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誌文)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천순(川順) 원년1032) 세차(歲次) 정축에, 우리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전하(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께서 즉조(卽祚)하신 3년 9월 계해(癸亥)에 왕세자께서 질병으로 졸(卒)하시니, 나이 20이다. 석달을 지나 24일 갑신에 예(禮)를 갖추어 고양현(高陽縣) 봉현(蜂峴) 언덕에 장사하였다.
왕세자의 휘(諱)는 이장(李暲)이고 자(字)는 원명(原明)인데, 세종(世宗) 21년(1439) 무오 9월 15일 병신에 나시니, 이는 정통(正統) 3년이다. 옛 사례에 왕자의 부인으로서 장차 분만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대궐 밖 제택(第宅)1033) 으로 나갔는데, 자성 왕비(慈聖王妃)께서는 특히 양궁(兩宮)1034) 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세자를 금중(禁中)에서 낳으셨다. 체격이 준수(峻秀) 숙성(夙成)하고 용모 또한 단아(端雅)하여, 세종께서 친히 안아주시고 데리고 다니시는 등 다른 왕손(王孫)과 달리 하였다.
을축년1035) 춘정월에야 정의 대부(正義大夫)1036) 에 배명(拜命)되어 도원군(桃源君)에 봉(封)해졌고, 경태(景泰) 4년1037) 계유 정월에 승헌 대부(承憲大夫)1038) 로 진계(進階)되고, 4월에 입학하였다. 사유(師儒)를 존경하여 예(禮)로써 대하고, 겸허(謙虛)한 마음으로 업(業)을 받으니, 종실(宗室) 자제(子弟)로 비록 노성(老成)한 자라 할지라도 감히 바라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정난(靖難)하신 공훈으로 인하여 계급을 뛰어 흥록 대부(興祿大夫)1039) 에 제배(除拜)되었다.
을해년1040) 윤6월 을묘에 전하께서 즉위하시니, 군신들이 일찍 세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도록 청하였다. 이에 날을 택하여 의식을 갖추어서 왕세자로 책봉(冊封)하고, 사신을 중국 조정에 보내어 책명(冊命)을 청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유시(諭示)하기를, ‘왕은 충효로써 가르쳐 국민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도록 하오’. 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들어가 책명(冊命)을 받고 나서 즉시 왕비께 조현(朝見)하고, 물러나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는데 시종 경건(敬虔)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이르기를, ‘우리 조선 만세의 복이라.’고 하였다. 전하께서 사부(師傅)·빈객(賓客)과 서연관을 선임하여 교양하는 법을 다하시고, 세자 또한 학업을 즐기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하루 세 번씩 서연관을 불러 강론하였다. 일찍이 《서경(書經)》을 읽다가 《순전(舜典)》 《기형주(璣衡註)》에 이르러 그 제도가 문자만으로는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즉시 서연관과 더불어 간의대(簡儀臺)에 올라가 혼천의(渾天儀)를 관찰하고, 《서경》에 실린 바와 더불어 참고하고 증험(證驗)하여 애체(礙滯)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글을 읽을 때에도 다 그러하였으니, 의심이 나면 반드시 묻고, 물으면 반드시 살피었다. 전하께서 일찍이 ‘병진(兵陣)은 우리 가업이니,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친히 황석공(黃石公)1041) 등의 서적을 주니, 성훈(聖訓)1042) 을 가슴속에 간직해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이 날로 진취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렀다. 전하께서 일찍이 제릉(齊陵)1043) 을 알현하고 인하여 대수(大蒐)1044) 를 하였는데, 세자에게 명하여 〈도성에〉 남아 지키게 하고 부절(符節)을 주어 일을 전결(專決)하게 하였더니, 일이 모두 합당하였다.
병자년1045) 여름에 명나라 전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전하에게 고명(誥命)을 주었고, 정축년1046) 여름에는 지금의 황제가 한림 수찬(翰林修撰) 진감(陳鑑) 등을 보내어 즉위 조서(卽位詔書)를 반포하였는데, 두 사신이 세자의 의관(儀觀)의 훌륭함과 예법의 자상함을 보고 다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매일 닭이 울면 양궁(兩宮)을 찾아 침소를 문안하고 시선(視膳)하며 화열(和悅)에 찬 효도를 다하였고, 여러 숙부(叔父)를 공경히 섬기고, 형제간에는 신의 있는 우애를 행하였으며, 좌우의 사람에 대해서는 어질면서 위엄이 있었고, 사대부를 접대함에는 공손하면서 예절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방(非謗)하는 말이 없었다. 또 전하께서 일찍이 검약(儉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니, 무릇 여마(輿馬)·의복의 차림을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도록 힘쓰고 사치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원량(元良)1047) 으로서 덕을 극진히 갖추어 민심이 귀의(歸依)하는 바를 얻었던 것이다. 처음 병에 걸렸을 때 전하께서 몹시 근심하시어 즉시 구저(舊邸)로 피하게 하고 도사(禱祀)와 의약(醫藥)을 극진히 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이에 병이 조금 쾌유되자 전하께서 기뻐하여 무릇 좌우에서 시약(侍藥)1048) 한 자와 군사(軍士)로서 시위(侍衛)의 노고가 있는 자, 서사(庶士)로서 분주히 뛰어다닌 자는 모두 한 급(級)을 올리도록 하였다.
얼마되지 아니하여 병환이 다시 심하여 끝내 불휘(不諱)1049) 하게 되자, 전하와 왕비께서 크게 애도하여 철선(徹膳)하고 조회와 저자를 5일간 파하였다. 대신(大臣) 등이 누차 진선(進膳)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소복(素服)으로 30일을 마쳤다. 종친·백료(百僚)와 아래로는 항간의 백성까지도 비애하며 울면서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모두 이르기를, ‘신민의 복이 없도다. 우리 세자의 덕으로도 그 수(壽)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라고 한탄하였다. 염(斂)하던 날 백관이 회림(會臨)하였는데, 또한 흰옷으로 7일간의 복제(服制)를 마쳤으며, 궁료(宮僚)는 다 최복(衰服)을 입고 장례를 지낸 뒤에 벗었다. 시호(諡號)를 의경(懿敬)이라 하니, 영전(榮典)과 애전(哀典)1050) 은 유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빈(嬪) 한씨(韓氏)는 청주(淸州)의 세가(世家)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한영(韓寧)이니 정헌 대부 병조 판서(正憲大夫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황조(皇祖)의 휘(諱)는 한영정(韓永矴)이니,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의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으며, 황고(皇考)의 휘는 한확(韓確)이니 봉의 대부 광록시 소경(奉議大夫光祿寺少卿)에 선수(宣授)되었고, 수충 위사 협찬 정난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영경연사서원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經筵事西原府院君) 시호는 양절공(襄節公)이다. 공(公)이 자헌 대부 이조 판서 시 문량공(資憲大夫吏曹判書諡文良公) 홍여방(洪汝方)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이 분이 숙덕(淑德)1051) 을 낳았으며, 세자께서 도원군(祧源君)으로 있을 때 배필로 간택되어 시집온 뒤 양궁(兩宮)을 섬기는데 부도(婦道)가 매우 공순하니, 세자께서 책봉을 받게 되자 같은 날 빈(嬪)으로 책봉되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소훈(昭訓) 신씨(愼氏), 권씨(權氏), 윤씨(尹氏)도 역시 의관(衣冠)1052) 으로 번성한 집안으로서 궁중에 선택되어 들어왔는데, 모두 아들이 없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7책 23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註 1032]천순(川順) 원년 : 1457 세조 3년.
- [註 1033]
제택(第宅) : 살림집과 정자(亭子)의 총칭.- [註 1034]
양궁(兩宮) : 세종과 왕비.- [註 1035]
을축년 : 1445 세종 27년.- [註 1036]
정의 대부(正義大夫) : 종2품 종친의 품계.- [註 1037]
경태(景泰) 4년 : 1453 단종 원년.- [註 1038]
승헌 대부(承憲大夫) : 종2품의 종친의 품계.- [註 1039]
흥록 대부(興祿大夫) : 정1품 종친의 품계.- [註 1040]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註 1041]
황석공(黃石公) : 중국 진(秦)나라 말엽에 장양(張良)에게 병서를 전해 준 병법가.- [註 1042]
성훈(聖訓) : 부왕의 가르침.- [註 1043]
제릉(齊陵) : 태조의 비(妃) 신의 황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능.- [註 1044]
대수(大蒐) : 봄철에 크게 수렵(狩獵)을 행함.- [註 1045]
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1046]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1047]
원량(元良) : 세자.- [註 1048]
시약(侍藥) : 모시고 약을 쓰고 간호한 자.- [註 1049]
불휘(不諱) : 죽음을 말함.- [註 1050]
○誌文曰:
天順元年歲在丁丑, 我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卽祚之三年秋九月癸亥, 王世子以疾卒, 年二十。 越三月二十四日甲申, 以禮葬于高陽縣 蜂峴之原。 王世子諱暲, 字原明, 以世宗二十一年(成)〔戊〕 午九月十五日丙申生, 寔正統之三年也。 舊事諸王子夫人之將㝃者必就外第, 慈聖王妃特承兩宮眷愛, 故生世子於禁中。 岐嶷夙成, 姿容端雅, 世宗親自提抱, 異於諸王孫。 歲乙丑春正月, 始拜正義大夫, 封桃源君, 景泰(六)〔四〕 年癸酉春正月, 進階承憲, 夏四月入學。 尊禮師儒, 遜志受業, 宗室子弟雖老成者, 莫敢望焉。 冬十有一月, 以我殿下靖難之勳超拜興祿。 乙亥閏六月乙卯, 殿下卽位, 群臣請早建世子用端國本, 於是撰日備儀, 冊爲王世子, 遣使請命于朝。 帝諭曰, "王尙敎以忠孝, 以副國人之望。" 初世子入受冊命訖, 卽朝于王妃退, 又受百官賀, 終始益虔, 群臣相慶曰, "我朝鮮萬世之福也。" 殿下選置師傅賓客及書筵官, 以盡敎養之方, 世子亦樂學不倦, 引書筵官講說者日三焉。 嘗讀《書》至《舜典》璣衡註, 其制度有難以文字解者, 卽與書筵官登簡儀臺, 觀渾天儀, 以與《書》之所載反復參證, 無所滯礙。 他凡讀書皆然, 疑則必問, 問則必審。 殿下嘗以 "兵陣家業也不可不知", 親授黃石公等書, 服膺聖訓, 造次不違, 故學日進以就高明。 殿下嘗謁齊陵, 因以大蒐, 命世子居守, 授以符節, 使專裁決, 事皆得宜。 丙子夏, 帝遣太監尹鳳等, 錫殿下誥命, 丁丑夏, 今皇帝遣翰林修撰陳鑑等, 來頒卽位詔, 兩使見世子儀觀之美、行禮之詳, 皆稱歎不置。 每日雞鳴, 朝於兩宮, 問寢視膳, 盡其怡愉之孝, 事諸父以敬, 友兄弟以信, 待左右仁而有威, 遇士大夫恭而有禮, 故人無間言。 且殿下嘗敎之以儉約, 凡輿馬衣服之奉, 務令朴素, 不爲侈靡, 故極備元良之德, 得民心之歸焉。 其始遘疾, 殿下憂甚, 卽與之避忌于舊邸, 禱祀醫藥無所不用其極。 於是疾小愈, 殿下喜之, 凡左右侍藥者及軍士之侍衛有勞、庶士之奔走供辦者, 皆陞一級。 旣而疾復劇, 以至不諱, 殿下與王妃震悼徹膳, 爲罷朝市五日。 大臣等累請進膳, 皆不許, 以素服終三十日。 宗親百僚下逮里巷小民, 莫不悲哀涕慕曰, "臣民之無祿也。 吾世子之德, 而不克享其壽以卒也。" 斂之日, 百官會臨, 亦以白衣終七日之制, 官寮皆服衰, 旣葬而除。 追諡懿敬, 哀榮之典, 可謂無憾矣。 嬪韓氏, 淸州世家, 皇曾祖諱寧贈正憲大夫兵曹判書, 皇祖諱永矴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 皇考諱確宣授奉議大夫光祿寺少卿, 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經筵事西原府院君諡襄節公, 公娶資憲大夫吏曹判書諡文良公 洪汝方之女, 寔生叔德, 世子爲桃源君時, 擇配以歸, 承事兩宮, 婦道甚順, 及世子受冊, 同日封爲嬪。 生子男二女一皆幼。 昭訓愼氏、權氏、尹氏, 亦以衣冠茂族選入宮中, 皆無子。
-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7책 23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註 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