 원장(繼援將) 등이 또 아군 중에 건장한 자를 거느리고 독려해서 성(城)을 뚫도록 하였는데 성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하여 역시 성을 헐지 못하고 퇴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성 안에서는 적의 무리가 피리를 불고 북을 울리면서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군정(軍情)이 해이된 듯하였습니다. 여러 장수가 일시에 칼을 빼어들고 독전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 자 한 명을 목베어 군중(軍中)에 돌리니, 아군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개미처럼 달라붙어 진격하여 다투어 성의 돌을 뽑아내 한 식경(食頃)만에 깨뜨렸습니다. 사졸(士卒)중에 재빠른 자들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니, 오랑캐들은 성벽 남쪽까지 밀려가 추락한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성 가운데 굴에는 쌓인 시체가 한 길을 넘었습니다. 세 부락의 오랑캐를 일시에 섬멸하여 한 놈도 남은 자가 없고, 아군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이 2백 66명의 수급을 베어 전군이 개선하였습니다. 지나는 부락마다 목을 움츠리고 바라보는 자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으며, 승리의 소리가 미치는 곳이면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수치를 크게 씻고 아울러 변방 백성의 원한을 모두 풀었으니, 이번 거사의 승첩은 모두가 묘산(廟算)360) 에서 나온 것입니다. 북비(北鄙)의 안정이 이로부터 시작된다면 풍패(豊沛) 옛 고을의361) 왕령(王靈)이 진작됨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니 변방의 백성의 다행함이 한이 없습니다.
강변(江邊)의 부락의 추장 투정내(投丁乃) 등도 적을 이끌고 침범해 들어온 죄가 있기 때문에 그날 군사 일부를 나누어 보내어 골격장(鶻擊將) 정시룡(鄭時龍)을 시켜 토벌하도록 하여 새책(寨柵)을 부수고 움막들을 불질러버린 뒤 60명의 수급을 베어서 전군이 개선하였습니다. 항왜 등도 모두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술을 먹이고 위유(慰諭)하였으며 노획한 소와 말을 아울러 모두 상으로 주었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6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註 359]항왜(降倭) : 항복해 온 왜병.
- [註 360]
묘산(廟算) : 조정의 계략.- [註 361]
풍패(豊沛) 옛 고을의 : 풍패는 한 고조(漢高祖)가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으로서, 제왕의 고향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함경도가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한 말임.○咸鏡北道兵馬節度使鄭見龍馳啓曰: "永建堡 鵂巖部落, 移居叛酋伊羅大腹心巨酋易水, 於其所居部落之北, 石峯斗起, 高可百丈, 三面如削, 一面僅得接足之地, 高築石城, 爲賊淵藪, 虜中最强, 如忽刺溫、都叱洞、尼舍隱等處亏知介等, 雖以百倍之兵, 攻圍累日而不能陷入, 每見敗退, 故據有此窟以來, 益肆兇謀, 自爲雄長, 不復歸化者, 積有年紀。 水上下生、熟女眞, 莫不畏威承風, 而水上巨魁尼湯介、粟甫里等, 前後誅死, 孤立無援, 不能肆於我境, 而壬辰之變, 乘時睥睨, 擬逞含沙之計。 各鎭兵力, 時尙堂堂, 不敢憑陵犯入, 自上年飢饉、疾疫之後, 叛賊餘孽, 投入煽亂, 易水遽生匪茹之心, 與伊羅大, 中外締結, 嘯聚遠近諸種, 至於接連忽刺溫之賊, 潼關守護農民, 連續搶掠, 永建、美錢相繼圍城, 各境胡酋, 無不相隨而動。 鎭保守將, 皆以衆寡不敵, 未能放意耕穫, 近江民田, 太半陳荒, 而旣熟之穀, 亦多有未收入者, 其爲流毒殃民, 前後罔有紀極, 而藩酋之反側者, 咸擧此孽之名, 恐喝邊民。 及永建圍城之後, 設機措捕之意, 兼巡察使李希得處, 已爲通文, 大槪馳啓矣, 而兵馬之强, 城池之險, 最於藩種, 故未能亟加誅討。 慶源境巨酋多好里等部落蕩滅之後, 兵威稍振, 士氣百倍, 密爲分付諸將, 所率軍合一千三百二十五名及降倭二十五名, 俱會于鍾城府境童巾㯖下洞, 休兵秣馬, 約束諸將, 人含枚、馬勒口, 分道以進, 易水上中下三部落, 一時圍抱, 則易水自知罪犯, 女胡與老弱, 則預爲移入石城, 壯胡據穴待變。 及聞軍馬之聲, 令角聚衆, 一時入城, 堅壁拒守, 遲明, 我軍等一邊衝火窟穴, 一邊使降倭, 督入城下, 我軍隨之。 易水以胡語大唱曰: ‘請兵於忽刺溫, 今旣五日。 任汝血戰, 吾當寓目。’ 凡所唱說, 極口罵辱。 竪旗於兩門, 發矢投石, 莫敢誰何, 降倭等, 或逢箭、或逢石, 不得接足而退。 衛將及繼援將等, 又領我軍之驍健者, 督令穴城, 則城上矢石如雨, 又不能破城而退。 城中衆賊, 吹角鳴皷, 彈釰歌呼, 軍情似懈。 諸將一時拔釰督戰, 斬一不用命者, 以徇軍中, 我軍冒戴矢石, 蟻付以進, 爭拔城石, 食頃破之。 士卒之趫捷者, 奮釰突入, 賊胡等推至城南, 墜落者不知其數, 城中窟穴, 積尸丈許。 三部所據之醜, 一時殲盡, 無遺噍類, 我軍無一名致死, 斬級二百六十六。 全師凱還。 所經部落, 鱉引面觀望者, 咸皆吐舌, 兵聲所及, 無不振懾, 大雪國恥, 洩盡邊人之憤, 此擧克捷, 無非廟算。 北鄙之寧靖, 若自此而始, 則豐沛舊鄕, 再覩王靈之振, 塞民之幸, 極矣。 江邊部落酋長投亇乃等, 亦有引賊犯入之罪, 故其日分送一枝兵, 令鶻擊將鄭時龍討之, 破毁寨柵, 燒蕩室廬, 斬馘六十, 亦爲全師而還。 降倭等, 亦皆極力, 故饋酒慰諭, 所得牛馬, 竝皆賞給矣。"
-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6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註 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