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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23권, 성종 19년 12월 24일 계축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달성군 서거정의 졸기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관례대로 하였다. 서거정의 자(字)는 강중(剛中)이며, 경상도 대구(大丘) 사람인데,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여섯 살에 비로소 글을 읽고 글귀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정통(正統)1262) 무오년1263) 에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 두 시험에 합격하고, 갑자년1264) 에 문과(文科) 3등으로 급제하여 사재 직장(司宰直長)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뽑혀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에 보임(補任)되고 부수찬(副修撰)과 지제교(知製敎) 겸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에 올랐으며, 여러 번 옮겨서 부교리(副校理)에 이르렀다. 을해년1265) 에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와 지제교(知製敎) 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와 세자 우필선(世子右弼善)에 제수되었다가, 병자년1266) 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다. 덕종(悳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세조(世祖)가 좌우에게 이르기를,

"보필(輔弼)하는 사람은 마땅히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재행(才行)이 함께 넉넉한 자를 골라서 삼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서거정을 좌필선(左弼善)으로 삼았다. 서거정이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서 칠언 절구(七言絶句) 16수(首)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淸麗)하여, 세조가 보고는 감탄하기를,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정축년1267) 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세조가 사방을 순수(巡狩)하고자 하므로, 서거정이 논간(論諫)하기를 격절(激切)히 하니, 물론(物論)이 아름답게 여겼다. 세조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후원에서 활쏘기를 하니, 서거정이 간하기를,

"신하와 더불어 짝지어 활을 쏘면 사체(事體)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또 정전(正殿)이 있어 신하들을 접견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활쏘는 것으로 인하여 착한 말을 듣고 하정(下情)을 통하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매우 오활(迀闊)1268) 하여 사체를 알지 못하니, 내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승손이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지나치기는 하나, 옛말에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으니, 이제 전하께서 성명(聖明)하시기 때문에 서거정이 그 말을 한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하례드립니다."

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인년1269) 에 정시(廷試)에서 우등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도 유자(儒者)가 궁리(窮理)하는 일이니, 경이 가령(假令)을 지어서 올리라."

하니, 이때에 《오행총괄(五行總括)》을 지었다. 경진년1270) 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 부경(赴京)1271) 하여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安南國)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는 제과 장원(制科壯元)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한 율(律)로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하였는데,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篇)을 지어 수응(酬應)하므로,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다."

하였고, 요동(遼東) 사람 구제(丘霽)서거정의 초고(草稿)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中原)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신사년1272) 에 가선 대부(可善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오르고, 계미년1273) 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으며, 을유년1274) 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병술년1275) 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고 곧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撰修)에 참여하였다. 정해년1276) 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으로서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겨울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기고, 무자년1277)세조영릉(英陵)1278) 을 옮길 뜻을 두었는데 조정 신하가 마땅히 옮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세조가 어렵게 여겨서 서거정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근세에 산수 화복(山水禍福)을 논하는 말이 대저 방위(方位)와 산수의 미악(美惡)으로써 자손의 화복을 삼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홍범(洪範)》 한 책은 성인(聖人)이 도(道)를 전한 글인데, 우(雨)·양(暘)·욱(燠)·한(寒)·풍(風)은 숙(肅)·예(睿)·철(哲)·모(謀)·성(聖)의 반응(反應)으로 삼았는데, 이는 단지 그 이치가 이와 같다는 것을 논한 것뿐입니다. 만약 하나하나 배합(配合)하는 데 대해서는 신은 그 가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물며 산수설(山水說)은 후한(後漢) 제유(諸儒)에서 비롯하였는데,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세상에서 천장(遷葬)하는 것은 복을 얻기를 희망하는 것인데 왕자(王者)로서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큰 일이므로 성상의 마음의 영단(英斷)에 있을 뿐이며, 신이 감히 억측으로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다시 능(陵)을 옮길 뜻을 두지 않겠다."

하였다. 가을에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맡았고 겨울에는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옮겼다가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옮겼다. 경인년1279) 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祭授)되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3년 신묘년1280) 에는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里功臣)의 호(號)가 내려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겨울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자 신숙주(申叔舟) 등이, ‘문형(文衡)을 맡은 자는 외방에 내어 보낼 수 없다.’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임진년1281) 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옮겼다. 고사(故事)에 무릇 대간(臺諫)에서 일을 아뢰는 자는 승지(承旨)를 통하여 중관(中官)에게 말을 전해서 임금에게 전달되었으므로, 그 사이에 말이 혹시 누설되고 잘못되는 근심이 있었는데, 서거정이 차자(箚子)를 쓰기를 청하여, 무릇 말하는 바를 모두 서계(書啓)할 수 있게 되어서 하정(下情)이 모두 상달되었으므로, 모두들 편리하다고 하였다. 을미년1282) 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 되고, 병신년1283) 에 낭중(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오자,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기순사림(詞林)1284)대수(大手)1285) 로서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도로와 산천의 경치를 문득 시로 표현해 읊으니, 서거정이 즉석에서 그 운(韻)에 따라 화답하되 붓을 휘두르기를 물흐르는 듯이 하며, 어려운 운을 만나서도 10여 편(篇)을 화답하는데 갈수록 더 기묘해지니, 두 사신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기순태평관부(太平館賦)를 짓자 서거정이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니, 기순이 감탄하기를,

"부(賦)는 예전에 차운하는 이가 아직 있지 아니하였으니, 이것도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과 같은 재주는 중조(中朝)1286) 에 찾아도 두세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는데 정유년1287) 에 어떤 일로써 체직(遞職)되었다가 곧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무술년1288) 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대(兼帶)하였다. 임금이 시학(視學)1289) 하고 여러 선비가 문난(問難)1290) 하는데 서거정이 아뢰기를,

"옛 제왕(帝王)의 정치는 모두 마음에 근본을 두었습니다. 요(堯)·순(舜)·우(禹)정일 집중(精一執中)1291)상탕(商湯)·주무왕(周武王)건중 건극(建中建極)1292) 은 모두 이 마음입니다. 이러므로 채침(蔡沈)1293)《서경(書經)》 서(序)에 이르기를, ‘이제(二帝)1294)삼왕(三王)1295) 은 이 마음을 잃지 않고 나라를 보전하였고,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이 마음을 잃고서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마음을 한결 같이 하소서."

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안되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제수하였다. 기해년1296) 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겨서, 송조(宋朝)1297) 의 거자 탈마(擧子脫麻)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문과(文科)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 일곱 번 합격한 자는 서용(敍用)하는 법을 세우기를 건의(建議)하고, 또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기를 헌의(獻議)하였다. 신축년1298) 에 병조 판서로 옮기고, 계묘년(癸卯年)1299) 에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除授)하였다. 무신년1300) 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동월(董越)과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이 사신으로 와서 서거정을 보고 존경하는 예(禮)로 대우하고 매양 논담(論談)하는 데에 반드시 손을 모아 잡고 일어나 섰으며, 망원정(望遠亭)에서 유관(遊觀)할 때에 두 사신이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공은 사문(斯文)1301) 의 노선생(老先生)이신데 오늘 공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명하여 최부를 돌려보내게 하였는 데, 중국의 문인들로 최부를 본 자는 필히 서거정의 안부를 물었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69세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인데,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적처(嫡妻)에는 아들이 없고 서자(庶子) 서복경(徐福慶)이 있다. 서거정온량 간정(溫良簡正)1302) 하고 모든 글을 널리 보았고 겸하여 풍수(風水)와 성명(星命)의 학설에도 통하였으며, 석씨(釋氏)1303) 의 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는 고인(古人)의 과구(科臼)1304) 에 빠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사가집(四佳集)》 30권이 세상에 행한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여지승람(輿地勝覽)》·《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太平閑話)》·《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은 모두 그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정자를 중원(中園)에 짓고는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서 ‘정정정(亭亭亭)’이라고 이름하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담박(淡泊)한 생활을 하였다.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詩)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혹시 이를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서거정이 말하기를,

"나의 고황(膏肓)1305) 인지라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 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詩文)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盟主)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

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223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424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

  • [註 1262]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의 연호.
  • [註 1263]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1264]
    갑자년 : 1444 세종 26년.
  • [註 1265]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 [註 1266]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1267]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1268]
    오활(迀闊) : 실제와는 관련이 멂.
  • [註 1269]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1270]
    경진년 : 1458 세조 4년.
  • [註 1271]
    부경(赴京) : 명(明)나라 북경에 감.
  • [註 1272]
    신사년 : 1463 세조 9년.
  • [註 1273]
    계미년 : 1461 세조 7년.
  • [註 1274]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1275]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1276]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1277]
    무자년 : 1486 세조 14년.
  • [註 1278]
    영릉(英陵) : 세종(世宗)과 그 비(妃)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능.
  • [註 1279]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1280]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1281]
    임진년 : 1472 성종 3년.
  • [註 1282]
    을미년 : 1475 성종 6년.
  • [註 1283]
    병신년 : 1476 성종 7년.
  • [註 1284]
    사림(詞林) : 문단.
  • [註 1285]
    대수(大手) : 대가.
  • [註 1286]
    중조(中朝) : 중국.
  • [註 1287]
    정유년 : 1477 성종 8년.
  • [註 1288]
    무술년 : 1478 성종 9년.
  • [註 1289]
    시학(視學) :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유생들이 공부하는 상황을 돌아보던 일.
  • [註 1290]
    문난(問難) : 풀기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함.
  • [註 1291]
    정일 집중(精一執中) : 사욕(私欲)을 버리고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가져 중도(中道)를 지킴을 뜻하는 말.
  • [註 1292]
    건중 건극(建中建極) : 중정(中定)의 도(道)를 정(定)하여 만민(萬民)의 모범적인 법칙을 세우는 것을 뜻하는 말.
  • [註 1293]
    채침(蔡沈) : 주자(朱子)의 문인.
  • [註 1294]
    이제(二帝) : 요(堯)·순(舜).
  • [註 1295]
    삼왕(三王) : 우(禹)·탕(湯)·문·무(文武).
  • [註 1296]
    기해년 : 1479 성종 10년.
  • [註 1297]
    송조(宋朝) : 송나라.
  • [註 1298]
    신축년 : 1481 성종 19년.
  • [註 1299]
    계묘년(癸卯年) : 1483 성종 14년.
  • [註 1300]
    무신년 : 1488 성종 19년.
  • [註 1301]
    사문(斯文) : 유학.
  • [註 1302]
    온량 간정(溫良簡正) : 온화하고 무던하며 간소하고 바름.
  • [註 1303]
    석씨(釋氏) : 석가.
  • [註 1304]
    과구(科臼) : 규범.
  • [註 1305]
    고황(膏肓) : 고칠 수 없는 병.

達城君 徐居正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居正剛中, 慶尙道 大丘人, 文忠公 權近之外孫也。 幼聰穎, 年六歲始知讀書綴句, 人謂之神童。 正統戊午中生員ㆍ進士兩試, 甲子中文科第三人, 授司宰直長。 未幾選補集賢殿博士, 陞副修撰、知製敎、兼世子右正字, 累遷至副校理。 乙亥授集賢殿應敎、知製敎、兼藝文館應敎、世子右弼善, 丙子遷成均館司藝。 德宗在東宮, 世祖謂左右曰: "輔弼之人, 當擇學問醇正、才行俱優者爲之。" 遂以居正爲左弼善。 居正嘗集趙孟頫赤壁賦字, 作七言絶句十六首, 甚淸麗。 世祖見之, 嘆曰: "非尋常人。" 丁丑捷重試, 特授通政司諫院右司諫、知製敎。 時, 世祖欲巡狩四方, 居正論諫激切, 物論多之。 世祖與群臣, 射于後苑, 居正諫曰: "與臣子耦射, 恐失事體。 且有正殿, 可以接群臣, 何必因射, 得聞善言而達下情乎?" 世祖顧謂禮曹判書李承孫曰: "居正之言甚迂, 不識事體。 黜之何如?" 承孫曰: "居正之言過當。 然古云: ‘主明, 臣直。’ 今殿下聖明, 故居正有是言。 臣竊賀焉。" 世祖嘉納之。 戊寅以廷試優等, 陞通政工曹參議、知製敎, 俄遷禮曹參議。 一日世祖從容謂居正曰: "祿命書亦儒者窮理之事, 卿爲作假令以進。" 於時著《五行摠括》。 庚辰移吏曹參議, 以謝恩使赴京, 於通州館安南國使梁鵠, 乃制科壯元也。 居正以近體詩一律先之, 和之, 居正卽酬連十篇, 嘆服曰: "眞天下奇才也。" 遼東丘霽居正草蒿曰: "此子文章, 求之中原, 亦不多得。" 辛巳陞嘉善刑曹參判, 癸未司憲府大司憲, 乙酉帶藝文館提學。 丙戌中拔英試, 授禮曹參判; 旋中登俊試第三人, 特加資憲行同知中樞府事, 參修《經國大典》。 丁亥刑曹判書、藝文館提學, 尋帶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蓋典文衡也。 國家典冊、詞命, 皆出其手。 冬移工曹判書。 戊子世祖留意遷英陵, 朝臣多有言當遷者, 世祖難之, 召居正問之。 對曰: "近世論山水禍福之說, 大抵以方位山水之美惡, 爲子孫之禍福。 臣謂《洪範》一篇, 聖人傳道之書也, 而雨暘燠寒風爲肅睿哲謀聖之應。 此但論其理如此耳, 若一一配而合之, 則臣未知其可也。 況山水之說昉於後漢諸儒, 臣以謂不可信。 且世之遷葬, 求獲福也, 王者更有何望哉? 然此大事, 在聖心英斷耳, 非臣之所敢臆議。" 世祖曰: "卿言是矣。 吾復無意於遷陵也。" 秋帶世子左副賓客, 冬遷漢城府尹, 移戶曹判書。 庚寅拜議政府右參贊。 上之卽位三年辛卯, 賜純誠明亮佐理功臣號, 封達城君。 冬除平安道觀察使, 申叔舟等啓典文衡者不宜出于外, 從之。 壬辰遷司憲府大司憲。 故事, 凡臺諫啓事者, 因承旨傳語, 中官轉達于上, 其間言語或有漏誤之患。 居正請用箚子, 凡所言皆得書啓, 下情畢達, 皆以爲便。 乙未議政府左參贊。 丙申郞中行人奉使來, 居正爲遠接使。 詞林大手, 自鴨江至王都, 道途山川之景, 輒形賦詠。 居正卽席趁韻和之, 揮翰如流, 遇强韻和至十餘篇, 愈出愈奇, 兩使不覺屈膝。 《大平館賦》, 居正次其韻酬之, 歎曰: "賦, 古未有次韻者, 是又人所難能也。 如公之才, 求之中朝, 不過二三人耳。" 陞右贊成。 丁酉以事遞職, 旋封達城君, 戊戌帶弘文館大提學。 上視學, 諸儒問難, 居正啓曰: "古昔帝王之治, 皆本於心。 之精一執中, 商湯周武之建中建極, 皆此心也。 是以蔡沈《書》曰: ‘二帝三王存此心而存, 夏桀商紂亡此心而亡。’ 願殿下終始一心。" 上嘉納之, 俄除漢城府判尹。 己亥移吏曹判書, 建議依朝擧子脫麻故事, 立文科館、漢城、鄕試中七擧者敍用之法, 又獻議設明經科。 辛丑移兵曹判書, 癸卯拜議政府左贊成。 戊申翰林侍講蕫越、工科右給事中王敞奉使來, 見居正尊禮待之, 每論話必拱手起立。 及遊觀望遠亭, 兩使謂居正曰: "公斯文老先生, 今日煩公勞動。" 崔溥嘗奉命往濟州, 遭風飄泊浙江, 帝命遣還。 中原文士見者, 必問居正安否。 至是卒, 年六十九。 諡文忠, 博聞多見 ‘文, 事君盡節 ‘忠。’ 嫡無子, 有孽子福慶居正溫良簡正, 博涉群書, 兼通風水星命之學, 不喜釋氏書。 爲文章不落古人科臼, 自成一家。 有《四佳集》三十卷行于世。 若《東國通鑑》《輿地勝覽》《歷代年表》《東人詩話》《大平閑話》《筆苑雜記》《東人詩文》, 皆所撰集。 構亭于中園, 鑿池種蓮, 號亭亭亭, 左右圖書澹如也。 居正爲一時斯文宗匠, 爲文章尤長於詩。 篤意著述, 至老不懈, 或有譏之者, 居正曰: "是我膏肓, 不可醫也。 在朝廷最爲先進, 而名望後己者, 往往躐躋台席, 居正不無偏心焉。 命居正與後生輩, 同製詩文以進, 如此者非一再矣, 居正不平曰: "予雖不材, 主盟斯文三十餘年, 甘心與黃吻小生, 較其才耶?" 朝廷於此失體。 居正器狹, 無容人之量, 又未嘗奬進後生, 世以此少之。


  • 【태백산사고본】 34책 223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424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