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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33권, 성종 12년 9월 19일 경인 2번째기사 1481년 명 성화(成化) 17년

상산군 황효원의 졸기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황효원의 자(字)는 자영(子永)으로 상주인(尙州人)인데, 증 좌찬성(贈左贊成) 황사간(黃士幹)의 아들이다. 정통(正統)갑자년714) 에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빈 주부(禮賓主簿)를 제수받고, 여러 번 승진되어 예조 좌랑(禮曹佐郞)·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예조 정랑(禮曹正郞)·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경태(景泰)계유년715) 에 겸 의정부 검상(兼議政府檢詳)이 되었는데, 곧 사인(舍人)으로 승직(陞職)되었다. 을해년716) 에 사복시 윤(司僕寺尹)으로 승직되었는데, 곧 세조(世祖)가 즉위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고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내렸다. 천순(天順)정축년717)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되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무인년718) 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받았는데, 곧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기묘년719) 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체대(遞代)되었다가, 또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 경진년720) 에 체대되어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고, 성화(成化)정해년721)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상산군(商山君)에 초배(超拜)되었다. 기축년722) 에는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었다. 신묘년723)금상(今上)724) 이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숭정 대부(崇政大夫) 상산군(商山君)으로 승계시켰다. 신축년725)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승계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8세 였다. 시호를 양평(襄平)이라 하였는데, 일이 있어서 공(功)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은혜롭기는 하나 안으로 덕(德)이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황효원은 민첩한데다가 이간(吏幹)이 있어서 두 번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그의 유능(有能)함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매우 혹독해서 수령(守令)을 종과 같이 여겼으며, 집안일을 처결하는 데 법도(法度)가 없어서 처첩(妻妾)이 뒤바뀌는 등 죽을 때까지 소송(訴訟)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또 종으로 하여금 직접 집을 사서 고쳐 가지고 팔게 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기를 좋아하니, 그때의 사람들이 ‘화가옹(貨家翁)’이라고 불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3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5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商山君 黃孝源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孝源, 字子永, 尙州人, 贈左贊成士幹之子也。 正統甲子, 中文科第一人, 授禮賓主簿, 累遷禮曹佐郞、司諫院左獻納、禮曹ㆍ吏曹正郞。 景泰癸酉, 兼議政府檢詳, 俄陞舍人。 乙亥, 陞司僕寺尹, 世祖卽位, 超拜吏曹參議, 賜推忠佐翼功臣號。 天順丁丑, 陞嘉善, 封商山君。 戊寅, 拜司憲府大司憲, 尋移刑曹參判, 出爲忠淸道觀察使。 己卯, 遞爲禮曹參判, 又出爲京畿觀察使。 庚辰, 遞拜漢城府尹, 成化丁亥, 超授正憲商山君。 己丑, 拜議政府右參贊, 辛卯, 上賜純誠佐理功臣號, 進階崇政商山君。 辛丑, 陞崇祿, 至是卒, 年六十八。 贈諡襄平因事有功: ‘襄;’ 惠無內德: ‘平。’

【史臣曰: "孝源, 敏捷有吏幹, 再爲觀察使, 人稱其能。 然性苛刻, 視守令如奴隷, 處家無法, 更互妻妾, 終其身訴訟不已。 又好以賤直買人家, 改構而賣之, 以取利, 時號貨家翁。"】


  • 【태백산사고본】 20책 13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5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