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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실록 2권, 인종 1년 7월 1일 신유 1번째기사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상이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훙서하다

묘시(卯時)에 상(上)이 청연루(淸讌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자질이 순미(純美)하여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言動)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는 정사(政事)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批答)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외척(外戚)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宮闈)가 엄숙하였다. 중종(中宗)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연 드시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이 거의 20여 일이었고 대고(大故)를 만나게 되어 음료(飮料)를 마시지 않은 것이 5일이었으니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예도에 지나쳐서 지극히 쇠약하여 거의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졸곡(卒哭)이 되어 조정(朝廷)이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청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실은 실행하지 않았다.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서는 중종이 평일에 거처하던 곳을 보고 가리키며 ‘여기는 앉으신 곳이고 여기는 기대신 곳이다.’ 하고 종일 울며 슬피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문(闕門)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펴하는 것이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78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25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辛酉朔/卯時, 上薨于淸讌樓下小寢。

【史臣曰: "上資質純美, 沈靜厚重, 學問純正, 孝友天至。 自在東宮時, 常終日端坐, 言動有時, 人莫測其涯涘。 及卽位以後, 政事之間, 處決報答, 無不合理, 有時以御筆, 批答疏箚, 辭義俱盡, 見者莫不歎服。 不私外戚, 不近侍御, 宮闈肅然。 當中宗不豫, 不脫冠帶, 晝夜侍側, (見)〔親〕 自湯藥, 藥必先嘗, 全廢御膳。 如是者幾二十餘日, 及遭大故, 不飮水漿者五日, 哀毁過禮, 羸瘁之極, 幾不自勝。 及卒哭, 朝廷請從權制, 牢執不許, 至大臣率百官以請, 始許而實否也。 自昌德宮移御于景福宮, 見中宗平日御處, 指點曰: "此坐處, 此憑處。" 終日涕泣, 哀慕不已。 疾革之夜, 都人相聚, 終夜不寐, 有自闕門來者, 輒問上證若何。 昇遐之日, 道路莫不哭泣悲哀, 如喪其父母。"】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78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25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