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전에 나아가서 비로소 의식과 같이 정사를 보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비로소 의식과 같이 정사를 보았다. 그 의식은 이러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이 북을 쳐서 세 번 소리를 울리면 산선(繖扇)이 형명(形名) 앞에 선다. 입직(入直)한 병조(兵曹)·도총관(都摠管)·위장(衛將)·부장(部將)·도총부 낭관(都摠府郞官)이 전(殿) 안에 들어와서 동서(東西)로 나누고,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은 계단 위에서 동서로 나누어 각각 흰옷을 입고 칼을 차고 선다. 군사는 뜰 밑에서 동서로 나누어 병기와 옷을 갖추고 상시(常時)와 같이 시위한다. 승지·주서(注書)·사관(史官)·전의(典儀) 두 사람이 서합(西閤)을 거쳐서 먼저 뜰에 들어와 겹줄로 서서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기를 마친다. 승지들은 전내(殿內)에 나아가서 전영(前楹) 한가운데에 당하여 북향하여서 부복하고, 주서와 사관은 전함(前檻) 밖에서 북향하여 부복한다. 의정부·이조·호조·예조·사헌부·한성부·사간원의 계사관(啓事官) 등은 동합(東閤)으로, 종친부·충훈부(忠勳府)·의빈부(儀賓府)·중추부·병조·형조·공조의 계사관 등은 서합(西閤)으로 들어와서 전정(殿庭)의 동쪽과 서쪽의 배위(拜位)에 나아간다. 전의(典儀)·찬례(贊禮)·영의정 이하와 종친 이하가 사배(四拜)를 행하고 동쪽 계단과 서쪽 계단으로 올라서 전내(殿內)의 동쪽 자리와 서쪽 자리로 나아가 동서로 마주 향한다. 참의 등은 전영(前楹)에서 부복하고 승지들은 계사(啓事)를 마친다."
영의정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국전(國典)은 모름지기 일찍 정해서 여러 사람의 이목(耳目)을 하나로 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제 상정(詳定)을 마치지 못하여 육전(六典)을 반포하지 못하니, 빌건대 속히 상정하소서. 승문원은 사대(事大)·교린(交隣)의 문서를 오로지 맡고 있으므로, 익히는 바 한어(漢語)·이문(吏文) 등의 일은 그 벼슬에 오래 있지 아니하면 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부정자(副正字)에서 박사(博士)까지 있어 차례로 천전(遷轉)하고 특별히 구임(久任)하지 않았으며, 또 한어를 강하고 이문을 짓게 하여 그 재주가 정(精)하면 올리고, 그렇지 못하면 해가 비록 오래 되었을지라도 올려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권장하고 힘썼는데, 삼관(三館)252) 의 법이 한 번 폐지되자 바꾸어 나가고 번갈아 들어와서 사람이 오래 있을 계책이 없으니, 오로지 업을 익히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예전 법을 세우소서."
하니, 임금이 능성군 구치관(具致寬)을 돌아보며 물었다. 구치관이 아뢰기를,
"이문과 한어를 밝게 아는 자는 지금 단지 김환(金丸) 등 몇 사람뿐입니다. 만일 이들이 없으면 사대 문서(事大文書)를 아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이르기를,
"오늘 계달한 일을 여럿이 의논하여 아뢰라."
하고, 조회를 파하였다. 숭문당(崇文堂)으로 이어(移御)하여 한명회·구치관·권감 등을 불러 두 능(陵)과 봉선사(奉先寺)를 영조(營造)하는 일을 의논하고, 인하여 동부승지 이숭원(李崇元)에게 명하여 천릉소(遷陵所)에 가서 공역(功役)하는 모든 일을 살피게 하고, 겸하여 천릉 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등에게 선온(宣醞)을 하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8책 34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註 252]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의 세 기관을 말함. 문필(文筆)과 교육(敎育)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음.
○戊寅/上御宣政殿, 始視事如儀。 其儀曰:
宣傳官槌皷三聲, 繖扇立於形名前。 入直兵曹、都摠管、衛將、部將、都摠府郞官, 入殿內分東西, 內禁衛兼司僕於階上分東西, 各以白衣佩劍立。 軍士於庭下分東西, 具器服侍衛如常。 承旨、注書、史官、典儀二人, 由西閤先入庭, 重行北面四拜訖。 承旨等就殿內, 前楹當中北向俯伏, 注書、史官於前檻外北向俯伏。 議政府、吏ㆍ戶ㆍ禮曹、司憲府、漢城府、司諫院啓事官等, 由東閤, 宗親府、忠勳府、儀賓府、中樞府、兵ㆍ刑ㆍ工曹啓事官等, 由西閤而入, 就殿庭東西拜位。 典儀、贊禮、領議政以下及宗親以下行四拜, 由東西階, 就殿內東西位東西相向。 參議等, 於前楹俯伏, 承旨等啓事訖。
領議政韓明澮啓曰: "國典須當早定, 以一耳目, 今詳定未畢, 六典未頒, 乞速詳定。 承文院專掌事大交隣文書, 所習漢語、吏文等事, 非久於其職不能。 故古有副正字至博士, 次次遷轉, 不特久任, 且講漢語製吏文, 精於藝則陞, 否則年雖久而不調。 故人皆勸厲, 自三館之法一廢, 更出迭入, 人無久計, 全不鍊業。 請立舊法。" 上顧問綾城君 具致寬, 致寬啓曰: "曉解吏文、漢語者, 今但金丸等數人而已。 如無此輩, 事大文書無有知之者。" 上謂都承旨權瑊曰: "今日所啓之事, 僉議以啓。" 朝罷。 移御崇文堂, 召明澮、致寬、瑊等, 議兩陵、奉先寺營造事, 仍命同副承旨李崇元, 往遷陵所, 審察功役諸事, 兼賜遷陵都監提調等宣醞。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8책 34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