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한성부사 김연지의 유언에 따라 막내 김견수를 적자로 삼게 하고 각 시험의 초장에 강경을 하는 것에 대해 의논케 하다
고(故)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익수(金益壽)의 아내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지아비 김익수는 곧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김연지(金連枝)의 적자(適子)인데 일찍이 부령 부사로 있다가 정해년의 난(亂)1066) 에 죽었습니다. 그 때 김덕흥(金德興)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으므로, 시아비가 ‘덕흥은 나이가 어려 뒷일을 부탁할 수 없다.’ 하여, 막내 아들 김견수(金堅壽)로 적자를 삼아 선대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었습니다. 이제는 김견수가 이미 죽고 김덕흥이 또한 이미 장성했는데 본 종가(宗家)의 적손(適孫)으로서 선대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됨은 인정과 법에 어그러지는 일이니, 법에 의거하여 후사(後嗣)로 세우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이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을미년1067) 무렵에 송씨가 이를 들어 상언하였기에 본조(本曹)에서 아뢰기를, ‘김연지가 손수 유서(遺書)를 써 김견수로 후사를 삼으며 뒷일을 부탁하되 말뜻이 정녕(丁寧)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 명한 것도 아니요 또한 사정에 따르느라 적자를 폐한 것도 아닌데, 그의 유언한 뜻을 어기고 관(官)에 고하여 적자를 다투는 것은 자손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니, 마땅히 김연지의 정원(情願)에 의해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이미 윤허(允許)를 받았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거듭 소청(訴請)하는 것은 매우 불가하니, 청리(聽理)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 및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이철견(李鐵堅)·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장자 김익수의 아들이 승계(承繼)를 감당하지 못할 까닭이 없는데도 차자 김견수로 적자를 삼았으니, 사랑과 미움 때문에 적통(適統)을 빼앗고 종계(宗系)를 어지럽힌 것이 분명하여 진실로 개정(改正)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송씨가 허물을 시아비의 명에 돌리며 적자 다툼을 하는 것은 진실로 대체에 방해로우니, 예조로 하여금 다른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고찰하도록 하여, 만일 다른 자손이 있다면 다시 세워 적자를 삼아 사랑과 미움 때문에 적자를 다투게 되는 폐단을 끊어버리게 해야 합니다."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적자 세우기를 법에 어그러지게 한 일은 율(律)에 규정한 조문(條文)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견수가 제사를 받들게 된 일은 국가에서 벌써 이미 상의하여 확정한 것이므로, 이제 다시 개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또 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대간(臺諫)에게 의논하도록 하니, 정괄(鄭佸)·원중거(元仲秬)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움은 고금의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율(律)에 ‘적자 세우기를 법에 어그러지게 한 것[立嫡子違法]’이란 조문이 있는 것입니다. 김연지의 장자 김익수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들이 있었으니, 따로 제사를 맡을 수 없는 까닭이 없다면 이 사람이 진실로 마땅히 적자가 되어야 하는데, 김연지가 마음대로 차자 김견수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는 김연지의 잘못입니다. 지난번에 예조(禮曹)에서 김연지의 법에 어긋나는 유서(遺書)에 따라 김견수로 적자 삼기를 청했었는데,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사랑과 미움 때문에 서로 쟁탈(爭奪)하느라 윤리(倫理)를 망치고 풍속을 어지럽히게 되어 손상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신들은 예조의 이런 계달(啓達)은 진실로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만일 ‘전번에 이미 아뢰어 결정해놓고 이제 또 개정한다면 경솔하게 될 듯하다.’고 한다면, 무릇 일이란 중(中)을 얻는 것이 귀중한 법인데, 어찌 자주 변경하기를 혐오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한치례(韓致禮)는 의논하기를,
"김연지의 아들 김익수는 미욱하거나 용렬한 사람이 아닌데,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죽은 뒤에 김견수를 적자로 삼았으니, 신은 사랑과 미움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 여깁니다. 가령 적자가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손자가 계승할 수 있는 법이니, 큰 손자를 버려두고 제사를 맡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김연지는 사리를 아는 재상(宰相)이었습니다. 어찌 적자를 방치하여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것이 불가한 줄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생각하건대, 반드시 그 때에 김덕흥(金德興)이 강보(襁褓)를 면하지 못하고 있어 살게 될 것인지 죽게 될 것인지를 알기 어려운데, 김견수는 벼슬길이 이루어지고 명성(名聲)이 서 있어 자신의 죽은 뒤의 일을 맡길 수 있으므로 제사를 맡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부자(父子)·형제(兄弟)의 사이에 사랑과 미움에 끌리어 마음대로 지자(支子)로 하여금 적자의 자리를 빼앗게 하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운 것에 관한 율이 정해진 조문이 있으니, 율대로 논단해야 합니다."
하고, 유순(柳洵)·박안성(朴安性)·윤은로(尹殷老)·권정(權侹)·김제신(金悌臣)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움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요, 맏이를 폐하는 죄는 율(律)에 일정한 조문이 있으니, 만일 부득이하여 서자(庶子)로 세우려면 사유를 갖추어 관에 신고해야 합니다. 김연지는 장자의 아들 김덕흥(金德興)을 버리고 마음대로 차자 김견수(金堅壽)를 세워 종통(宗統)의 법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금해야 할 일입니다. 만일 정탈(定奪)한 지 이니 오래인 것 때문에 그대로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종통의 법이 무너져 장차 폐단을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니 고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다만 송씨가 시아비의 명령을 그르게 여기며 신소(申訴)하여 적자를 다투는 것은 또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평(李枰)·김전(金琠)·윤긍(尹兢)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움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요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우면 율에 정해진 조문이 있습니다. 김연지가 장자 김익수는 일찍 죽고 손자 김덕흥은 유약(幼弱)하지만 차자 김견수는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는지라, 김연지가 한때의 사랑과 미움만으로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워 부자와 형제간에 그야말로 서로들 싸우고 다투게 하였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김견수(金堅壽)가 또한 법에 어그러진 것임을 알아차리고서 김덕흥으로 하여금 신주(神主) 곁에 이름을 쓰도록 하였으니, 그의 뜻이 가상합니다. 적손(嫡孫) 김덕흥이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하고, 이종윤(李從允)은 의논하기를,
"종손(宗孫)이 제사를 받드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예법입니다. 이러므로 선왕(先王)들이 예를 제정할 적에 종손과 지손의 구분에 있어 근엄(謹嚴)하게 하여, 종손인 다음에야 제사를 받들 수 있은 것입니다. 김연지(金連枝)의 장자 김익수는 죽었고 지자(支子) 김견수는 생존했었으니, 그렇다면 김연지가 제사 맡는 일을 김견수에게 옮긴 것은, 만일 사랑과 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김견수는 살아 있고 김익수는 죽은 것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지금은 김익수와 김견수가 모두 이미 죽었고 김익수의 아들 김덕흥이 건장하게 자랐으니, 마땅히 공통된 예법대로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맏이를 적자로 세우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다. 김연지가 장자의 아들로써 적손을 삼지않고 차자 김견수로 적자를 삼은 것은, 반드시 그 때에 김덕흥은 어렸지만 김견수는 입신(立身)도 하고 공명(功名)도 이루어 종가(宗家)의 제사를 맡길만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제는 김덕흥의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김덕흥으로 적손을 삼아 적사(嫡嗣)를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매, 윤필상이 의논하기를,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는 법인데, 이번에 자부(子婦)가 소청(訴請)한 것 때문에 경솔하게 김연지(金連枝)의 유명(遺命)을 고친다면, 이는 아들 된 사람들의 제 아비를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열어 주는 것이어서 강상(綱常)이 문란해지게 될 것입니다. 유독 김연지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조말생(趙末生)도 역시 끝에 아들 조근(趙瑾)으로 제사를 맡게 하여, 이와 같은 유(類)가 또한 많이 있으므로 만일 개정(改正)하는 단서를 열어놓는다면, 조씨(趙氏) 가문의 자손들도 또한 반드시 봉기(蜂起)하여 소청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하나하나 뒤따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종손을 중히 여기는 법을 지키려다가 도리어 강상을 어지럽히는 일을 열어놓게 될 것이므로, 신은 이를 위해 두려워합니다."
하고, 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이철견(李鐵堅)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큰 법이지만, 적자를 놓아두고 서자(庶子)로 적자를 세운 것은 아비의 유명(遺命)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일이니, 아비의 유명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김연지가 적자를 놓아둔 것은 한 가문의 불행한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부모의 유명(遺命)을 어기지 못하는 것은 만세토록 지켜야 하는 예법[禮防]입니다. 만일 한 번 고치게 된다면 장차 적자(賊子)1068) 들이 아비가 하는 것을 엿보아 두었다가 하나하나 고발하게 될 것인데, 국가에서 그대로 들어준다면 이는 천하 만세의 인륜(人倫)에 관한 교화(敎化)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악역(惡逆)한 마음을 길러주게 될 것이니 그 화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김연지의 유명대로 해야 합니다."
하고, 한치례(韓致禮)·정괄(鄭佸)·박안성(朴安性)·권건(權健)·권정(權侹)은 의논하기를,
"적자(嫡子)를 폐하여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짓은 개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앞서 의논한 대로 시행하소서."
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김연지가 사랑과 미움 때문에 김견수(金堅壽)를 세워 적자를 삼은 것이니 이번에 김익수의 아들로써 적자를 삼는 것이 바른 예에 합치됩니다. 다만 김익수의 아내 송씨(宋氏)가 감히 아비의 유명을 어기고 신소(申訴)하여 적자 세우기를 다투었으니 이는 아비를 안중(眼中)에 두질 않은 것이어서 그의 아들로 적자를 삼을 수 는 없습니다. 다시 다른 자손을 세워 적자를 삼는 것이 명분(名分)도 바르고 말도 순탄하여 바로 대체(大體)에 합치하기 때문에 앞서 의논할 적에도 언급했었습니다."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김연지(金連枝)가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운 것도 진실로 불가하지만, 송씨(宋氏)의 죄는 더욱 중합니다. 이에 앞서 예조(禮曹)에서 김연지의 일에 관하여 논계(論啓)하기를, ‘김견수로써 적자를 삼은 것은 관(官)에 고하여 정탈(定奪)해야 하는 법의 이전에 있은 일이니, 김연지의 뜻대로 하기를 청합니다.’ 했었으니, 지금 송씨의 소청에 따라 고치는 것은 공편하지 못합니다. 또한 법을 세우기 이전의 오랜 날에 적자로 세운 것이 또 있을 것인데, 어찌 감히 하나하나 개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긍(尹兢)·조구(趙球)·이수공(李守恭)은 의논하기를,
"김연지가 김견수로 적자를 삼은 것은, 반드시 김익수는 일찍 죽고 그 아들은 미약하여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된 때문이었으니, 이는 특히 한때의 사정으로 한 일입니다. 이제는 김견수(金堅壽)는 죽고 김익수의 아들이 장성하여 제사를 받들 만하니, 마땅히 김익수의 아들로 적사(嫡嗣)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정석견(鄭錫堅)·곽심(郭諶)·민상안(閔祥安)은 의논하기를,
"《대전(大典)》 내용에 ‘사당(祠堂)을 세운 가옥[家舍]은 제사를 맡는 자손에게 전해 준다.’고 한 것은 진실로 선왕(先王)들께서 맏이로 적자를 세우는 뜻에 근본한 것입니다. 어찌 김연지(金連枝)의 한 가문의 편애(偏愛)한 사정을 따라주느라 만세의 떳떳한 법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김익수의 아들로 제사를 맡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김연지의 유명(遺命)대로 하여 그전대로 김견수를 적자로 삼으라."
하였다.
또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유생에게 향시(鄕試)·한성시(漢城試)·관시(館試)의 초장(初場)에 강경(講經)을 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의논하도록 하니,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한치례(韓致禮)·정괄(鄭佸)·박안성(朴安性)·권건(權健)·성숙(成俶)·권정(權侹)·송철산(宋鐵山)·이집(李諿)이 의논하기를,
"《대전(大典)》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하고, 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근래에 유생(儒生)들이 거관(居館)1069) 하면서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염려되기 때문에 임시 변통의 방법에 따라 지난해의 관시(館試)·한성시·향시에 강경을 하게 하여 한때의 폐단을 바로잡은 것이니 이제는 《대전》대로 거행해야 할 것이 진실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전》대로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또 최충(崔沖)·최유선(崔惟善)·조간(趙簡)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편리할지의 여부를 의논하였는데, 홍문관(弘文館)도 또한 참여하였다.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노사신(盧思愼)·이철견(李鐵堅)·정괄(鄭佸)·박안성(朴安性)·권건(權健)·성숙(成俶)·권정(權侹)·송철산(宋鐵山)·정석견(鄭錫堅)·곽심(郭諶)·민상안(閔祥安)·민사건(閔師騫)·홍한(洪瀚)·민보익(閔輔翼)·성희안(成希顔)은 의논하기를,
"예조(禮曹)에서 아뢴 대로 하소서."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전(傳)1070) 에 이르기를, ‘한 가정이 인(仁)하면 온 나라가 인에 흥기(興起)하게 되고 한 가정이 겸양(謙讓)하면 온 나라가 겸양에 흥기하게 된다.’고 했는데, 대개 사람의 천성(天性)은 모두 착하므로 감동하여 흥기함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를 고찰하건대, 최충(崔沖)·최유선(崔惟善)·조간(趙簡)은 모두 글을 잘하고 도덕이 있어 울연(蔚然)하게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한때는 공자(孔子)라 칭하기도 하고 더러는 정문(旌門)을 세워 표하기도 했었습니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비록 사전(祀典)에 실리지는 아니하였지만, 그 때의 조정 공론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유(安裕)는 모두 우리 동방(東方)의 문헌(文獻)1071) 의 선비로서 문묘에 배향(配享)되었는데 중국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것인데 우리 조정에서 종사(從祀)하게 된 것은 특히 그 사람들이 우리 동방의 준칙(準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충과 조간 등도 또한 온 나라 온 고을의 어진 선비로서 시대의 소망(所望)이 되어 사람들이 감동하고 흠모하게 되었고, 문묘에 종사한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던 것도 반드시 소이연(所以然)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 사전(祀典)에 실리지 않은 것 때문에 제거해 버린다면 고을 백성들의 선(善)을 흠모하는 마음을 저해(沮害)하게 되고 정혼(貞魂)의 의탁할 데가 없어 아예 여제(厲祭)1072) 받는 영혼만도 못하게 될까 싶습니다. 신의 마음에는, 설총 등이 중국의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는 부족하지만 우리 동국(東國)의 문묘에 종사하기엔 넉넉하고, 최충 등이 국학(國學)의 문묘에 종사하기는 부족하나 향묘(鄕廟)에 종사하기에는 넉넉하다고 여기오니, 아직은 그전대로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최충·최유선·조간 등은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 문묘에 있게 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제사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와서 제사지내지 않는 것은 미안하니, 《고려사(高麗史)》를 고찰해보아 만일 과연 그 고을에 공덕이 있었다면 오현당(五賢堂)의 예에 의해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게 하소서."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사전(祀典)에 실리지 못한 사람은 문묘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다만 옛적의 여릉(廬陵)·유주(柳州) 등의 사당1073) 은 모두 그 고을에 공덕이 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스스로 사사로이 사당을 세워 제사한 것이니 해주(海州)와 김제(金堤) 사람들이 만일 이에 의해 하게 된다면 금하지 않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이집(李諿)은 의논하기를,
"고려(高麗) 때에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유(安裕) 등 몇 사람만 문묘에 종사했습니다. 우리 동방(東方)이 삼한(三韓) 이래에 학문과 사장(詞章)으로 당세에 이름이 현달한 사람들이 어찌 두어 분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러나 단지 두어 분만 취한 것은 반드시 모두 성문(聖門)에 도움이 있었고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전배(前輩)들보다 뛰어난 분들이어서입니다. 최충(崔沖) 같은 분은 제자들을 교육시켜 우리 동방에 문학(文學)이 왕성해진 것이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당시에 해동 공자(海東孔子)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문묘에 종사하기를 거론(擧論)하지 못했던 것은 어찌 공론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최유선(崔惟善)과 조간(趙簡)은 역시 최충보다도 못하여 이들은 모두 사전(祀典)에 실리지 않는 사람들인데 어찌 문묘에 종향(從享)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들도 더러는 그 사람의 특이한 정책을 사모하고 더러는 그 사람의 공명(功名)을 흠모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기도 하고 비(碑)를 세워 기록하기도 한 것이 있으니, 만일 해주(海州)나 김제(金堤) 사람들이 옛적처럼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은 법에 금할 바가 아니지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신은 되지 못할 일인 듯 싶습니다."
하고, 윤긍(尹兢)·조구(趙球)·이수공(李守恭)은 의논하기를,
"최충·최유선·조간은 사전(祀典)에 실린 사람들이 아니니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고을에 공덕(功德)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만일 고을 사람들이 사사로이 스스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은 금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강경서(姜景敍)·허집(許輯)·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는 의논하기를,
"예조(禮曹)에서 아뢴 대로 하는 것이 공편합니다. 그러나 옛말이 ‘고을 선생이 돌아가면 사(社)에서 제사해야 되는 것이다.’ 했으니, 만일 고을 사람들이 스스로 딴 사당을 세워 제사하기를 오현당(五賢堂)의 예처럼 하는 것은 금하지 말아야 할 뿐이고, 국가에서 따로 사당을 만들어 제사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문묘에 종사(從祀)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233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52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가족-가족(家族) / 인사-선발(選拔) / 풍속-예속(禮俗)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066]정해년의 난(亂) : 조선조 세조(世祖) 13년(1467)에 길주(吉州)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북도(北道)의 수령(守令)을 남도(南道)사람으로써 삼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북도인을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을 말함.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 [註 1067]
을미년 : 1475 성종 6년.- [註 1068]
적자(賊子) : 어버이를 반역하는 불효한 자식.- [註 1069]
거관(居館) : 성균관의 재방(齋房)에 들어가 있는 일.- [註 1070]
전(傳) : 《대학(大學)》.- [註 1071]
문헌(文獻) : 글과 법도.- [註 1072]
여제(厲祭) :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 [註 1073]
여릉(廬陵)·유주(柳州) 등의 사당 : 여릉(廬陵)은 중국 고대의 고을 이름. 곧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길안현(吉安縣)의 남쪽 지방으로 구양수(歐陽脩)의 출생지. 유주(柳州)는 유종원(柳宗元)이 벼슬하다 좌천(左遷)되어 자사(刺史)로 나갔던 곳. 곧 구양수와 유종원의 사당을 가리키는 것임.夫益壽卽判漢城府事連枝適子也, 嘗爲富寧府使, 死於丁亥之亂。 時有一子曰德興, 方在襁褓, 舅以德興年幼不足托後, 以末子堅壽爲適, 許奉先祀。 今堅壽已死, 德興亦已長成, 以本宗適孫, 不得奉先世祭祀, 有乖情法。 請依法立後。
禮曹據此啓: "在乙未年間, 宋氏以此上言, 本曹啓云: ‘連枝手草遺書, 以堅壽爲嗣, 屬以後事, 辭意丁寧, 則固非亂命, 亦非徇私廢適之比。 而拂其遺意, 告官爭適, 有違子道。 當依連枝情願施行。’ 已蒙允可。 今更申訴, 甚不可。 請勿聽理。" 命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 尹弼商、洪應、李克培、盧思愼、尹壕、李鐵堅、孫舜孝議: "依所啓施行。" 李崇元議: "長子益壽之子, 無不堪承繼之故, 而以次子堅壽爲適, 其以愛憎奪適亂宗明矣, 固宜改正。 但宋氏歸咎父命而爭適, 實妨大體。 令禮曹考他子孫有無, 若有他子孫, 更立爲適, 以絶愛憎爭適之端。" 鄭文炯議: "立適違法, 律有正條。 然金堅壽奉祀事, 國家已曾商確, 今不可更改。" 又議于六曹、漢城府、臺諫, 鄭佸、元仲秬議: "立嫡以長, 古今通法, 故律有立嫡子違法之條。 連枝長子益壽雖死, 其子在矣, 而別無不可主祀之故, 則是固當爲嫡矣。 連枝擅使次子堅壽奉祀, 此則連枝之誤也。 前者禮曹從連枝違法遺書, 請以堅壽爲嫡, 此門一開, 則以愛憎相奪, 敗常亂俗, 所損多矣。 臣等以爲禮曹此啓, 固爲不可。 若曰: ‘前已啓定, 而今若改之, 似爲輕矣。’ 則凡事貴於得中, 何可嫌於屢變?" 韓致禮議: "金連枝子益壽, 非迷劣人, 死於李施愛之亂, 後以堅壽爲嫡, 臣以爲出於愛憎而然也。 假令嫡子雖愚, 其孫可繼, 棄長孫而不主祀, 未穩。" 愼承善、權健議: "連枝識理宰相, 豈不知廢嫡亂宗之爲不可也? 想必其時德興未免襁褓, 生死難知, 而堅壽宦成名立, 可以寄托身後之事, 定爲主祀也。 然而此門一開, 父子兄弟之間, 牽於愛憎, 擅使支子奪嫡者有之。 立嫡子違法律有正條, 依律論斷。" 柳洵、朴安性、尹殷老、權侹、金悌臣議: "立嫡以長, 古今通(議)〔義〕 , 廢長之罪, 律有常條。 如不得已而欲立庶子者, 則具由告官可也。 連枝廢其長子之子德興, 而擅立次子堅壽, 以亂宗法, 在所當禁。 若以定奪已久, 因仍不改, 則宗法毁而弊將難救, 不可不改也。 但宋氏以父命爲非, 申訴爭嫡, 亦不可不治。" 李枰、金琠、尹兢議: "立嫡以長, 古今通義, 違法立嫡, 律有正條。 而金連枝長子益壽早死, 其孫德興幼弱, 次子堅壽致位宰相, 連枝以一時愛憎, 立嫡違法, 使父子兄弟之間, 乃至於相殘, 此非細故。 況堅壽亦知違法, 使德興題名神主之傍, 其意可嘉。 以嫡孫德興奉祀, 理當。" 李從允議: "宗子奉祀, 天下之達禮。 是以先王制禮, 謹嚴於宗支之分, 宗子然後得以奉祀。 連枝宗子益壽身死, 支子堅壽生存, 然則連枝移主祀於堅壽, 若不出於愛憎, 必出於生亡。 今者益壽、堅壽皆已身死, 而益壽之子德興壯長, 宜遵達禮而奉祀。" 傳曰: "立嫡以長, 古今通義。 連枝不以長子之子爲嫡, 而以次子堅壽爲嫡, 必以其時德興幼少, 堅壽則立身成名, 可托宗祀而然也。 今德興年壯, 以德興爲嫡, 以正嫡嗣何如?" 尹弼商議: "天下無不是底父母。 今因子婦之訴, 輕改連枝之命, 則是啓人子非其父之心, 而綱常紊矣。 不獨連枝爲然, 趙末生亦以末子趙瑾主祀, 如此之類, 亦多有之。 若開改正之端, 趙家子孫亦蠭起而訴之, 豈可一一追改乎? 欲重宗子之法, 而反開亂常之事, 臣則爲此懼也。" 洪應、李克培、盧思愼、李鐵堅議: "立嫡以長, 古今大法。 而廢嫡立庶, 出於父之命, 則是可改之乎? 不可也, 以父命爲重故也。 今連枝之廢嫡, 一家之不幸也, 不能違父之命, 萬世之防也。 若一改之, 將賊子窺覘父之所爲, 一一發告, 國家從而聽之, 是毁天下萬世彝倫之敎, 而長其惡逆之心矣, 其禍可勝道哉? 姑依連枝所命。" 韓致禮、鄭佸、朴安性、權健、權侹議: "廢嫡亂宗, 不可不改正。 依前議施行。" 李崇元議: "連枝以愛憎立堅壽爲嫡, 今以益壽之子爲嫡, 正合於禮。 但益壽之妻宋氏敢違父命, 申訴爭嫡, 是不有其父, 不可以其子爲嫡。 更立他子孫爲嫡, 名正言順, 正合大體。 故前議及之。" 鄭文炯議: "連枝違法立嫡, 固不可, 宋氏之罪尤重。 前此禮曹論連枝事, 以爲: ‘以堅壽爲嫡, 在告官定奪之法之前, 請從連枝之意。’ 今從宋氏之訴改之, 未便。 且立法前久遠立嫡者亦有之, 安敢一一改正乎?" 尹兢、趙球、李守恭議: "連枝以堅壽爲嫡者, 必以益壽早死, 其子微弱, 未得奉祀, 是特出於一時之私耳。 今堅壽死而益壽之子長, 可以奉祀, 當以益壽之子爲嫡嗣。" 鄭錫堅、郭諶、閔祥安議: "《大典》內: ‘立廟家舍, 傳於主祭子孫。’ 云者, 實原先王立嫡以長之意, 豈可從連枝一家偏愛之私, 廢萬世經常乎? 使益壽之子(立)〔主〕 祀爲當。" 傳曰: "從連枝之命, 仍舊以堅壽爲嫡。" 又命領敦寧以上、議政府、六曹、漢城府, 議儒生鄕、漢城、館試初場講經便否。 沈澮、弼商、致禮、鄭佸、安性、權健、成俶、權侹、鐵山、李諿議: "依《大典》施行。" 洪應、克培、思愼議: "近者患儒生不居館讀書, 故從權宜, 去年館、漢、鄕試講經, 以救一時之弊。 今依《大典》擧行, 固無疑也。" 傳曰: "依《大》典可也" 又議崔冲、崔惟善、趙簡從祀文廟便否, 弘文館亦與焉。 沈澮、弼商、洪應、思愼、鐵堅、鄭佸、安性、權健、成俶、權侹、鐵山、錫堅、郭諶、閔祥安、閔師騫、洪瀚、閔輔翼、成希顔議: "依禮曹所啓。" 舜孝議: "傳云: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蓋人性皆善, 有感而興起者如此。 考之《高麗史》, 崔冲、崔惟善、趙簡皆有文章道德, 蔚爲一世儀範, 或時稱孔子, 或立標旌門。 其從祀文廟, 雖不載於祀典, 一時朝廷公議, 未可知也。 薛聰、崔致遠、安裕俱以東方文憲之士, 配享文廟, 中朝所不知也。 中朝不知而我朝從祀, 特以其人爲東方之準則也。 崔冲、趙簡等亦以一國一鄕之善士, 爲時所望, 使人感慕, 以至從祀文廟, 其來已久, 必有所以然者。 今若以祀典不載而去之, 則恐沮鄕民慕善之心, 貞魂無依, 曾不如厲祭之魂矣。 臣心以謂薛聰等於中國文廟則不足, 而優於東國之廟: 崔冲等於國學從祀則不足, 而優於鄕廟之祀。 姑且仍舊何如?" 李崇元議: "崔冲、崔惟善、趙簡等非祀典所載, 不宜在文廟。 然此三人祀之已久, 今不致祀未安。 考《高麗史》, 若果有功德於其邑, 依五賢堂等例, 別立廟致祭。" 鄭文炯議: "祀典不載者, 不當入文廟。 但古之廬陵、柳州等廟, 皆有功德於其邑, 邑人私自立祀耳。 海州、金堤人若依此爲之, 勿禁可也。" 李諿議: "高麗 薛聰、崔致遠、安裕等數人從祀文廟, 吾東方自三韓以來, 學問詞章顯名於當世者, 豈止數子哉? 然只取數子, 必皆有補於聖門, 而文章德業, 高出前輩者也, 若崔冲則敎授子弟, 東方文學之盛, 自冲始, 時稱海東孔子。 然自高麗迄于我朝, 不得擬從祀於文廟者, 豈無議乎? 且崔惟善、趙簡則又下於崔冲, 此皆非祀典所載, 安可從享於文廟乎? 古人或慕其異政、或慕其功名, 立廟以祀之、立碑以記之者有之。 若海州、金堤之人, 依古別立廟而祀之, 法所不禁, 從祀於文廟, 臣恐未爲得也。" 尹兢、趙球、李守恭議: "崔冲、崔惟善、趙簡非祀典所載, 不宜入文廟。 然有功德於一邑, 若鄕人私自立廟祀之, 則不必禁。" 姜景叙、許輯、金詮、申用漑議: "依禮曹所啓爲便。 然古云: ‘鄕先生沒, 可祭於社。’ 若鄕人自立別廟以祀, 如五賢堂例, 則勿禁而已, 不宜國家爲別廟祀之也。" 傳曰: "勿令從祀文廟。"
- 【태백산사고본】 36책 233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52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가족-가족(家族) / 인사-선발(選拔) / 풍속-예속(禮俗)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