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우찬성 권제의 졸기
의정부 우찬성 권제(權踶)가 졸(卒)하였다. 제의 자는 중의(仲義)이고, 처음 이름은 도(蹈), 찬성사(贊成事)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처음에 공신(功臣)의 아들로써 경승부 주주(敬承府主簿)에 보직되었고, 여러번 옮겨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가 대장(臺長)063) 을 거슬러 파면되었다. 갑오년 가을에 친시(親試)에서 제1등으로 뽑혀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에 임명되고, 병조 정랑과 예문관 응교로 옮겼다가 병신년에는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임명되었다. 무술년에 태종이 세종을 봉하여 세자로 삼게 되니, 제(踶)는 의정부의 사인(舍人)으로서 전사 소윤(典祀少尹) 세자 좌문학(世子左文學)으로 개차(改差)되었다. 이듬 해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고, 사은사(謝恩使) 경녕군(敬寧君) 이비(李)를 좇아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승정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임명되었다가 좌대원(左代言)에 오르고, 계묘년에는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복(服)을 마치자 집현전 부제학으로 제수되었다가 갑자기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여름에는 대사헌으로 옮겼으며, 겨울에는 함길도 도관찰사가 되어 나갔다가 사건으로써 진천(鎭川)에 폄출(貶黜)되었다. 이듬해에 불러 돌아와서 평안도 도관찰사가 되고, 다음 해에 병으로써 해면되었다. 경술년에 경창부 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다가 사건으로서 배천(白川)으로 폄출되었다. 임자년 봄에 경기 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고, 계축년 봄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을묘년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문한(文翰)을 맡고, 정사년에 왕명으로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였으며,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무오년에는 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 이지(李祉)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가서 칙서(勅書)를 받들고 돌아오니, 토지와 종을 하사받고, 예문관 대제학, 중추원 사로 옮겼다. 기미년 겨울에 사건으로 원주(原州)로 폄출되었다가 달이 지나서 불러 돌아와서 명하여 산질(散秩)064) 로써 그대로 《고려사》를 편수하게 하였다. 경신년 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가 원사(院使)에 오르고, 계해년에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이조사(判吏曹事)에 임명되고,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다가 3월에 종병(瘇病)을 앓으니, 임금이 명하여 의원에게 집에 가서 약을 공급하게 하고, 또 날마다 내의(內醫)를 보내어 문병하게 하며, 병이 위독하여지자, 특별히 맏아들 권지(權摯)에게 한 계급을 뛰어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9세이다. 이틀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왔으며,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이라 하였으니,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이 문(文)이고, 의(義)로 말미암아 구제함이 경(景)이다. 제는 총명하고 학문이 넓으며, 말을 잘하고 시사(時事)를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기첩(妓妾)에게 혹하여 처자(妻子)를 대접하기를 매우 박하게 하여 가도(家道)가 바르지 못하니, 세상에서 이를 좋지 않게 여겼다. 그의 딸은 일찍이 첩과 더불어 거스림이 있어, 제가 발로 차서 죽었는데, 뒤에 사사(史事)065) 때문에 제명(除名)066) 하였다. 아들은 권지(權摯)·권남(權擥)·권반(權攀)·권마(權摩)·권혈(權挈)·권경(權擎)이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0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17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63]대장(臺長) : 대사헌.
- [註 064]
○議政府右贊成權踶卒。 踶字仲義, 初名蹈, 贊成事近之子也。 初以功臣子, 補敬承府注簿, 累遷司憲監察, 忤臺長罷。 甲午秋, 擢親試第一, 拜司諫院右獻納, 遷兵曹正郞、藝文應敎, 丙申, 拜成均司藝。 戊戌, 太宗封世宗爲世子, 踶以議政府舍人, 改爲典祀少尹、世子左文學。 明年, 拜司憲執義, 從謝恩使敬寧君 爲書狀官如京師, 還拜承政院同副代言, 陞左代言。 癸卯, 丁母憂, 服闋, 除集賢殿副提學, 俄拜禮曹參判。 夏, 轉司憲府大司憲, 冬, 出爲咸吉道都觀察使, 以事貶鎭川。 明年, 召還, 爲平安道都觀察使, 踰年病免。 庚戌, 拜慶昌府尹, 以事貶白川。 壬子春, 爲京畿都觀察使, 秋, 以疾辭, 癸丑春, 復拜禮曹參判, 乙卯, 拜吏曹判書。 自是典文翰。 丁巳, 命修《高麗史》, 移禮曹判書。 戊午, 副計稟使惠寧君 (𧘿)〔祉〕 如京師, 奉勑還, 賜土田臧獲, 遷藝文大提學中樞院使。 己未冬, 以事貶原州, 踰月召還, 命以散秩, 仍修《高麗史》。 庚申春, 同知中樞院事, 陞院使。 癸亥, 拜議政府左參贊、兼判吏曹事。 乙丑, 進右贊成, 三月患𤺄, 上命醫就第, 以供藥餌, 又日遣內醫問疾, 及疾篤, 特爵長子摯超一級。 卒年五十九。 輟朝市二日, 官庀葬事。 諡文景, 博聞多見文, 由義而濟景。 踶聰明博學, 善談論, 喜言時事, 然惑於妓妾, 待妻子甚薄, 家道不正, 世以此少之。 其女嘗與妾有忤, 踶蹴之而死, 後以史事除名。 子摯、擥、攀、摩、挈、擎。
- 【태백산사고본】 35책 10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17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