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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52권, 성종 22년 4월 28일 계유 3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북방 정벌에 반대하는 대사헌 신종호 등의 상소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신종호(申從濩)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사이(四夷)를 통치하시면서 공물[貢]을 바치지 않으면 명분을 닦고 왕(王)으로 여기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는다 하였으니, 그 신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만둘 만한 것을 그만두지 않고 위험을 꾀하고 요행을 바라면서 금수(禽獸) 〈같은 무리와〉 이기고 지는 것을 비교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북쪽 오랑캐들이 사납고 교만하여 제왕(帝王)의 강토를 침범하였으므로, 전하께서 대단히 노하시어 홀로 예산(睿算)427) 을 운용하시고, 앞으로 죄를 신문하는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대저 오랑캐들은 비유하건대, 모기와 등에가 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변장(邊將)에게 거듭 경계할 것이며, 〈침범하여〉 오면 징계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분노한 군사를 일으켜 무력을 남용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 고제(高帝)428) 가 30만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백등(白登)에서 포위당하였다가 겨우 몸만 빠져 나와 〈곤경을〉 면하였으니, 분함이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화친(和親)을 맺었으며, 광무제(光武帝)는 흉노(凶奴)통호(通好)429) 하면서 예물로 금과 비단을 주었는데도, 선우(單于)가 교만하게 굴고 말이 사리에 어긋나고 거만하였으니, 그 분함도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참고 물건을 보내어 사례(謝禮)하였을 뿐입니다. 저 두 군주(君主)가 천하의 힘을 부려서 〈오랑캐들의〉 뜰을 갈아버리는 거사를 할 줄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억제하면서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뜻이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북쪽 변방의 적(賊)의 작란[耗]이 어찌 백등에서 포위를 당하고 말을 사리에 어긋나고 거만하게 하는 것보다 분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반복해서 그것을 생각하신다면 경중(輕重)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군대를 멀리 내보내고 깊숙이 들어가게 하여 호랑이 굴[虎穴]을 찾는 것을 신 등은 저윽이 위태롭게 여기니,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城) 밑의 야인(野人)은 우리 겨레가 아니며 피로(彼虜)들과 혼인으로 연결된 관계가 있어서 우리들의 동정[動息]을 몰래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없는데, 대군(大軍)을 한 번 일으키면 오랑캐들은 이미 환하게 알고 그들의 소굴을 비워두고 험한 곳으로 숨어버릴 것이며 우리 군사는 한갓 수고롭게 헛되이 갔다가 헛되게 돌아올 것이며, 또 험한 곳에서 갑자기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을 만나면 비록 한신(韓信)430)백기(白起)431) 가 있다 하더라도 계책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오랑캐의 지역은 매우 추워서 내지(內地)와는 다른데, 혹시 많은 눈이라도 내리게 된다면 우리 군사들은 성격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손가락이 〈얼어서〉 떨어져 나가고 피부가 찢어져 오랑캐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저절로 곤궁해질 것이니, 이것이 둘째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하도(下道)의 군사가 멀리 5진(五鎭)432) 까지 나아가려면 거의 60일 노정(路程)입니다. 그래서 말이 쇠약해져 중도에서 죽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노정(虜庭)433) 에 이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또 보병(步兵)은 들판에서 전투하기가 적합하지 않는데다 천리 밖의 이익을 구하려다 군사의 사기가 이미 떨어졌을 때 오랑캐들이 건장한 말을 타고 육박한다면 그들을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의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전쟁 뒤에는 흉년이 드는데, 그것은 대개 근심하고 괴로와하는 기운이 음양(陰陽)의 조화(調和)를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곧 많은 군사를 조발(調發)하느라 떠나는 자와 남아 있는 자가 근심하면서 탄식하는 것이 길에 가득하므로, 아마도 가뭄의 재해(災害)가 이를 따라서 더욱 심해질 듯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큰 일을 일으키려면 반드시 천심(天心)을 따라야 하는데, 천심이 따라 주고 등지는 것은 재앙과 상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마다 가뭄이 들고 별의 변고가 있었으며, 겨울에 천둥이 치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는 재앙이 있었으니, 천심이 따라주고 등지는 것을 알 만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서 승리를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다섯 번째 어려움입니다.

만전(萬全)의 〈계책을〉 놓아두고 다섯 가지 어려움을 범하시니, 아마도 뒷날 한없는 후회를 남길 듯합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전대의 치욕을 분하게 여겨 대단한 기세로 장수에게 명하여 대막(大幕)434) 을 끊고 고란(皐蘭)435) 을 무찌르게 하여 위세를 사막(沙漠)에 떨쳤습니다. 그러나 군사와 말이 죽어서 해내(海內)가 텅빌 정도로 소모되었므로, 늙어서 잘못을 뉘우치고 마침내 윤대(輪對)의 조칙[詔]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 신종(神宗)원호(元昊)436) 가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데 분격하여 무공(武功)을 〈세우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무승(武勝)에다 성(城)을 쌓고 희하(熙河)를 회복하여 하란(賀蘭)을 취하기를 바랐지만 군사가 늙고 재력(財力)이 고갈되어 영락성(永樂城)437) 에서 패배하여 죽은 자가 20여 만이나 되었으므로 깊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서하(西夏)를 공격하려는 뜻을 끊었었습니다.

대저 무기는 흉(凶)한 것이며 전쟁은 위험한 것인데, 죄없는 생민[生靈]으로 하여금 칼날 밑에서 고생하게 하며 모래와 자갈 틈에서 뼈가 드러나게 하니, 어찌 인인(仁人)과 군자(君子)가 차마 할 바이겠습니까? 두 군주로 하여금 종신(終身)토록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면 재화(災禍)로 인한 실패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깊으시고 은택을 베푸심이 두터워서 백성 보기를 다친 자를 보듯이 하시는데, 유독 북정(北征)하는 이 한 가지 일만은 결단코 행하시려 하시니, 신 등이 저윽이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공을 돌에 새기고438) , 천산(天山)에다 활을 건 것은 당시에는 세상에 드문 공적이라고 하여 사기(史記)에 기록하였지만, 그것은 마침 병력을 남용하였다는 비난을 물려 주기에 충분하였으므로 군자(君子)가 취하지 않는 바입니다. 가령 지금 장수와 군사가 힘을 다하여 먼 곳에서 무력을 드날리게 한다면 개선(凱旋)하는 날에 전하께서는 남면(南面)하여 하례를 받으시며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의지하여 공적을 논하고 상(賞)을 주실 것이니, 한갓 신하의 이익이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오랑캐와의 흔단(釁端)은 더욱 깊어져 우리의 나태함을 틈타 번번이 방자하게 으르렁거릴 것이므로, 변방의 성(城)을 일찍 닫아야 하며 군량(軍糧)을 운송하는 고달픔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익을 잃고 천역(賤役)을 하는 군졸을 다 갖추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국가의 위엄이 손상될 것이며, 오랑캐의 위세는 확장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고자 하여도 군사가 이미 지치고 고달플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 내버려 두고 신문하지 않는다면 오랑캐들이 더욱 우리를 경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여부(與否)는 모두 국가의 복(福)이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말을 오활(迂闊)439) 하다고 하지마시고 마음에 두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도원수(都元帥)에게 보이고 정원(政院)에 유치(留置)시켜 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252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註 427]
    예산(睿算) : 임금의 밝은 계산.
  • [註 428]
    고제(高帝) : 고조(高祖).
  • [註 429]
    통호(通好) : 우정을 통함.
  • [註 430]
    한신(韓信) : 한(漢)나라 고조 때의 명장.
  • [註 431]
    백기(白起) : 전국 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 명장.
  • [註 432]
    5진(五鎭) : 경원(慶源)·회령(會寧)·종성(鍾城)·경흥(慶興)·온성(穩城)의 다섯 진(鎭).
  • [註 433]
    노정(虜庭) : 오랑캐의 조정.
  • [註 434]
    대막(大幕) : 대막(大漠)과 같음. 대막(大漠)은 흥안령(興安嶺)의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흑룡강성(黑龍江省)·찰합이성(察哈爾省)·외몽고(外蒙古)·신강성(新疆省)의 변경에 걸친 사막(沙漠)을 말함.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대장군 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을 보내어 기련산(祀連山)을 공격하고 대막(大幕)을 끊어 선우(單于)를 끝까지 추격한 일이 있었음.
  • [註 435]
    고란(皐蘭) : 산의 이름. BC 120년 한(漢)나라 무제가 곽거병을 표기 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곽거병이 오려(烏盭), 속복(遬濮), 호노(狐奴), 언지산(焉支山) 등을 거쳐, 고란산 아래에서 흉노를 크게 무찔렀음.
  • [註 436]
    원호(元昊) : 서하(西夏) 이낭소(李曩霄)의 본명(本名).
  • [註 437]
    영락성(永樂城) : 송(宋)나라 중악(仲諤)이 세운 성인데,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미지현(米脂縣)의 서쪽에 있으며, 송과 서하(西夏)가 다투던 땅임. 뒤에 서하에게 함락당하였다 1105년 송이 수복하였고 1106년 폐하였음.
  • [註 438]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공을 돌에 새기고 : 후한(後漢) 영원(永元) 원년에 두헌(竇憲)이 북쪽의 흉노를 격파하고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돌을 깍아 공(功)을 기록하고 돌아온 고사.
  • [註 439]
    오활(迂闊) :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않음.

○司憲府大司憲申從濩等上疏, 略曰:

先王之馭四夷也, 有不貢則修名, 有不王則修德, 其愼重也如此。 未聞可已不已, 乘危僥倖, 與禽獸較勝負。 近者, 北虜桀驁, 侵犯王略。 殿下赫怒, 獨運睿算, 將興問罪之擧, 夫戎狄譬如蚊蝱之螫, 當申勑邊將, 來則懲艾之耳。 豈可輕興憤兵, 以黷其武耶! 昔 高帝提三十萬卒, 困於白登, 僅以身免, 憤亦至矣, 而反結和親; 光武通好凶奴, 賂遺金繒, 單于驕倨, 辭語悖慢, 憤亦至矣, 而忍愧報謝而已。 彼二主非不知役天下之力, 爲犂庭之擧也, 所以懲憤而不爲者, 其意深矣。 今北鄙賊耗, 豈憤於白登之見圍, 詞語之悖慢乎。 殿下平心靜慮, 反復思之, 則輕重瞭然矣。 懸軍深入, 探(子)〔于〕 虎穴, 臣等竊危之。 有五難焉, 城底野人, 非我族類, 連姻彼虜, 我之動息, 無不潛諭, 大軍一起, 虜已洞知, 空其窟穴, 設伏隘塞, 我軍徒勞, 空行空返, 又遇隘塞, 伏輒四發, 雖有, 不能爲謀, 此一難也。 虜中苦寒, 異於內地, 倘遇大雪, 我軍性不耐寒, 墮指裂膚, 不見虜面, 已自困矣, 此二難也。 下道之兵, 遠赴五鎭, 幾六十日程矣。 馬弱中道物故者必多, 其得至虜庭者有幾, 步兵不宜野戰, 千里趨利, 兵氣已竭, 虜以健馬肉薄, 則其能敵乎? 此三難也。 軍旅之後, 必有凶年, 蓋愁苦之氣, 傷陰陽之和也。 萬兵調發, 行者居者, 愁嘆盈路, 恐旱乾之災, 從此益甚, 此四難也。 凡擧大事, 必順天心, 天心向背, 見於災祥, 連歲有旱暵、有星變, 冬雷、夏霜之災, 天心向背可知, 違天興師, 可必其勝乎? 此五難也。 釋萬全而犯五難, 恐貽後日無窮之悔也。 武帝憤前世之恥, 赫然命將, 絶大幕, 鏖蘭皋, 威振沙幕, 然士馬物故, 海內虛耗, 老而悔過, 遂下輪對之詔; 神宗元昊之不臣, 銳意武功, 城武勝, 復熙河, 冀取賀蘭, 然兵老財竭, 永樂之敗死者二十餘萬, 深自悔咎, 絶意西事。 夫兵凶戰危, 使無辜生靈, 塗炭於鋒刃之下, 暴骨於沙礫之間, 豈仁人君子之所忍爲也! 使二主終身不悟, 則其禍敗, 可勝言哉! 殿下仁深澤厚, 視民如傷, 獨北征一事, 決意而行之, 臣等竊惑之。 燕然勒石, 天山掛弓, 在當時爲曠世之績, 書之於史, 適足以貽窮兵、黷武之譏, 君子所不取。 假使今也將士致力, 揚武萬里, 凱旋之日, 殿下不過南面受賀, 資耳目之觀聽; 論功行賞, 徒爲臣下之利矣。 虜釁益深, 乘我之怠, 輒肆狺然, 邊城早閉, 飛輓之苦, 無時而止, 萬一失利, 廝輿之卒, 不備而歸, 則國威損矣, 虜勢張矣, 欲圖再擧, 師已勞憊, 若置不問, 虜益輕我, 然則其勝與否, 皆非國家之福也。 願殿下, 勿以臣等之言爲迂闊而留神焉。

傳曰: "示都元帥, 留政院。"


  • 【태백산사고본】 39책 252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