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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26권, 중종 11년 10월 21일 기사 1번째기사 1516년 명 정덕(正德) 11년

후손 없는 제후를 제사하는 것, 사대부의 후손 세우는 것, 소격서 혁파 등에 관해 논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동지사 남곤이 글에 임하여 아뢰기를,

"이른바 태려(泰厲)는 옛적의 제왕(帝王)으로 후손이 없는 사람을 제사하여 주고, 공려(公厲)는 옛적 제후로 후손이 없는 사람을 제사하여 주고, 족려(族厲)는 옛적 대부로서 후손이 없는 사람을 제사해 준 것인데, 이는 옛날 제왕의 인정(仁政) 중에 큰일입니다. 이 대문 주석에, 《좌전(左傳)》의 ‘돌아갈 데가 있도록 배려하여 주매 여귀(厲鬼)782) 를 면하게 된 것이다.’ 한 말을 인용하여 해설하기를 ‘돌아갈 데가 없어 혹 사람에게 해가 될까 싶기 때문에 제사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범 원통하고 울분함이 있어 제대로 죽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어찌 원기(冤氣)의 울적함이 맺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여제(厲祭)783) 지내는 것이 사전(祀典)에 있는데도 전연 제사지내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모진 바람과 괴이한 비나 모든 괴기(乖氣)가 이 때문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사람과 귀신이 뒤숭숭해질 우한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민간에 지금도 요괴(妖怪)스러운 일이 많다고 합니다. 대저 왕자(王者)의 덕이 끊어진 대를 이어줌보다 더 큰 것이 없는 법인데, 지금 후손없는 자가 반드시 많이 있을 것이니 원통한 귀신이 어찌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위에서 이 점을 살피시어서 의탁할 데가 있도록 하소서."

하고, 참찬관 신상(申鏛)이 아뢰기를,

"남곤이 아뢴바, 귀신은 의탁할 데가 있은 후에라야 여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큰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대범, 멸망하는 나라를 일으켜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제왕의 후덕으로 이보다 더할 것이 없는 법인데, 우리 나라는 비록 대부(大夫)가 후손이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당을 세우지 않고 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니 큰 잘못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는 왕자(王子)가 죽으면 나이 비록 아무리 어리더라도 모두 후손을 세우도록 했었고, 방번(芳蕃)·방석(芳碩)은 죄를 얻어 죽었지만 또한 모두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제사지내니 이는 후덕한 일입니다. 대저 조종들은 모두 인후(仁厚)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지금 세속은 비록 내부의 반열(班列)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딸이 있으면 후손을 세우려 하지 않음은 전택(田宅)과 노비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까 두려워해서이니, 대부로서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경우 신주를 만들고 제사 받들 사람을 세우는 법을 위에서 마땅히 엄하게 세워 거행하도록 하소서. 또한 이보다도 큰 일에 대해서 아랫사람들이 아뢰고 싶으면서도 감히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짐작하여 하소서." 【이 말도 남곤의 뜻과 같은 일이다.】

하고, 영사 신용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제사를 예문대로 지내지 않는 것을 신이 전일에도 아뢰었었습니다. 적자(嫡子)가 있으면 지손이 제사를 받들지 못함은 예인데, 지금 풍속이 자기 어버이 기일(忌日)에 신주는 버려두고 지방(紙榜)을 만들어 각 집에 돌려가며 제사합니다. 이런 풍습은 너무나 야비한데도 예문대로 하지 않으니, 마땅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금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헌부(憲府)의 공사를 보건대, 정수(鄭洙)의 아내가 정장(呈狀)하자, 예조가 이미 후손을 세우도록 한 것을 헌부가 며느리가 있으므로 후손을 세울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매, 용개가 아뢰기를,

"정수가 후손이 없이 죽었는데 제사할 사람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의 후처(後妻)가 후손을 세우려고 예조에 고장(告狀)하였기 때문에 신이 소원에 따라 후손을 세우도록 한 것인데, 헌부는 총부(冢婦)784) 가 아직 있으므로 후처가 후손을 세울 수 없다 하여 신을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뜻에는, 비록 정형(鄭泂) 【형은 곧 수의 아들이다.】 의 아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아들이 없으므로 정수의 후처가 어찌 후손을 세우지 못하겠는가 여기오니 이 일도 역시 널리 의논함이 어떠하리까?"

하고, 장령 공서린(孔瑞麟)이 아뢰기를,

"사헌부 안의 의논이, 비록 정수의 아들 형(泂)이 죽었더라도 그의 아내가 아직도 있어 그가 총부이니, 이 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더라도 의 아내가 후손을 세워야 되고, 의 후처로서는 총부가 마땅히 후손을 세워야 하는 법인데, 의 아내가 후손을 세우지 않으니 불가하다 하여 관에 고함은 가하지만, 스스로 후손을 세움은 진실로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일 딸이 있으면 후손을 세우지 않음이 과연 신상(申鏛)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정수의 아들 도 후손이 없이 죽었으니, 비록 총부가 있기는 하지만 의 아내가 어찌 후손을 세우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부가 만일 동성(同姓)으로 후손을 세운다면, 정수의 제사를 자신들이 지내게 되니 그다지 서로 틀릴 것이 없겠다. 그러나 총부는 곧 딸이나 다름이 없는데 헌부가 공사(公事)를 함이 또한 이러하니, 이 다음에 딸 둔 사람들이 모두 후손을 세우지 않을까 싶다."

하매, 서린이 아뢰기를,

"예문을 무너뜨리려서는 안 되는데 가산과 전민(田民)785) 을 위해 후손을 세우지 않음은 크게 불가하고, 의 후처가 스스로 후손을 세움도 마땅치 않습니다. 또한 소격서(昭格署)786)마니산참(摩尼山塹) 초제(醮祭)787) 는 부득이해서 하는 것인지, 신은 알 수 없으니 이런 제사들은 마땅히 혁파해야 하지 않으리까?"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소격서는 과연 하늘을 섬기는 일과는 상관이 없고, 단지 성신(星辰)과 노자(老子)에게만 제사하는데 노자에게 제사함은 더욱 우스운 일입니다. 기도(祈禱)한 효험은 볼 수도 없이, 외방(外方)에서 상납하는 물건만 매우 많아 폐단이 큽니다. 대간이 전에도 논계하였지만 윤허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조종조에서 하신 일이지만마니산 초제 같은 것은 도리에 어긋남이 막심하니 마땅히 통쾌하게 결단하여 끊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전(祀典)은 조종 때에 이미 참작하여, 더러는 그대로 두고 더러는 없앴으니,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대간이 이자건(李自健)·황윤헌(黃允獻)·이균(李均)을 체직할 것과 김양필(金良弼)의 개차를 청하고, 조관(朝官) 중 쓸모없는 사람을 도태하기를 청하니, 용개가 아뢰기를,

"도태는 용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감역관(監役官) 및 가랑관(假郞官) 등의 관원이 많으면서도 실관(實官)에게 관사(官事)를 맡기니, 이런 관원들을 모두 도태하도록 한다면 벼슬길이 맑아질 것입니다."

하고, 헌납 문관(文瓘)이 아뢰기를,

"가낭관이 차출(差出)되면 즉시 군직(軍職)788) 을 부여하는데, 체직된 뒤에도 그대로 둔 것이 또한 많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22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풍속-예속(禮俗) / 과학-천기(天氣) /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사상-도교(道敎)

  • [註 782]
    여귀(厲鬼) : 제사 못받는 귀신.
  • [註 783]
    여제(厲祭) : 제사 못받는 귀신을 위한 제사.
  • [註 784]
    총부(冢婦) : 정실 맏아들의 아내.
  • [註 785]
    전민(田民) : 전토와 노비.
  • [註 786]
    소격서(昭格署) : 도교(道敎)의 일월 성신(日月星辰)을 구상화한 상청(上淸)·태청(太聽)·옥청(玉淸) 등의 제사 일을 맡아보던 관청. 삼청전(三淸殿)에는 옥황 상제·태상 노군(太上老君)·보화 천존(普化天尊) 등 남자상을 안치하고, 태일전(太一殿)에는 칠성 제수(七星諸宿)를 안치했는데 모두 여자상이고, 여러 제단에는 사해 용왕(四海龍王)·명부 시왕(冥府十王) 등을 제사한다.
  • [註 787]
    마니산참(摩尼山塹) 초제(醮祭) : 강화도 마니산 정상의 제단에서 성신(星辰)에 지내는 제사.
  • [註 788]
    군직(軍職) : 오위(五衛)에 속한 상호군·대호군·호군·부호군·사직(司直)·부사직·사과(司果)·부사과·사정(司正)·부사정·사맹(司猛)·부사맹·사용(司勇)·부사용 등 서반(西班) 벼슬의 체아직(遞兒職).

○己巳/御朝講。 同知事南袞臨文曰: "所謂泰厲, 古帝王之無後者, 祀之; 公厲, 古諸侯之無後者, 祀之; 族厲, 古大夫之無後者, 祀之。 此, 先王仁政之大者也。 此註引《左傳》云: ‘思有所歸, 乃不爲厲。’ 釋之曰: ‘以其無所歸, 或爲人害, 故祀之。’ 夫有冤枉, 不得其死者, 豈無冤氣之鬱結乎? 我國厲祭, 亦在祀典, 而專不用意以祀, 盲風怪雨, 凡有乖氣, 安知不由於此? 人神雜糅之患, 終必有之。 臣聞, 民間今亦多有妖怪。 大抵王者之德, 莫大於繼絶, 而今之無後者, 必多有之, 冤鬼安保其必無耶? 自上致察於此, 使之有依。" 參贊官申瑺曰: "南袞所啓 ‘鬼有所依然後, 乃不爲厲’ 之言, 大爲關係。 夫興滅國、繼絶世, 帝王之厚德, 無踰於此。 我國雖大夫之無後者, 亦不立祀, 使女子爲之祭, 大爲非矣。 其在祖宗朝, 王子之死, 年雖甚幼, 皆令立後, 如芳蕃芳碩, 得罪而死, 亦皆立廟, 至今祀之, 此厚德也。 大抵祖宗, 皆以仁厚治國。 今世俗, 雖在大夫之列者, 若有女子, 則不肯立後者, 恐其田宅、奴婢歸于他人也。 大夫之無後者, 爲神主, 立祀之法, 自上當使嚴立而行之。 又有大於此者, 下人欲啓而不敢者, 上自斟酌而爲之。" 【此亦與南袞之意同。】 領事申用漑曰: "我國祭祀, 不依禮文, 臣前亦啓之。 有嫡子則支子不得祭之者, 禮也。 而今俗, 其親忌日, 棄神主爲紙榜, 各家輪回祭之, 此風鄙甚。 不依禮文, 宜令禮官禁之。" 上曰: "近見憲府公事, 鄭洙妻呈禮曹, 已立後, 而憲府以謂: ‘冡婦在, 不可立後。’ 此, 無乃非乎?" 用漑曰: "鄭洙無後而死, 不可無祭祀之人。 其後妻欲立後, 告狀于禮曹, 故臣令依願立後。 憲府以謂: ‘冡婦尙在, 後妻不可立後。’ 以臣爲非。 臣意以謂, 鄭泂 【泂, 卽洙之子。】 之妻雖在, 而亦無子, 鄭洙後妻, 豈不得立後乎? 此事亦廣議, 何如?" 掌令孔瑞麟曰: "司中之議, 鄭洙雖死, 其妻尙存, 是爲冡婦, 雖無子, 妻乃可立後。 之後妻, 若以冡婦當立後, 而妻不立後爲不可, 告官則可, 自爲立後, 則固不可也。" 用漑曰: "雖識理之人, 若有女子, 則不立後, 果如申鏛所啓。 鄭洙亦無後而死, 雖有冡婦, 妻豈不得立後?" 上曰: "冡婦若以同姓立後, 則鄭洙祭祀, 自可爲之, 不甚相遠矣。 然有冡婦, 乃與女子不異, 而憲府之爲公事, 亦如是則恐後之有女子者, 皆不立後也。" 瑞麟曰: "禮文不可毁也。 爲家財、田民而不立後者, 大不可, 之後妻, 不宜自立後也。 且昭格署、摩尼山塹醮祭, 其不得已而可爲者乎? 臣未知也, 如此等祭, 無乃當革罷乎?" 用漑曰: "昭格署, 果不干於事天, 而只祭星辰、老子祭, 老子, 尤可笑也。 不見其祈禱應驗, 而外方上納之物甚多, 弊則大矣。 臺諫前亦論啓, 不得蒙允。 雖祖宗朝所爲, 而如摩尼山之祭, 非道甚矣, 當快斷絶之。" 上曰: "祀典, 在祖宗已參酌之, 或存或去, 今不可輕議。" 臺諫請遞李自健黃允獻李均; 請改金良弼, 請汰朝官之不可用者。 用漑曰: "沙汰, 不可容易, 如監役官及假郞官等多, 而實官以官事委之, 如此等官, 皆令汰去, 則仕路淸矣。" 獻納文瓘曰: "假郞官差出, 則卽付軍職, 遞後仍付者, 亦多矣。" 皆不允。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22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풍속-예속(禮俗) / 과학-천기(天氣) /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사상-도교(道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