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사람을 가까이할 것, 백성의 힘을 아낄 것, 군사를 사랑할 것, 도적 방지 등에 관한 세조의 봉장
세조가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서 도승지(都承旨) 박중손(朴仲孫)을 보고 말하기를,
"옛사람은 아는 것은 말을 아니함이 없었는데, 신은 비록 나아가 뵐지라도 조용히 건백(建白)819) 하지 못하여 이제 간략하게 품은 바를 서술하여 천총(天聰)820) 에 상달되기를 바라며 그 거행 여부는 신은 감히 알지 못합니다."
하고, 인하여 봉장(封章)을 올렸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은 듣건대,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은, 임금이 계통(繼統)821) 하는 처음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처음을 바르게 하면 만사(萬事)가 다스려지고,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천리(千里)만큼 그릇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전하는 처음으로 임금의 자리[九五]에 임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직(社稷)이 안위(安危)한 기틀이며, 생민은 휴척(休戚)하는 단서입니다. 군자와 소인을 쓰고 버리는 즈음에 안위(安危)와 휴척(休戚)하는 것이 더불어 소장(消長)하는 것이니, 삼가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는 비록 하늘이 낸 성지(聖智)일지라도 춘추(春秋)가 아직 어리시니, 대위가 오래 편안하다 하여 그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국가가 이미 다스려졌다 하여 그 어지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 것입니다.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이 살펴서 힘써 다스리기를 구하며, 실(實)822) 을 돈독히 하고 문(文)823) 을 버리며, 상벌(賞罰)을 분명히 실행하고, 어질고 능한 이를 임용(任用)하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고, 요역(徭役)824) 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여, 날마다 백성을 생각하면, 하늘이 상서(祥瑞)를 내리고 신(神)이 복을 주어 태평한 정치를 가히 길이 보전할 것입니다. 신은 세종 대왕과 문종 황고(文宗皇考)의 양육의 은혜를 깊이 입어서 우러러 보답하기를 생각하니 호천망극(昊天罔極)825) 합니다. 이미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는 장수가 되지 않았고, 또 정사가 많아 분주함을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적심(赤心)으로 일찍이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소활(疎闊)하고 적절하지 못한 말로써 만분의 일이라도 보필(補弼)하고자 하여 감히 관견(管見)을 가지고 뒤에 조목(條目)을 진술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聖慈)는 굽어 살피소서. 구구히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로 여기에 그치지 아니하나, 우선 오늘에 급한 것을 먼저 아룁니다.
그 첫째는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할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임금의 덕도 신하에게 달렸고 부덕(不德)도 신하에게 달렸다.’ 하였고, 또 ‘신하가 바르면, 그 임금도 곧아진다.’ 하였으니, 이러므로 임금이 덕을 기르고 업을 닦는 것은 진실로 전후 좌우에 있는 신하에게 달렸습니다. 정인(正人)과 같이 있기를 익히면 부정함이 없고, 부정한 사람과 같이 있기를 익히면 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전 임금은 출입할 때와 연한(燕閑)할 때에 반드시 풍송(諷誦)826) 하고 잠간(箴諫)827) 하는 신하가 있었으니, 그 덕성(德性)을 함양하고 그 사업을 성취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무릇 임금의 한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많아서 안으로 여자를 대하고, 밖으로 아첨한 이를 친하면 성색(聲色)828) 과 유전(游畋)829) 에 마음을 옮기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으로 임금의 곁에는 하루라도 정인이 없을 수 없음을 알 것입니다.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여, 매양 사유(師儒)830) 와 더불어 날마다 낮에 세 번씩 만나니, 부지런함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신은 미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반드시 세 번씩 만날 것입니까? 옥체(玉體)가 피로하여 혹 질병이 생기면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삼공(三公)831) 이 있어서 태사(太師)는 교훈으로 지도하고, 태부(太傅)는 덕의(德義)를 전하고, 태보(太保)는 신체를 보호하였으니, 태사뿐만 아니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문학하는 선비를 널리 뽑아서 편안하게 쉴 때에 혹 고금을 묻고, 혹 사무(事務)를 의논하면 인정(人情)·물태(物態)와 가색(稼穡)832) 하는 어려움을 모두 밝게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어 성덕(聖德)이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 둘째는 백성의 힘을 아낄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는데, 근년에 내려오면서 국휼(國恤)833) 이 잇달아서 공역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역(工役)은 귀신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을 부리는 것이며, 물건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마침내 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백성에게서 덜어내지 아니하면 장차 어디서 얻어 내겠습니까? 이제 현릉(顯陵)의 역사(役事)는 진실로 폐할 수 없으나, 만약 창덕궁과 흥인문(興仁門)834) 의 역사를 동시에 함께 거행하면 이른바 시굴거영(時屈擧贏)835) 하는 것입니다. 신은 예로부터 이제까지 나라에 큰 상사(商事)가 있는데, 아울러서 영작(營作)836) 을 이처럼 크게 함은 아마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대신(大臣)들이 어찌 살피고 헤아려서 잘 처리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신은 아직 이처럼 급급하게 할 중한 일임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급하지 않은 영작은 정지하여 백성을 휴식하게 하고 또 상부(常賦)837) 외에 받아들이는 것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더욱 튼튼하고 나라의 명맥(命脈)이 더욱 길어질 것입니다.
그 셋째는 군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용맹스러운 무부(武夫)는 공후(公侯)의 간성(干城)이다.’ 하였고, 또 ‘나는 임금의 발톱과 어금니이다.’ 하였으니, 이러므로 옛 성왕(聖王)은 먼저 그 사정(事情)을 살펴서 그 뜻을 펴게 하고 그 노고(勞苦)를 민망하게 여겼기 때문에 백성들이 죽음을 잊고 〈임금을 위해 싸웠습니다.〉 신이 중국 조정을 보건대, 안으로는 금군(禁軍)과 밖으로는 수졸(戍卒)까지 모두 관에서 기계(器械)838) 와 안마(鞍馬)를 주고 또 항상 입히고 먹이는데, 우리 나라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힘이 넉넉지 못하므로, 내금위(內禁衛)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도 전하의 친병(親兵)으로 그 수(數)가 또한 적은데, 모두 행직(行職)을 제수하여 녹봉(祿俸)이 매우 박하니, 안마(鞍馬)를 갖추자면 무엇으로 변통하겠습니까? 번(番)을 쉴 기한은 없고 굶주리는 고통이 있으니, 심히 금군(禁軍)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벼슬에 준하여 그 녹봉을 후하게 하며, 자주 불러서 활쏘기를 구경하고, 조종의 고사(故事)와 같게 하면 무사(武事)가 해이해지지 않고, 금군(禁軍)이 정실(精實)하여, 권려(勸勵)하는 뜻이 있게 되어서 곤핍(困乏)한 근심이 없을 것이니, 어찌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또 양계(兩界)의 연변 수령(守令)들은 그 처자와 같이 부임하지 못하는 곳이 수십 고을인데, 그 처자에게 비록 녹과(祿科)의 반을 주어 그 생활을 넉넉하게 하였으나, 무릇 사람의 가정에 있어서는 부부가 서로 의지한 뒤에야 그 생활을 이룩하여 겨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는 것인데, 그 수령이 재망(才望)이 있는 자는 혹 10년에 한 번 천전(遷轉)하고 혹 20년에 한 번쯤 천전하는데, 체임(遞任)하여 돌아와서는 1기(期)를 채우지 못하고 곧 도로 수령에 보(補)하여 나갑니다. 부인(婦人)이 우러러 바라고 평생 몸을 바치는 것은 남편인데, 보통 때에도 소식을 한 번 듣기가 심히 어려우니, 삼상지망(參商之望)839) 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재주 있는 것이 도리어 재주가 없이 편안히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연변의 구자(口子)의 만호(萬戶)·천호(千戶)의 처자는 반과(半科)의 녹(祿)조차도 또한 받지 못하니, 동일한 왕신(王臣)으로 동일한 왕사(王事)840) 인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으면, 이는 인정의 가장 괴로운 것이어서,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앙을 부르는 것이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수령(守令)·만호(萬戶)·천호(千戶)에게는 한 해 겨울과 여름의 옷 값을 하사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고 그 처자는 전과(全科)의 녹을 받게 하여 그 심정을 위로하소서. 또,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의 순작(巡綽)하는 관원은, 더울 때나 비올 때나 심하게 추울 때에 노고가 극심합니다. 각각 그 본위(本衛)의 원액(員額)841) 은 비록 많으나, 혹은 문신이 그 벼슬을 받아서 관각(館閣)842) 에 겸직한 자가 있고, 혹은 다른 직무(職務)로 그 벼슬을 받아서 그 사(司)에는 사관(仕官)하지 않는 자가 있어 그 녹봉만 받고 그 직무(職務)는 돌보지 아니하는 자가 태반이니, 나머지 많지 아니한 사람이 입직(入直)하며, 직문(直門)하고 순작(巡綽)하는 것이 각각 3일인데, 그 직무를 마치면 또 다른 사람을 대신하니, 한 달 동안에 집에 들어가 자는 것이 겨우 3일이 격하니, 그 직무(職務)는 같은데 수고롭고 편함이 고르지 아니합니다. 신이 문종조(文宗朝)에 일찍이 갖추어 아뢰었더니, 문종께서 개정하려고 하셨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는 황고(皇考)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무사(武士)들로 하여금 치우치게 고생하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소서. 또 갑사(甲士)는 5품에서 9품까지 모두 월봉(月俸)을 받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이 사환(仕宦)하여 직위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후한 녹(祿)으로써 부모와 처자를 양육하고자 함인데, 이제 혹 10여 년이나 혹 20년에 참직(參職)에 이르게 되니, 그 노고(勞苦)가 또 오래 되고 지극하여, 도리어 새로이 소속된 후진(後進)의 무리들과 같은 월봉을 받으니, 종과 말을 기르기에도 아직 부족한데 어찌 부모를 우러러 섬기고 처자를 양육할 가망이 있겠습니까? 무사를 기르는 도리에 심히 잘못입니다. 또 방패 육십(防牌六十)은 본디 굳세고 용감한 사람을 골라서 앉고 서로 치고 찌르는 자세를 익히게 하여, 임금을 호위하는 정졸(精卒)로 삼는 것인데, 이제 토목 역사에 몰아다가 일을 시키니, 한갓 괭이와 삽만 멜 줄 알고 금고(金鼓)의 진퇴(進退)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만일에 급한 변이 있으면 어느 곳에 쓰겠습니까? 이른바, 저자 사람을 몰아다가 전쟁하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어지러움은 어지러운 데에서 나지 아니하고 매양 다스려진 데에서 나며, 위태로움은 위태로운 데서 나지 아니하고 편안한 데서 매양 난다고 하니, 우리 나라는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병화(兵禍)를 듣지 못한 것이 거의 백 년입니다. 천하의 일을 비록 미리 헤아릴 수는 없으나, 무진년843) 의 신변은 앞 수레가 넘어진 것[前車己覆]844) 이니,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바로 하늘에서 비가 오기 전에 지붕을 단속할 때를 당하였는데, 어찌하여 승평(昇平)에 젖어 염려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토목만 일삼으니 근심함이 없겠습니까? 나라를 위태롭기 전에 보호하는 뜻에 심히 어긋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갑사(甲士)가 받는 녹은 예전대로 하게 하고 방패 육십(防牌六十)은 그 임무에 전공하게 할 것입니다.
그 네째는 도적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허물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시킨다.’ 하고, 또 ‘고의(故意)로 지은 죄는 형벌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도적이 혹 가난과 곤궁(困窮)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은 용서할 만한 것이 있으나, 이제 보건대, 도적이 날마다 성하여 떼를 이룬 것이 매우 많으니, 반드시 중(重)한 법을 쓴 뒤에야 가합니다. 예전에는 돈 1전(錢)과 1과(瓜)를 훔친 것도 목을 베었습니다. 비록 지나치게 잔혹(殘酷)한 듯하나 성인(聖人)의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하고, 고의(故意)로 지은 죄는 형벌이 크다.’는 뜻으로 보면 서로 심히 멀지 않습니다. 무릇 중인(中人)의 재산은 비록 10관(貫)의 자산(資産)을 잃었을지라도 오히려 그대로 살 수 있으나, 만약 그 아래의 사람으로서 이미 그만한 자산(資産)을 잃었다면 굶주려도 먹을 것이 없고, 추워도 입을 것이 없게 되어 인하여 얼고 굶어 죽을 근심이 있으니, 이는 다만 도적이 사람에게 칼을 대지 아니하였을 뿐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또 말[馬]은 진실로 군정(軍政)에 크게 수요되는 바이며, 소도 역시 농사에 크게 쓰이는 바인데, 무릇 한 마을 안에 농우(農牛)를 가진 자가 한두 집에 지나지 아니하니, 한 집의 소로 한 마을의 경작(耕作)을 의뢰하는 것이 반(半)이 넘는데, 만약 한 마리의 소를 잃으면 이는 한 마을의 사람이 모두 농사짓는 때를 맞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소가 있고 없는 것으로써 한 마을의 빈부(貧富)가 관계되니 소의 쓰임이 진실로 큽니다. 또, 군사의 기마(騎馬)는 그 값이 적은 것도 1, 20관(貫)의 아래이지 아니하고, 많은 것은 혹 4, 50관까지 올라가니, 만약 말 한 필을 잃으면, 땅을 팔고 살림을 팔아야 겨우 채워낼 수 있는데, 어찌 한 필의 말, 한 마리의 소를 도둑질한 것을 가볍게 그 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10관 이상을 도둑질하여 장물(贓物)이 모두 나타난 자와 우마(牛馬)를 훔쳐서 그 값이 또 16관 이상인 자는 즉시 참형(斬刑)에 처하고, 모든 도적은 비록 10관 미만일지라도 사유(赦宥)의 전후를 논하지 말고 재범(再犯)은 참형에 처하고 두어 해를 기한하면 도적이 거의 그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모두 도적이라면 진실로 다 죽일 수는 없으나, 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천만 사람 가운데 수십 사람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어찌하여 수십 명 원악(元惡)845) 의 목숨을 아껴서 천만 사람의 무고(無辜)한 백성을 괴롭게 하겠습니까? 이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원악 대대(元惡大憝)846) 에게는 지나치게 중하고, 널리 베푸는 은혜는 도리어 양민과 선중(善衆)847) 에게 결핍되는 것입니다. 모두 참형에 처하는 것이 비록 혹 적중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의 형벌로써 형벌을 그치게 하는 뜻과, 때를 헤아려서 제치(製治)하는 방책에 거의 합당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한두 사람 원악(元惡)의 목숨을 아껴서 죽이지 않으면, 도둑을 맞고 파산(破産)된 무리들이 그 빈궁(貧窮)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일어나서 도둑이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패망(敗亡)하는 것이 이로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은 학술(學術)이 거칠고 허술하여 말이 글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구구한 정성을 스스로 마지못하여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채택(採擇)하소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가지고 의정부에서 의논하라."
하고, 도승지(都承旨) 박중손(朴仲孫)을 세조의 사저(私邸)에 보내어 말하기를,
"상소(上疏)가 아주 알맞고 적절하여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하고,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또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한 통을 다시 써서 올려라. 내가 마땅히 항상 두고 보겠다."
세조는 성품이 곧고 어질며 널리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일찍이 외인을 함부로 접하지 아니하였다. 집에 있으면 검약(儉約)하기에 힘쓰고, 집에는 염첩(艶妾)이 없으며 건즐(巾櫛)848) 을 받드는 이는 세종이 하사한 한 사람뿐이데, 처첩(妻妾) 사이에 등위(等位)가 심히 분명하였다. 세종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착한 아들 한 사람이 있다."
하였으니, 대개 세조를 가리킨 것이다. 종친이나 내정(內庭)에서 과실(過失)이 있으면, 차라리 임금에게는 들리게 할지라도 오직 세조가 아는 것은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정(時政)이 날마다 그릇됨을 보고 드디어 이 글을 올린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1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건설-건축(建築)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휼병(恤兵) / 재정-역(役) / 사법-치안(治安)
- [註 819]건백(建白) : 의견을 진술함.
- [註 820]
천총(天聰) : 임금의 들음.- [註 821]
계통(繼統) :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 [註 822]
실(實) : 내용.- [註 823]
문(文) : 형식.- [註 824]
요역(徭役) : 부역.- [註 825]
호천망극(昊天罔極) : 부모의 은혜가 하늘처럼 넓고 커서 다함이 없음.- [註 826]
풍송(諷誦) : 글을 읽고 시를 읊음.- [註 827]
잠간(箴諫) : 훈계하고 간함.- [註 828]
성색(聲色) : 노래와 여색.- [註 829]
유전(游畋) : 사냥놀이.- [註 830]
사유(師儒) : 스승인 유신.- [註 831]
삼공(三公) : 옛날 임금을 가르치던 세 사람의 스승의 관직. 곧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를 말함.- [註 832]
가색(稼穡) : 농사.- [註 833]
국휼(國恤) : 나라의 상사(喪事).- [註 834]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 [註 835]
시굴거영(時屈擧贏) : 국가가 다난하여 형세가 궁해진데도 불구하고 백성을 구휼할 생각도 없이 도리어 사치한 일.- [註 836]
영작(營作) : 건축·토목.- [註 837]
상부(常賦) : 일정한 부세.- [註 838]
기계(器械) : 병기.- [註 839]
삼상지망(參商之望) :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만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 [註 840]
왕사(王事) : 나라의 일.- [註 841]
원액(員額) : 인원수.- [註 842]
관각(館閣)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註 843]
무진년 : 1448 세종 30년.- [註 844]
앞 수레가 넘어진 것[前車己覆] :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뒤에 있는 수레가 조심한다는 말.- [註 845]
원악(元惡) : 큰 죄인. 즉 원흉(元兇).- [註 846]
○世祖詣承政院, 見都承旨朴仲孫曰: "古人知無不言, 臣雖進見, 未得從容建白, 今略敍所懷, 冀達天聰。 若其擧行與否, 臣未敢知。" 因進封章, 其詞曰:
臣聞治亂, 莫不由人主繼統之初。 故正其始, 則萬事理; 毫釐差, 則千里謬。 恭惟殿下初臨九五, 此實社稷安危之機、生民休戚之端、君子小人用舍之際, 安危休戚與之消長, 可不愼歟? 殿下雖天縱聖智, 而春秋尙幼。 毋謂大位之久安而不思其危、國家之已治而不思其亂。 好問察邇, 孜孜求治, 敦實去文, 信賞必罰, 任賢用能, 振擧綱紀, 輕徭簿賦, 日念百姓, 則天降祥神, 錫福太平之治, 可永保矣。 臣深蒙世宗大王、文宗皇考鞠育之恩, 念以仰答昊天罔極, 旣不能被堅執銳, 亦不能奔走鞅掌, 徒以赤心, 嘗思竭忠。 欲以踈闊不切之言, 補其萬一, 敢將管見條陳于後。 伏惟聖慈垂覽焉。 區區憂國愛君之心, 誠不止是, 姑以今日所急者爲先焉。
其一曰: 近正人。 《書》曰: "后德惟臣, 不德惟臣。" 又曰: "僕臣正, 厥后克正。" 是以人君進德修業, 實係于左右前後。 習與正人, 居無不正; 習與不正人, 居不能無不正。 故古之人君出入、燕閑, 必有諷誦、箴諫之臣, 所以養其德性、成其事業也。 夫人主一心, 攻之者衆, 內對婦人, 外親諂侫, 則聲色游畋, 靡所不移。 是知人主之側一日不可無正人也。 殿下日講經筵, 每與師儒晝日三接, 勤之至矣。 然臣心以爲未盡也。 何必三接? 疲勞玉體, 或生疾病? 非是良策。 古者三公, 太師導之敎訓, 太傅傅之德義, 太保保其身體, 非徒太師而已也。 臣以爲廣選文學之士, 引接於燕息之時, 或詢以古今、或訪以事務, 則人情物態、稼穡艱難, 無不通曉, 聖德日新矣。
其二曰: 惜民力。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近年以來, 國恤相仍, 工役不絶。 古人云: "功不使鬼, 只使役人; 物不天來, 終須地出。 不損百姓, 將何以求?" 今也顯陵之役, 固不可廢, 若昌德宮、興仁門之役, 同時竝擧, 所謂時屈擧贏者也。 臣恐自古于今, 國有大喪, 竝擧營作, 未有如此之大者也。 大臣豈不審度而善處之乎? 然臣尙未知其汲汲如是之重也。 願自今停不急之營作, 使民休息, 且常賦之外, 無所引納, 則邦本益固而國脈益壽矣。
其三曰: 恤軍士。 《詩》曰: "赳赳武夫, 公侯干城。" 又曰: "予王之爪牙。" 是以古之聖王, 先探其情, 敍其情而悶其勞, 故民忘其死焉。 臣觀中朝, 內而禁軍, 外而戍卒, 皆官給器械、鞍馬, 又常衣食之。 我國則土瘠民貧, 力所不贍。 至如內禁衛, 殿下之親兵, 其數亦少而盡除行職, 祿俸甚薄, 鞍馬之備, 何從而辦? 無番休之期, 而有飢乏之苦, 甚非所以待禁軍之道也。 請令准職以厚其祿, 數引觀射如祖宗故事, 則武事不弛, 禁軍精實, 有勸勵之志, 而無困乏之患矣。 豈非固邦之良策? 又兩界沿邊守令, 未得與妻子同赴者數十許郡。 其妻孥, 雖給祿科之半以贍其生, 然凡人之處家, 夫婦相資, 然後以遂其生, 僅得免於飢寒。 其守令有才望者, 則或十年一遷, 或至二十許年一遷, 其遞還也, 未滿一期, 又卽還補。 婦人所仰望而終身者, 夫也, 常時音耗一聞甚難, 參商之望, 曷有紀極? 然則有才反不如無才之安也。 至於沿邊口子萬戶、千戶之妻孥則半科之祿, 亦不得受。 同一王臣、同一王事也, 而有厚薄之殊, 是人情之最苦, 而傷和召災者也, 不可不慮也。 願守令、萬戶、千戶, 歲賜冬、夏衣纏之費, 以答其勞; 使其妻孥, 受全科之祿, 以慰其情焉。 又上、大護軍巡綽之官, 暑雨祁寒, 勞苦極矣。 各其本衛員額雖多, 或有文臣而受之兼帶館閣者, 或有他務而受之不仕其司者, 但受其祿而不顧其職者, 太半。 以所餘不多之人, 入直、直門、巡綽各三日, 旣供其職, 又代他人, 一朔之內, 入宿其家, 纔隔三日。 等是其職, 而勞逸不均。 臣於文宗之朝, 備嘗啓之。 文宗欲改, 而未克果焉。 願殿下承皇考之遺志, 俾爪牙之士, 免偏苦之患焉。 又甲士, 自五品以至九品, 皆受月俸。 夫人之仕宦而望其職位之高者, 欲以厚祿而養父母、育妻子也。 今或十餘年、或二十年, 得至參職, 其勞且久至矣, 反與新屬後進之輩, 同受月俸。 奴馬之養, 尙且不足, 安有仰事俯育之可望乎? 甚非養士之道也。 又防牌、六十, 本擇强勇之夫, 俾習坐作、擊刺之勢, 以爲輦下之精卒。 乃驅使之於土木之役, 徒知畚鍤之荷擔, 未知金皷之進退, 萬有緩急, 何所用之? 所謂驅市人而戰也。 臣聞亂不生於亂, 而每生於治, 危不生於危, 而每生於安。 我國昇平日久, 民不聞兵者, 幾於百年。 天下之事, 雖不得預料, 而戊辰之變, 前車已覆。 在於我國, 正當迨天未雨之時, 豈可狃於昇平而莫之慮, 專事土木而莫之恤乎? 甚非所以保邦未危之意也。 願自今甲士受祿, 俾仍其舊, 防牌、六十, 專攻其任。
其四曰: 弭盜賊。 《書》曰: "怙終賊刑。" 又曰: "刑故無小。" 蓋盜賊, 容有或起於貧窮而可恕者, 今觀盜賊日滋, 成群者頗多, 必用重典然後可。 古者斬一錢、一瓜, 雖若過爲酷暴, 以聖人怙終、刑故之意觀之, 不甚相遠。 夫中人之産, 則雖失十貫之資, 猶得自活, 若其下者, 旣失其産, 則飢不得食、寒不得衣, 因之有凍餒死亡之患。 是則但不加刃於人耳。 且馬固軍政之所大需, 牛亦農事之所大用。 夫一里之內有農牛者, 不過一二家, 以一家之牛, 資一里之耕者, 過半焉。 若失一牛, 是一里之人, 俱不得時其耕耨也。 以一牛之存亡, 係一里之貧富, 則牛之用, 固大矣。 且軍士之騎馬, 其直, 少者不下一二十貫, 多者或高四五十貫。 若失一馬, 賣田、鬻産, 僅能充立, 豈可盜一馬、一牛而輕議其罪乎? 願自今盜十貫以上贓物俱現者, 盜牛馬其直亦十六貫以上者, 隨卽處斬, 一切盜賊, 雖未滿十貫, 勿論赦前、赦後, 再犯則處斬, 期以數年, 則盜賊庶可弭矣。 且人皆盜賊, 則誠不可勝誅, 百人之中不過一人, 千萬人之中不過數十人, 乃何惜數十人元惡之命, 以苦千萬人無辜之民乎? 是則好生之德, 偏重於元惡大憝, 而博施之恩, 反乏於良民善衆矣。 一切處斬, 雖或過中, 然聖人辟以止辟之意、權時制治之方, 庶可得矣。 若惜一二元惡之命而不殺, 則被盜破産之徒, 將不勝其貧窮, 皆起而爲盜矣。 自古國家之敗亡, 莫不由是, 此非小節。 臣學術荒踈, 言不成章。 然區區之誠, 不能自已, 謹冒昧以聞, 伏惟殿下採擇焉。
傳于承政院曰: "將是疏, 議于政府。" 遣都承旨朴仲孫于世祖邸曰: "所上疏, 剴切, 予甚嘉之。" 賜鞍馬。 又傳于承政院曰: "改書一通以進。 予當常目之。" 世祖性剛毅慈仁, 博通經史, 不喜聲色, 未嘗妄接外人。 居家務儉約, 家無艶妾, 侍巾櫛者, 惟世宗所賜一人而已。 妻妾之間, 等位甚明。 世宗嘗曰: "吾有聖子一人。" 蓋指世祖也。 宗親及內庭, 苟有過失, 寧爲上聞, 惟恐世祖之知也。 至是, 見時政日非, 遂上此書。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1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건설-건축(建築)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휼병(恤兵) / 재정-역(役) / 사법-치안(治安)
- [註 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