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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1월 1일 을묘 3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임금이 근정전에서 회례연을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을 사용하다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서 회례연(會禮宴)을 의식에 따라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처음 고려 예종(睿宗) 때에 휘종(宋徽宗)이 제악(祭樂)의 종(鍾)·경(磬) 각각 1가(架)와 금(琴)·슬(瑟)·생(笙)·우(竽)·화(和)·소(簫)·관(管) 등 악기 각각 2부(部)씩을 내려 주었는데, 제조가 매우 정밀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 사람들이 수호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늙은 악공이 종·경 두 악기를 못속에 던져 넣었으므로 보존할 수 있었다. 명나라에 이르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종과 경을 주었으나 제조가 매우 거칠고 소리도 아름답지 못하여, 귀히 여길 만한 것은 오직 송조(宋朝)에서 내려 준 악기뿐이었다. 우리 나라 제악(祭樂)은 팔음(八音)001) 을 갖추지 못하여, 공인들이 봉상시(奉常寺)에서 예전부터 간직해 오던 십이관보(十二管譜)만 배울 뿐이고 음률(音律)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였다. 매양 제사 때를 당하면 경(磬)은 와경(瓦磬)을 쓰고, 종(鍾)도 어지러이 매어달아 그 수효를 갖추지 못하여, 외설(猥褻)하고 망령되게 만들었으나 습관이 되어 예사로 여겼다. 을사년 가을에 거서(柜黍)가 해주에서 나고, 병오년 봄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자, 임금이 개연(慨然)히 예전 것을 개혁하여 새로 고칠 뜻을 두어 박연에게 편경(編磬)을 만들기를 명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본래 음(音)에 맞는 악기가 없으므로, 해주의 거서(秬黍)를 가지고 그 분촌(分寸)을 쌓아 고설(古說)에 의거하여 황종(黃鍾) 1관(管)을 만들어 불어 보니, 그 소리가 중국의 종(鍾)·경(磬)과 황종 및 당악(唐樂)의 필률(觱篥) 합자성(合字聲) 보다 약간 높기 때문으로 인하여 전현(前賢)의 논의를 상고하니,

"토지가 기름지고 메마름이 있어 기장[黍]의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성음(聲音)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각각 다르다."

하였고, 진양(陳暘)이 또 이르기를,

"대나무를 많이 잘라서 기운을 살펴서 바르게 함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지역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중국 땅의 풍기(風氣)와는 전연 다르므로, 기운을 살펴서 음률(音律)을 구하려 하여도 응당 징험이 없을 것을 요량하고, 이에 해주의 거서(秬黍)의 모양에 의하여 밀[蠟]을 녹여 다음으로 큰 낱알[粒]을 만들어서 푼(分)을 쌓아 관(管)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우리 나라 붉은 기장[丹黍]의 작은 것과 꼭 같았다. 곧 한 낱[粒]을 1푼으로 삼고 열 낱[粒]을 1촌(寸)으로 하는 법을 삼았는데, 9촌을 황종(黃鍾)의 길이로 삼았으니 곧 90푼이다. 1촌을 더하면 황종척(黃鍾尺)이 된다. 원경(圓經)을 3푼 4리(釐) 6호(毫)의 법을 취하였다. 이에 해죽(海竹)으로서 단단하고 두껍고 몸이 큰 것을 골라 뚫으니 바로 원경의 푼수(分數)에 맞으며, 관(管)의 길이를 비교해서 계산하니 바로 촌법(寸法)에 맞았다. 문득 밀을 가지고 기장 낱알 1천 2백 개를 만들어서 관(管) 속에 넣으니 진실로 남고 모자람이 없었고, 이를 불어 보니 중국 종(鍾)·경(磬) 황종의 소리와 당악(唐樂)의 필률(觱篥) 합자(合字) 소리와 서로 합하였다. 그러므로 이 관(管)을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어 부니 소리가 곧 화하고 합하였다. 이 악기가 한번 이룩되자, 제악(祭樂) 팔음(八音)의 악기가 성음(聲音)에 근거가 있으니, 한 달이 지나서 신경(新磬) 2가(架)가 이룩되어 바치매, 지신사 정흠지(鄭欽之) 등이 연(堧)에게 묻기를,

"모양의 제도와 성음(聲音)의 법을 어디에서 취했는가."

하니, 이 말하기를,

"모양 제도는 한결같이 중국에서 내려 준 편경(編磬)에 의하였고, 성음은 신이 스스로 12율관(律管)을 만들매 합하여 이루었다."

고 하니, 여러 대언들이 연(堧)에게 말하기를,

"중국의 음(音)을 버리고 스스로 율관을 만드는 것이 옳겠는가."

고 하며, 모두 거짓말이라 여기니, 연(堧)이 글을 갖추어 아뢰기를,

"지금 만든 편경은 모양의 제도는 한결같이 중국 것에 의하였으나, 성음은 중국의 경(磬)은 대려(大呂)의 각표(刻標)한 것이 그 소리가 도리어 태주(太簇)보다 낮고, 유빈(蕤賓)의 각표한 것이 그 소리가 도리어 임종(林鍾)보다 높으며,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고, 응종(應鍾)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마땅히 높을 것이 도리어 낮고, 마땅히 낮을 것이 도리어 높으니, 한 시대에 제작한 악기(樂器)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만약 이것에 의하여 제작하면 결코 화하여 합할 이치가 없기 때문에, 삼가 중국 황종의 소리에 의하여 황종의 관(管)을 만들고, 인하여 손익(損益)하여 12율관을 이룩하여 불어서 음률(音律)에 맞추어, 이에 근거하여 만들었습니다."

하니, 명하여 중국의 경(磬) 1가(架)와 새로 만든 경 2가와 소(簫)·관(管)·방향(方響) 등의 악기를 들여 모두 새로 만든 율관(律管)에 맞추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磨] 아니한 것입니다."

하고, 물러가서 이를 갈아 먹이 다 없어지자 소리가 곧 바르게 되었다. 경(磬)이 이룩되자 연(堧)에게 명하여 악(樂)을 제작하는 임무를 전장(專掌)하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부터 무신년 여름까지 남양(南陽)의 돌을 다듬어서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의 편경(編磬) 및 여러 제사에 통용하는 편경·등가 편경(登歌編磬)·특경(特磬) 등이 이룩되었는데 모두 5백 28매이다. 임금이 또 연(堧)에게 명하기를,

"내가 조회(朝會)의 아악(雅樂)을 창제(創制)하고자 하는데 입법(立法)과 창제가 예로부터 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 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한 때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졌고, 국가가 무사(無事)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라."

하였다. 이에 또 조회(朝會)의 악경(樂磬)을 남양에서 만들고, 조제(朝祭)의 악종(樂鍾)을 한강에서 만들었는데, 연(堧)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고, 또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을 버금으로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헌가(軒架) 아악(雅樂) 및 무동(舞童)의 기예(技藝)를 쓰고, 여악(女樂)을 쓰지 않으며, 이웃나라 사객(使客)의 연회에도 여악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이른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5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35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

  • [註 001]
    팔음(八音) : 금(金)·석(石)·사(絲)·죽(竹)·토(土)·목(木)·혁(革)·포(匏).

○上御勤政殿, 設會禮宴如儀, 始用雅樂。 初, 高麗 睿宗時, 徽宗賜祭樂鍾磬各一架、琴瑟笙竽和簫管等器各二部, 制造精緻。 紅賊之亂, 人不能守, 賴有老樂工, 將鍾磬二器, 投池中得存。 逮至皇, 太祖高皇帝太宗文皇帝, 皆賜鍾磬, 然制造甚粗, 聲亦不美, 可貴者唯朝所賜之器耳。 我國祭樂, 八音未備, 工人只學奉常舊藏十二管譜, 而不知音律之爲何事也。 每當祭時, 磬用瓦磬, 鍾亦雜懸, 不具其數, 猥褻妄作, 習以爲常。 乙巳秋, 秬黍生於海州, 丙午春, 磬石産於南陽, 上慨然有革舊更新之志, 乃命朴堧造編磬。 但我國本無協音之器, 海州秬黍, 積其分寸, 依古說制黃鍾一管吹之, 其聲差高於中國鍾磬黃鍾之音及唐樂觱篥合字聲, 故因考前賢之議曰: "地有肥磽, 黍有大小, 聲音高下, 代各不同。" 陳暘亦云: "不如多截竹候氣之爲正。" 然我國地偏東域, 其與中土風氣頓殊, 候氣求律, 料應無驗, 乃因海州秬黍之形, 用蠟燃成次大之粒, 積分成管, 其形與我國丹黍之小者正同。 卽以一粒爲一分, 累十粒爲寸法, 以九寸爲黃鍾之長, 乃九十分也。 添一寸爲黃鍾尺也。 圓經取三分四釐六毫之法, 乃擇海竹之堅厚躰大者, 攅透孔穴, 正得圓經之分, 較量管長, 正得寸法。 却將蠟造黍粒千二百箇, 入於管中, 固無盈縮, 吹之, 與中國鍾磬黃鍾聲及唐樂觱篥合字聲相協。 因以此管三分損益, 以成十二律管吹之, 聲乃諧協。 此器一成, 祭樂八音之器, 聲音有據, 閱一月而新磬二架成。 及進, 知申事鄭欽之等問曰: "形制聲音, 何所取法?" 曰: "形制則一依中朝所賜編磬, 聲音則臣自制十二律管, 協而成之。" 諸代言誚曰: "捨中國之音, 自制律管可乎?" 皆以爲誕妄。 具書以啓曰:

今造編磬, 形制則一依中國, 聲音則中國之磬大呂刻標者, 其聲反出於大蔟, 蕤賓刻標者, 其聲反高於林鍾, 夷則同於南呂, 應鍾下於無射。 當高者反下, 當下者反高, 恐非一代制作之器。 若依此而制, 則決無諧協之理, 故謹依中國黃鍾之聲, 以制黃鍾之管, 因而損益, 以成十二律管, 吹以協律, 據此而製。

命入中國磬一架、新磬二架、簫管方響等器, 竝新製律管協之。 上曰: "中國之磬, 果不諧協, 今造之磬, 似爲得正。 磬石之得, 已爲一幸, 今聽聲音, 亦甚淸美, 制律較音, 出於不意, 予甚喜之。 但夷則一枚, 其聲差高, 何哉?" 卽審視而啓曰: "限墨尙在。 未盡磨也。" 退而磨之, 墨盡而聲乃正。 磬成之後, 命專掌制樂之任, 自丙午秋至戊申夏, 攻南陽之石, 宗廟永寧殿編磬及諸祀通用編磬、登歌編磬特磬成, 共五百二十八枚。 上又命曰: "予欲創制朝會雅樂, 立法創制, 自古爲難, 君所欲爲, 臣或沮之; 臣所欲爲, 君或不聽, 雖上下皆欲, 而時運不利。 今也我志先定, 國家無事, 宜盡心成之。" 於是又造朝會樂磬於南陽, 鑄朝祭樂鍾於漢江, 令董役, 又以大護軍南汲貳其事。 至是, 始用軒架雅樂及舞童之伎, 不用女樂, 隣國使客之宴, 亦不用女樂云。


  • 【태백산사고본】 18책 5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35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