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 채수 등이 동반직 서용과 폐비 윤씨의 일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대전(大典)》 내에는 난신(亂臣)에 연좌된 자를 동반에 서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제 동반에 서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난적(亂賊)은 큰 악(惡)이기에 중국 조정에서는 삼족(三族)을 멸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것은 대개 당여(黨與)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번쾌(樊噲)670) 는 한(漢)나라를 세움에 공(功)이 있었지마는, 고제(高帝)가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에게 명령하여 군중(軍中)에서 참(斬)한 것에 대하여, 송(宋)나라의 소순(蘇洵)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제(高帝)가, 만세(萬世)의 뒤에 여후(呂后)671) 가 변(變)을 일으키면 번쾌는 그의 친속(親屬)이기 때문에 여러 장수들이 그를 제어(制御)하지 못할 것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제가 먼저 〈여후의〉 우익(羽翼)을 제거하여서 후세에 있을 변을 막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번쾌가 고제와 가장 친하였으니, 어찌 여산(呂産)·여녹(呂祿)의 반란에 참여하겠는가 하고 의심하지만, 소순은 말하기를, ‘뉘라서 백세(百世)의 뒤에 개 잡는 백정에 파묻혀 지내던 사람으로 그 친속이 제왕까지 된 것을 보고 흔연(欣然)하게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통론(通論)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난적(亂賊)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끝까지 그 무리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만일 〈난적에〉 연좌된 자 가운데 왕도(王導)672) 와 이최(李璀)673) 같이 현능(賢能)한 이가 있어서 국가의 경중(輕重)에 관계된다면 부득이 서용하여야 하겠습니다만, 지금 어찌 그만한 자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면서 묻기를,
"내가 《대전》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대전》이 반포되기 전에 이미 동반에 서용되었던 자를 허용(許用)하려는 것이다."
하자,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가 대답하기를,
"지난 병자년674) 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었을 적에 세조께서 사신(使臣)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접견(接見)하려고 하면서 그 곳의 장소가 좁기 때문에 그 의장(儀仗)을 줄이고 아울러 운검(雲劍)675) 을 물리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승(成勝)과 박정(朴靖)이 운검으로서 입시(入侍)하고자 하므로, 신이 그들을 불러서 중지시켰고, 〈세조께서도〉 입시를 그만두라는 뜻으로 유시하였었습니다. 그 뒤에 〈성승 등의 음모(陰謀)한〉 일676) 이 발각되었으니, 그날이 바로 그들이 일을 거행하려던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난적의 무리를 동반에 서용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좌된 자로서 동반에 서용되면, 그들이 은덕에 보답하려는 충성은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 될 것이다."
하니, 채수(蔡壽)가 말하기를,
"비록 연좌된 자가 아니라도 조정에서는 신하는 누군들 성상의 은덕에 보답하려고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한명회가 다시 아뢰기를,
"심자라로(沈者羅老)는 본래 우리 나라와는 원수 될 혐의가 없었습니다만, 다만 근일에 그의 아들을 죽였으니 그가 반드시 보복할 생각을 품을 것입니다. 청컨대 성 아래에 있는 야인(野人)들을 모집하여 중한 상으로 달래어서 그 정세(情勢)를 가서 살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可)하다."
하였다. 한명회가 다시 아뢰기를,
"영안도(永安道) 성밑에 사는 야인들 가운데 몰래 본토(本土)로 돌아가는 자가 자못 많은 듯합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도로가 매우 평탄하여 왕래하는 데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성밑에 사는 야인들을 내지(內地)에 옮겨 두어서 우리 백성들과 섞여 살게 하기를 요동(遼東)의 동녕위(東寧衛)와 같게 하여, 길이 멀어져서 가고 오는 데 장애가 있게 하면, 이러한 폐단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오랑캐들을 섞여 살게 함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환난(患難)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이니, 우리 백성들과 섞여 살게 하면서 교화시켜 편안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랑캐들은 오직 이익만을 구하므로, 과연 교화시켜 편안하게 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죄를 지어 외방에 있었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도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생각한 것이 있어도 감히 상달(上達)하지 못하였습니다.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지은 죄악이 매우 크므로 폐비하여 마땅합니다만, 그러나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이니, 이제 무람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떨어진 장막을 버리지 아니함은 말[馬]을 묻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사용하던 물건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감히 무람없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至尊)을 위해서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한 처소를 장만하여 주고 관(官)에서 공급(供給)을 하여 줌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였겠는가?"
하자, 채수가 아뢰기를,
"윤씨(尹氏)의 죄를 정할 때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이창신(李昌臣)과 더불어 궁내에서 나온 언문(諺文)을 번역하여 그의 죄악상(罪惡狀)을 길이 후세에까지 보이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윤씨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지존(至尊)의 배필(配匹)로서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인데, 이제 폐위되어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람없는 듯하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누구라도 애처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 공급되는 것이 또한 어찌 넉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처음 폐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따로 처소를 정하여 공봉(供奉)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하니, 한명회는 말하기를,
"신 등은 전일에는 이러한 뜻을 아뢰었습니다. 대저 지존께서 쓰시던 것은 아무리 미소(微小)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두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찍이 국모가 되었던 분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윤씨의 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당초에 그의 시비(侍婢)를 치죄(治罪)하였을 적에 내 마음에는 폐비를 하고자 하였지마는, 대신(大臣)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참아서 중지하고 그가 허물 고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오히려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내가 삼전(三殿)677) 에 품지(稟旨)하여 위로는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폐출(廢黜)시켜서 외처로 내보낸 것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이 있어서 그러하였겠느냐? 옛적에는 참소(譖訴) 때문에 폐비를 한 것이 있으니, 여희(驪姬)678) 가 야반(夜半)에 운 것과 같은 일이 이것이다. 나도 전고(前古)의 일을 약간 알고 있으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만일 국모(國母)로서의 행동이 있었던들 마땅히 국모로서 대우하였을 것이다.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는데,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이 어찌 무람없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다름이 아니라 원자(元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가 아뢰기를,
"윤씨의 죄악을 뉘라서 통한(痛恨)하지 않겠습니까만, 인신(人臣)으로서 다만 생각한 것을 다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어찌 후일을 위한 계획이 있겠습니까?"
하고, 채수가 말하기를,
"신이 만일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윤씨의 죄악을 기록하여 후세에까지 전하기를 청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성상을 시좌(侍坐)하는 자 가운데 한명회가 가장 나이 많고 신이 홀로 나이가 젊었는데도 이제 벌써 34세입니다. 그런데 어찌 성명(聖明)의 조정이 지나기를 기약하고 또 원자(元子)의 세상을 기약하였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마음이 있었다면 이는 무상(無狀)한 소인(小人)이나 할 바인데, 어찌 감히 하루라도 성조(聖朝)에 서겠습니까?"
하였으며, 검토관(檢討官) 안윤손(安潤孫)이 아뢰기를,
"신 등이 진실로 윤씨의 죄악을 알고 있습니다만, 다만 그의 거처하는 바가 무람없기 때문이지 어찌 이러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고, 시강관(侍講官) 이명숭(李命崇)이 아뢰기를,
"윤씨의 흉역(凶逆)함을 외간(外間)에서는 비록 다 알지 못하나, 신 등은 자세히 아는 터이니, 어찌 감히 후일의 계획을 위하여 이러한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만일 원자(元子)를 위하여서가 아니라면 어찌해서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사람을 위하여 말하는가? 근일에 문절(文節)과 백영번(白英蕃)이 또한 상서(上書)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본래 높은 벼슬을 하는 자가 아니므로,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말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문책(問責)하고자 하나, 이미 구언(求言)679) 을 한 터여서 그들을 죄줄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경들이 또 말하고 있으니, 이는 곧 사람들이 다 윤씨(尹氏)만을 위하고 나를 위함은 아니다."
하였다. 권경우가 말하기를,
"신 등이 어찌 윤씨를 위하여 말하겠습니까? 전일 한명회가 중국 북경에 갔을 적에 예부 낭중(禮部郞中) 또한 말하기를, ‘비록 폐비를 시켰지만 사제(私第)에 살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으로는, 여염집에 거처하게 하는 것는 중국 조정에서도 그르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예부 낭중이 어찌 감히 조선(朝鮮)의 공사(公事)를 한다는 말인가? 중국 조정에서 이를 마땅치 못하게 여겼다면 어떻게 주청한 것을 인준했겠는가?"
하였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신이 중국 북경에 갔을 적에 황제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폐위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불순(不順)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다시 묻기를, ‘불순한 일이란 무엇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위로 조비(祖妃)680) 가 있고 또 모비(母妃)681) 가 있는데, 〈윤씨는〉 전하에게만 불순한 것이 아니라 조비와 모비에게도 불순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다시 한 말씀 더 올리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다른 비(妃)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윤씨에게만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연한 일로서야 어찌 감히 아들이 있는 비를 폐위하였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야 황제가 다시 더 묻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씨가 나에게 곤욕을 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러한 말을 하였겠는가? 또한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砒礵)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乾柿]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婢僕)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나는 당 중종(唐中宗)682) 과 같이 됨을 거의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난번 삼대비전(三大妃殿)에 문안하였더니, 대비께서 말씀하기를, ‘이제 〈윤씨와〉 비록 거처를 달리하고 있으나 마음은 편하다.’고 하였다. 부모 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은데, 그대들의 마음만 유독 어찌 그러한가? 그대들의 말이 이러하니, 나를 당 중종(唐中宗)처럼 만들려는 것이냐? 또한 윤씨는 내가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683) 이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부도(不道)함이 이런 유(類)인데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다. 이제 내 나이 젊으나 사람의 장수(長壽)와 요사(夭死)는 알기 어려우니, 만일 일찍이 계책을 도모하지 아니한다면 한(漢)나라 여후(呂后)나 당(唐)나라 측천 무후(則天武后)684) 같은 화(禍)가 없겠는가? 그러니 후일의 화를 미리 헤아릴 수는 없다. 공자(孔子)가 아내를 내쫓았는데, 그가 죽자 이(鯉)685) 가 통곡하였는데, 공자가 그르게 여겼다. 원자(元子)도 효자(孝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감히 어미로 여기겠느냐? 비록 나의 백세(百歲) 뒤에라도 저를 어찌 감히 내가 거처하던 집에 살게 하겠는가?"
하였다. 채수가 말하기를,
"쫓겨난 어미라면 범인(凡人)들도 오히려 어미로 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원자이겠습니까? 다만 신 등은 특별한 처소에다 높이 받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 금(金)나라의 임금 양(亮)은 천하의 폭군(暴君)이었습니다. 금나라의 임금 옹(雍)이 즉위하였을 적에 양은 실지로 원수의 사람이었지마는, 양의 후비(后妃)인 도단씨(徒單氏)에 대하여는 또한 배고프고 헐벗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근자에도 이영(李瓔)686) 과 이준(李浚)687) 은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국가에서 외방에 추방을 하였지마는, 또한 그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윤씨도 유폐(幽閉)시키되 옷과 음식은 공급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어떻게 윤씨가 가난한 줄을 아느냐? 누가 말하여 주었는가?"
하자, 채수가 말하기를,
"윤씨의 집은 본래부터 가난합니다."
하였다. 안윤손이 말하기를,
"금년은 사람들이 모두 먹을 것이 모자랍니다. 윤씨도 어찌 가난하여 궁핍함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권경우가 말하기를,
"신이 요사이 들으니 도적이 〈윤씨의〉 집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만일 비상(非常)한 변괴(變怪)가 있게 되면 대체(大體)에 어그러질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이미 도적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잡게 되면 마땅히 그 죄를 다스리겠다. 그런데 어떻게 집집마다 따로 엄금(嚴禁)을 베풀겠는가? 그리고 윤씨가 도둑맞은 일이 또한 어찌 국가에 관계되기에 그렇게 말하는가? 예전에 비연(飛燕)688) 은 시역(弑逆)한 죄가 나타나지 아니하였지마는, 사람들은 모두 성제(成帝)가 일찍이 일을 도모하지 아니한 것을 허물하였다. 윤씨의 죄악에 대하여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단죄(斷罪)해야 하겠지마는, 내가 참고 그를 단죄하지 않았으니, 그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공봉(供奉)하고자 함은 어째서인가? 그대들이 만일 그 가난하고 헐벗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대들의 녹봉(祿俸)으로써 공급하지 않는가? 윤씨가 궁(宮)에 있을 때에 항상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여 호부(豪富)함을 자랑하였으니, 어찌 굶주리고 헐벗는 데에 이르렀겠느냐? 그대들은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李氏)의 신하인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는 반드시 윤씨의 오라비 등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붕반(朋伴)을 인연하여 서로 퍼뜨려서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채수가 말하기를,
"신은 본래부터 윤씨의 오라비 등과는 친하게 사귀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조행(朝行)하는 사이에 얼굴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그의 말을 듣고서 아뢰는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여염에 거처하는 터이니, 족친(族親)이라도 혹 출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권경우가 말하기를,
"형제라도 그 처소에 출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족친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족친들을 그의 처소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어찌 받들어 행하지는 아니하고서 출입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출입한 자는 누구인가? 내가 장차 추국하겠다."
하였다. 채수가 말하기를,
"신은 그 족속(族屬)이 아닌데, 어떻게 그를 친히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에 들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르기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통한(痛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통한하였다는 자들을 낱낱이 말하겠는가? 내가 장차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간(臺諫)들을 불러서 물어보겠다. 그렇게 통한하였다는 자들이 과연 누구누구인가?"
하자, 이극기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이미 죄를 결정하였으니, 누가 다시 의논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말하기를,
"윤씨의 오라비들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도록 하라. 그리고 의정부·육조·대간들을 불러서 내가 장차 물어보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14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367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재정-국용(國用)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가족-친족(親族) / 윤리-강상(綱常) / 어문학-어학(語學) / 역사-고사(故事)
- [註 670]번쾌(樊噲) : 한(漢)나라의 군인·정치가. 고조(高祖)를 도와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우고, 또 홍문(鴻門)의 회합(會合)에서 고조를 구출하였으며,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좌승상(左丞相)에 이르고 무양후(舞陽侯)로 봉해졌음.
- [註 671]
여후(呂后)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황후. 고조가 죽은 뒤에 여주(女主)로 집권하여 여씨(呂氏) 일족을 왕으로 봉하였고, 유씨(劉氏)의 한나라를 위태롭게 한, 여씨의 난을 일으켰음.- [註 672]
왕도(王導) : 진(晉)나라 사람.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아 재상(宰相)에 올랐고, 뒤에 유조(遺詔)를 받아 명제(明帝)·성제(成帝)를 도와 태부(太傅)가 되었음.- [註 673]
이최(李璀) : 당(唐)나라 사람.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서 포위된 것을 부친인 이회광(李懷光)이 풀어주어, 이최를 감찰 어사(監察御使)로 삼아 총애하였으나, 이회광이 반란할 것을 황제에게 고한 후, 자신도 두 아우를 죽인 후 자살하였음.- [註 674]
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675]
운검(雲劍) : 운검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임금이 임어할 때 유능한 무장(武裝)이나 믿는 사람을 골라 임명함.- [註 676]
〈성승 등의 음모(陰謀)한〉 일 :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양위(讓位)하자, 이듬해인 세조 2년(1456)에 성삼문(成三問) 등이 상왕(上王)의 복위(復位)를 꾀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날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던 일을 가리킴.- [註 677]
삼전(三殿) : 세조비·덕종비·예종비.- [註 678]
여희(驪姬) : 춘추 시대(春秋時代) 여융(驪戎)의 딸로,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여융을 정벌한 후 폐비(嬖妃)로 삼았음. 그는 자신의 아들 해제(奚齊)를 태자(太子)로 세우고자, 당시의 태자였던 신생(申生)을 참소하여 죽게 하고, 두 공자(公子)도 축출하였다. 그러나 헌공이 죽자 대부(大夫) 이극(里克)이 해제와 그 동생 탁자(卓子)를 죽이고, 여희도 죽음을 당하였음.- [註 679]
구언(求言) : 국정(國政)에 대하여 신하나 사림(士林)들의 직언(直言)을 구하는 것.- [註 680]
조비(祖妃) : 세조비 정희 왕후(貞熹王后).- [註 681]
모비(母妃) : 덕종비 소혜 왕후(昭惠王后).- [註 682]
당 중종(唐中宗) : 고종(高宗)의 아들로, 왕후인 위후(韋后)의 음란하고 방자함을 방치하였다가 뒤에 위후에게 도리어 시해(弑害)당하였음.- [註 683]
소장(素帳) : 장사지내기 전에 궤에 치는 흰 포장.- [註 684]
측천 무후(則天武后) : 당(唐)나라 고종(高宗)의 황후. 고종이 죽은 후에 당 황실(唐皇室)의 자손을 쫓아 내어 죽이고, 자신이 여주(女主)가 되어 신성 황제(神聖皇帝)라 일컬었으며, 국호(國號)도 당(唐)을 없애고 주(周)라 하였으나, 후에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하여 폐위되었음.- [註 685]
이(鯉) : 공자의 아들.- [註 686]
이영(李瓔) : 세종의 첫째 서자 화의군(和義君). 세조 3년(1457) 순흥(順興)에 귀양간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賜死)된 사건이 일어나자, 무고로 이에 연루되어 익산(益山)에 유배되어서 죽었음.- [註 687]
이준(李浚) : 종실(宗室)인 귀성군(龜城君). 일찍이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고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려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1470년에 어린 성종이 즉위하여 귀성군이 물망에 오르게 되자, 한계미(韓繼美)가 밀고하고 정인지(鄭麟趾) 등이 탄핵하여, 영해(寧海)에 구치(拘置)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음.- [註 688]
비연(飛燕) :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인 조비연(趙飛燕). 태생이 미천하나 가무(歌舞)에 뛰어난 절세 미인으로서, 여동생 합덕(合德)과 함께 후궁(後宮)이 되어 임금의 총애를 서로 다투었음. 성제가 죽은 후 합덕은 자살하였으며, 조비연도 평제(平帝) 때에 서민(庶民)으로 내침을 받고 자살하였음.○御經筵。 講訖, 大司憲蔡壽啓曰: "《大典》內亂臣緣坐, 不敍東班, 今命敍於東班。 亂賊大惡, 中朝至夷三族, 蓋以黨與, 不可不去也。 昔樊噲有功於漢, 而高帝命平、勃, 卽軍中斬之, 宋 蘇洵論曰: ‘此乃帝見萬世之後。 呂后有變, 噲以親屬, 爲諸將所不能制, 故帝力先除羽翼, 以防後世之變。’ 或疑噲於高帝最親。 豈與産、祿叛, 洵曰: ‘誰謂百世之後, 椎埋狗屠之人, 見其親屬得爲帝王, 不欣然從之耶?’ 此通論也。 故治亂賊者, 必須窮治其黨。 若於緣坐中, 如王導、李璀之賢, 係國家輕重者, 則不得已而用之, 今豈有如此者乎?" 上顧問左右曰: "予非毁《大典》也。 《大典》未頒前, 已敍東班者, 許用之爾。"領事韓明澮對曰: "曩在丙子, 臣爲承旨, 世祖欲接使臣於宣政殿, 因地窄, 減其儀仗, 竝除雲劍有成勝、朴靖者, 以雲劍欲入侍, 臣招呼止之, 諭以除入侍之旨。 厥後事覺, 其日乃擧事之日也。 然則亂賊之黨, 不宜敍於東班。" 上曰: "緣坐者得敍東班, 則其欲報德之忠, 必倍於他人矣。" 蔡壽曰: "雖非緣坐者, 立朝之臣, 孰不欲報聖恩乎?" 上不答。 明澮又啓曰: "沈者羅老本與我國無讎嫌, 但以近日殺其子, 必懷報復。 請募城底野人, 誘以重賞, 往察其情。" 上曰: "可。" 明澮又啓曰: "永安道城底野人, 潛還本土者頗多。 此無他, 道路甚易, 往來無阻故也。 臣謂城底野人, 移置內地, 使吾民雜處, 如遼東之於東寧衛, 道路遙遠, 往來有礙, 則庶無此弊矣。" 蔡壽曰: "戎(秋)〔狄〕 雜處, 古今爲患。 人面獸心, 不可與吾民雜處, 而化懷之也。" 上曰: "戎狄惟利是求, 果難以化懷也。" 侍讀官權景祐啓曰: "臣前日被罪在外, 及還朝, 又不與侍從之列, 雖有所懷, 未敢上達。 廢妃尹氏, 罪惡貫盈, 廢之宜也, 然旣爲國母, 今乃褻處閭閻之間, 一國臣民, 莫不痛心。 古人云: ‘敝帷不棄, 爲埋馬也。’ 人君服御之物, 雖車馬, 不敢褻處, 爲至尊也。 臣意以爲 ‘別置一處, 官爲供給, 似可也。’" 上問左右曰: "何如?" 蔡壽啓曰: "尹氏定罪之時, 臣爲承旨, 請與李昌臣翻譯內出諺文, 使其罪惡, 永示後世。 臣固知尹氏罪惡, 然旣配至尊爲國母, 而今廢居閭閻, 似褻慢, 一國臣民, 孰不痛惜? 且今年荒, 朝夕所給, 亦豈有餘? 臣當初廢之時, 亦請別處供奉。" 明澮曰: "臣等前日, 亦以此意啓達。 大抵至尊所御, 雖微不可外處, 況曾爲國母乎?" 上厲聲曰: "尹氏之罪, 不可盡言。 當初侍婢治罪之時, 意欲廢之, 以大臣之言, 含忍而止, 以俟改過。 猶不悛改, 予乃稟旨三殿, 上告宗廟, 下議大臣, 廢黜于外。 予豈有私怒哉? 古有用譖而廢之者, 如驪姬夜半之泣是也。 予亦稍知前古之事, 其敢有一毫之私耶? 若有國母之行, 當待以國母。 旣爲庶人矣, 其處閭閻, 何爲褻慢耶? 卿等何以國母爲言哉? 此無他, 欲阿媚元子, 爲後日之地也。" 同知事李克基啓曰: "尹氏罪惡, 孰不痛恨, 人臣但盡所懷耳。 安有後日之計乎?" 蔡壽曰: "臣若有是心, 則何敢請書尹氏罪惡, 使傳於後乎? 且今侍坐者, 明澮最老, 臣獨年少, 而今已三十有四矣。 豈期過聖明之朝, 而又期元子之世乎? 若有是心, 是無狀小人之所爲, 安敢一日立於聖朝乎?" 檢討官安潤孫啓曰: "臣等固知尹氏罪惡, 但以所處爲褻耳, 豈有是心乎?" 侍講官李命崇啓曰: "尹氏凶逆, 外間雖未悉知, 臣等詳知之, 安敢爲後日之計, 而爲此言乎?" 上曰: "卿等若不爲元子, 則何以得罪君父之人爲言乎? 近日文節、白英蕃, 亦上書言之。 此人素非顯仕者, 必有所以言之。 故予欲問之, 然旣求言, 不可罪之, 故置之。 今卿等又言之, 是則人皆爲尹氏, 而不有我也。" 景祐曰: "臣等豈爲尹氏而言乎? 前日韓明澮赴京時, 禮部郞中亦曰: ‘雖廢之, 不可處於私第。’ 臣意以爲 ‘處於閭閻, 中朝亦非之也。’" 上曰: "禮部郞中, 安敢爲朝鮮公事乎? 中朝若以爲非, 則何以準請乎?" 明澮曰: "臣赴京時, 帝問: ‘何以廢之?’ 臣曰: ‘有不順之事。’ 帝又問: ‘不順之事何歟?’ 臣曰: ‘我殿下上有祖妃, 又有母妃, 非徒不順於殿下, 亦不順於祖、母妃矣。’ 且臣又啓一言: ‘我殿下於他妃無子, 但於尹氏有子。 若偶爾, 則安敢廢有子之妃乎?’ 然後帝不復問。" 上曰: "尹氏辱我之事, 難以盡言。 至指我而言: ‘幷其足跡而去之。’ 以予爲何人, 而爲此言乎? 又於所佩小囊, 常持砒礵, 又於乾柿, 雜以砒礵, 藏之箱中, 其欲何用? 若不用於婢僕, 則必於我矣, 宗社其有寧乎? 予幾不免爲唐 中宗矣。(曰)〔日〕 者問安于三大妃殿, 大妃敎曰: ‘今雖異處, 心則安矣。’ 父母之心如此, 爾等之心, 獨何如? 爾等言之至此, 欲使我爲中宗耶? 且尹氏指予所處之帳曰: ‘素帳。’ 其爲不道類此, 其得保首領幸矣。 今予年少, 然人之壽夭難知, 若不早圖, 其無漢 呂后、唐 則天之禍乎? 後日之禍, 未可量也。 孔子有黜妻, 及其死也, 鯉哭之, 孔子非之。 元子若不爲孝子則已, 欲爲孝子, 則安敢以爲母乎? 雖予百歲之後, 彼安敢處於吾所處之室乎?" 蔡壽曰: "黜母, 凡人尙不得以爲母, 況元子乎? 但臣等非欲別處尊奉。 昔金主亮, 天下之暴主。 金主雍卽位, 亮實是讎人, 而其后徒單氏, 亦不使飢寒。 近瓔與浚, 罪關宗社, 國家旣放于外, 亦致衣食之資。 今尹氏宜幽閉, 而給衣食也。" 上曰: "卿等何以知尹氏之貧乏乎? 其誰言之乎?" 壽曰: "尹氏之家素貧矣。" 潤孫曰: "今年人皆乏食。 尹氏亦豈無貧乏乎?" 景祐曰: "臣比聞, 盜入其家, 若有非常之變, 恐虧大體。" 上曰: "國家旣有捕盜之令, 捕之則當治其罪矣。 安得家家, 而別設禁乎? 尹氏被盜之事, 又何與於國家, 而乃言之耶? 昔飛燕弑逆之罪未著, 皆咎成帝不早圖。 尹氏罪惡, 宜斷以大義, 予含忍不斷, 其得保首領幸矣。 又欲供奉何也? 爾等若憐其貧寒, 何不以汝祿俸而給之乎? 尹氏在宮之時, 常言不貧, 誇以豪富, 豈至飢寒哉? 爾等以經筵官, 可知予意, 而言之如此, 爾等其尹氏之臣歟, 李氏之臣歟? 予不知也。 此必尹氏之娚不肖輩, 因緣朋伴, 轉相說之耳。" 蔡壽曰: "臣素不與尹氏之娚等交親。 但於朝行間見面耳, 豈聞其言而啓之乎? 況今處閭閻之間, 族親或有出入, 則亦未安也。 景祐曰: "同生猶不可出入, 況族親乎?" 上曰: "已令族親, 毋得出入, 何不奉行, 而乃言不可出入乎? 且其出入者誰耶? 予將鞫之。" 蔡壽曰: "臣不是族屬, 豈得親見? 但人所共言, 故聞之耳。" 上曰: "爾云: ‘一國臣民, 莫不痛恨。’ 其痛恨者, 可一一言之乎? 予將召政府、六曹、臺諫而問之。 其痛恨者, 果某某歟?" 克基曰: "國家業已定罪, 誰更議爲?" 上謂左承旨李世佐曰: "尹氏娚等, 囚於義禁府。 且召政府、六曹、臺諫, 予將問之。"
- 【태백산사고본】 21책 14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367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재정-국용(國用)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가족-친족(親族) / 윤리-강상(綱常) / 어문학-어학(語學) / 역사-고사(故事)
- [註 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