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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봉산군

지리지 / 황해도 / 황주목 / 봉산군

봉산군(鳳山郡)

본래 고구려휴류성(鵂鶹城)인데, 【조파의(租坡衣), 또는 휴암군(鵂巖郡)이라고도 한다. 】 신라에서 서암군(栖巖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는 봉주(鳳州)라 하였다. 성종(成宗)을미288) 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에 방어사를 폐하고 황주(黃州) 임내에 붙이었는데, 충렬왕(忠烈王) 11년 을유에 지봉양군사(知鳳陽郡事)로 고치고, 뒤에 다시 봉주로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봉산군으로 고쳤다. 별호는 지하(池河)이다. 【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평산(平山)에 이르기 75리, 서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재령(載寧)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황주(黃州)에 이르기 25리이다.

호수가 1천 5백 64호요, 인구가 6천 2백 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백 37명이요, 영진군이 2백 10명이요, 선군이 1백 88명이다.

토성(土姓)이 2이니, 이(李)·윤(尹)이요, 망성(亡姓)이 3이니, 주(朱)·지(智)·전(全)이요, 외성(外姓)이 9이니, 최(崔)·김(金)·백(白)·한(韓)·배(裵) 【한 문부에는 표(表)로 되었다. 】 ·개(開)·황(黃)·곽(郭)·차(車)이다. 【배(裵) 이하 5성(姓)은 지금 없다. 】 속성(續姓)이 3이니, 오(吳) 【해주(海州)에서 왔다. 】 ·장(張) 【장성(長城)에서 왔다. 】 ·강(康) 【재령에서 왔다. 】 이요, 【3성(姓)이 지금은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 인물은 상장군 좌복야(上將軍左僕射) 지채문(智蔡文)이다. 【현종 때의 사람이다. 】

땅이 메마르며,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많아서, 백성들이 누에치기로 생업을 삼는다. 간전(墾田)이 1만 3천 3백 43결(結)이요, 【논은 겨우 1천 40결이다. 】 토의(土宜)는 오곡과 수수·팥·메밀·참깨이다. 토공은 족제비털·칠(漆)·대추·느타리·지초·오미자·말린 숭어요, 약재는 멧대추씨[酸棗仁] 【가장 좋다. 】 ·애기풀[遠志]·검산풀뿌리[續斷]·속서근풀[黃芩]·새박뿌리[何首烏]·단너삼뿌리[黃耆]·흰바곳[白附子]이다. 노감석(爐甘石)이 군의 남쪽 반포리(反浦里)에서 나고, 연철(鉛鐵)이 군의 동쪽 금음포(今音浦)에서 난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군의 서쪽 발이산(鉢伊山)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군의 동쪽 입구지리(入仇之里)에 있다. 【모두 하품이다. 】

참(站)이 2이니, 절령(岊嶺)·검수(劍水)요, 역(驛)이 2이니, 도공(陶工)·소곶(所串)이요, 봉화가 1곳이니, 군의 동쪽 건지산(巾之山)에 있다. 【동쪽으로 서흥(瑞興) 소을마산(所乙麽山)에, 서쪽으로 황주(黃州) 천주산(天柱山)에 응한다. 】 휴류암(鵂鶹巖)이 군 서쪽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 때 감찰 어사(監察御史) 함유일(咸有一)이 나가서 황주 판관(黃州判官)이 되었는데, 속현을 순행하다가 봉주(鳳州)에 이르러서, 고을 사람들이 바위 아래 못 속에 신령한 용이 있어서 모두들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정성을 드린다는 말을 듣고, 유일이 고을 사람들을 불러서 더러운 물건으로써 그 못을 메웠더니, 그날은 마침 날씨가 아주 맑았는데도 별안간 구름이 일고 비가 쏟아지며, 천둥·번개가 사납게 일어나서,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는 자도 있었는데, 좀 있다가 비가 개이자, 메웠던 더러운 물건이 모두 먼 언덕에 쌓여 있고, 물빛이 더욱 전보다도 맑았다. 왕이 이를 듣고 근신을 보내어 제사드리니, 이 못에 나라에서 제사지내게 됨이 이때부터 시작되어, 해마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지내며, 가뭄을 만나 기우제를 지내면 곧 효험이 있었다. 본조에 이르러 태종(太宗) 9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지내게 했다. 】


  • 【태백산사고본】 56책 15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69면

鳳山郡: 本高句麗 鵂鶹城, 【一云租坡衣, 一云鵂巖郡。】 新羅改爲柶巖郡, 高麗初, 稱鳳州成宗乙未, 置防禦使, 顯宗初, 廢防禦使, 屬黃州任內。 忠烈王十一年乙酉, 改爲知鳳陽郡事, 後復稱鳳州。 本朝太宗癸巳, 例改爲鳳山郡, 別號池河 【淳化所定。】 四境, 東距平山七十五里, 西距大海三十里, 南距載寧二十五里, 北距黃州二十五里。 戶一千五百六十四, 口六千二百。 軍丁, 侍衛軍二百三十七, 營鎭軍二百十, 船軍一百八十八。 土姓二, ; 亡姓三, ; 外姓九, 【一本作表。】 ; 【裵以下五姓, 今亡。】 續姓三, 【海州來。】 【長城來。】 【載寧來, 三姓今皆爲鄕吏。】 人物, 上將軍左僕射智蔡文 【顯宗時人。】 厥土塉, 多桑拓, 民俗以蠶事爲業, 墾田一萬三千三百四十三結。 【水田止一千四十結。】 土宜五穀, 唐黍、小豆、蕎麥、胡麻。 土貢, 黃毛、漆、棗、眞茸、芝草、吾味子、乾水魚。 藥材, 酸棗仁、 【最良】 遠志、續斷、黃芩、何首烏、黃耆、白附子, 爐甘石産郡南反浦里, 鉛鐵産郡東今音浦。 磁器所一, 在郡西鉢伊山。 陶器所一, 在郡東入仇之里 【皆下品。】 站二, 岊嶺劒水。 驛二, 陶工所串。 烽火一處, 在郡東巾之山 【東準瑞興 所乙麽山, 西準黃州 天柱山。】 鵂鶹巖在郡西。 【高麗 明宗時, 監察御史咸有一出爲黃州判官, 行屬縣至鳳州, 聞邑人以巖下淵中有神龍, 皆致敬畏, 有一召邑人, 以穢物塡其淵, 是日, 天氣甚晴, 忽興雲雨, 雷電暴作, 人有驚仆者。 俄頃開霽, 其所塡穢物盡出, 積於遠岸, 水色澄淨, 勝於前。 王聞之, 遣近臣祀之。 是淵有國祀, 自此始。 每歲春秋降香祝致祭, 遇旱祈禱, 頗有應。 至本朝太宗己丑, 令所在官春秋行祭。】


  • 【태백산사고본】 56책 15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