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11권, 성종 2년 8월 28일 무진 5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수성군 최유림의 졸기
수성군(隋城君) 최유림(崔有臨)이 졸(卒)하니,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최유림은 수원(水原)사람으로, 경태(景泰) 경오년597) 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역임하였고, 성화(成化) 을유년598) 에 〈외방으로〉 나가서 전라도 처치사(全羅道處置使)가 되었고, 정해년599) 에 비장(裨將)으로서 이시애(李施愛)를 정벌하는 데 종군(從軍)하여 공(功)이 있었으므로,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올려서 수성군(隋城君)에 봉(封)해졌고, 그 해 겨울에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기축년600) 에 수성군(隋城君)으로 바꾸어 봉(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며, 나이가 46세이다. 시호를 안양(安襄)이라고 하였는데, 화목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하고 갑주(甲胄)601) 에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한다. 최유림은 남의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권귀(權貴)를 아첨하여 섬기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루(鄙陋)하게 여겼다. 아들은 최윤신(崔潤身)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8책 595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