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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24일 기유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가 왜적을 소탕한 일을 치계하다

함경북도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치계하였다.

"전년 12월에 신이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고 금년 정월 13일에 길주(吉州)로 돌아왔습니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몸소 군중(軍中)에 와서 말하기를 ‘단천에 머무는 적이 제멋대로 횡행한다.’ 하기에 군사를 나누어 토벌하려고 정예한 기병 2백 명을 4대로 나누어, 1대장은 훈련 정(訓鍊正) 구황(具滉), 2대장은 훈련 첨정(訓鍊僉正) 박은주(朴銀柱), 3대장은 훈련 판관(川鍊判官) 정원침(鄭元忱), 4대장은 훈련 판관 고경민(高敬民)이 각기 50명 씩을 거느리고 이달 20일에 산길로 단천에 도착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4대의 군사를 성밖 20리쯤 되는 지점에 숨기고 단천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성밖 4리 가량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여 도전케 하니 성안에 머물던 적들은 여러 차례 승리한 것을 믿고 아무 거리낌없이 2백여 명이 일시에 성을 나와 곧바로 진격해왔습니다. 단천 군사들이 패하는 체하면서 되돌아 달아날 즈음 피로한 말을 탄 두 병졸이 적에게 살해되자 적은 더욱 승승 장구, 곧바로 잠복한 지점까지 이르렀습니다. 4대의 복병들이 일시에 내달아 전면을 막기도 하고 중간을 가르기도 하고, 혹은 후방을 끊기도 하면서 화살을 비오듯 퍼붓자 왜적은 갑자기 튀어 나온 기병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총통을 마구 쏘아 대는데 모두가 헛방으로 맞지 않으니 도망가기에 겨를이 없어 감히 우리에게 덤비지 못했습니다. 추격하여 성밑까지 이르자 거의 사살되고 겨우 30여 명이 남았는데 그것도 태반은 화살에 맞아 입성했습니다. 대개 죽인 적의 수효는 적어도 백여 명은 되며, 싸우면서 간 거리는 20여 리나 됩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46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咸鏡北道評事鄭文孚馳啓曰: "前年十二月, 臣北行六鎭, 今年正月十三日, 回還吉州端川郡守姜燦, 親到軍中云: ‘端川留賊, 恣意橫行。’ 欲分軍致討。 卽抄精騎二百分四隊, 一隊將訓鍊正具滉, 二隊將訓鍊僉正朴銀柱, 三隊將訓鍊判官鄭元忱, 四隊將訓鍊判官高敬民, 各率五十名, 本月二十日, 由山路, 二十二日到端川。 翌朝, 四隊藏兵於城外二十里許, 使端川軍三十名, 進次城外五里許挑戰, 城中留賊, 狃於屢勝, 略不顧忌, 二百餘名, 一時出城直進。 端軍佯敗還走之際, 疲馬二卒, 爲賊所殺, 賊尤乘勝遠追, 直至伏盧。 四隊伏兵, 一時突出, 或遮其前, 或截其腰, 或斷其後, 射矢如雨, 而賊猝遇突騎, 倉黃失措, 多放銃筒, 皆爲虛放不中, 奔走無暇, 莫敢相抗。 追至城底, 幾盡射斬, 僅餘三十餘名, 太半中箭入城。 大槪殺賊之數, 小不下百餘名, 轉戰二十餘里云云。"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46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