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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1월 20일 을묘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격구를 폐하자는 사간원의 청을 윤허하지 않다

정사를 보았다. 사간원에서 계하기를,

"신 등이 가만히 병조의 공문서를 보니, 무과(武科)의 시취(試取)와 봄·가을의 도시(都試)에 모두 격구(擊毬)의 재주를 시험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졸들로 하여금 무예(武藝)를 연습하게 하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격구(擊毬) 유희는 고려가 왕성하던 때에 시작된 것으로서, 그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한갓 놀며 구경하는 실없는 유희의 도구가 되어, 호협(豪俠)한 풍습이 날로 성(盛)하여졌으나, 국가에 도움됨이 있었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당(唐)나라의 축국(蹴鞠) 격환(擊丸)이 다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비록 전투(戰鬪)를 익힌다고 하나, 다 유희하는 일이 될 뿐 만세(萬世)의 본보기가 될 만한 제도는 아닙니다. 선유(先儒) 주희(朱熹)도 또한 타구(打毬)는 무익한 일이므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태종 공정 대왕(恭定大王)께서 무예(武藝)의 기술을 훈련시키는 데 갖추어 실시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일찍이 이 격구에는 미치지 않았으니, 어찌 무익하다고 생각되어 실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 나라는 무예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이미 기사(騎射)와 창(槍) 쓰는 법이 있으니, 어찌 격구(擊毬)의 유희를 하여야만 도움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법은 다만 지금에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격구의 법을 정지(停止)하여 장래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격구하는 일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언(極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니, 지사간(知司諫) 고약해(高若海)가 대답하기를,

"신 등이 〈격구를〉 폐지하자고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성명(聖明)하신 이때에는 비록 폐단이 있기에 이르지 않으나, 뒷세상에 혹시나 어리석은 임금이 나서 오로지 이 일만을 힘쓰는 이가 있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옛 시[古詩] 한 귀절을 외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은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 때에 처음 시작하여 한(漢)나라당나라를 거쳐 송(宋)나라·원(元)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 있었던 것이니, 저들이 어찌 폐단을 알지 못하고 하였겠는가. 다만 무예를 익히고자 하였을 뿐이다. 전조의 말기에도 또한 이 일을 시행하였으나, 그들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 어찌 격구의 탓이겠는가. 내가 이것을 설치한 것은 유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군사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격구하는 곳이 성밖에 있으니,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

하였다.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의 관원들이 나간 뒤에, 임금이 대언(代言)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이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 참으로 말타기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태종(太宗) 때에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유고(有故)하여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좌부대언(左副代言) 김자(金赭)가 대답하기를,

"전조의 말기에 모여서 격구를 보았으므로 인하여 음란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시대에는 비록 격구를 보지 않으나, 어찌 음란한 여자가 없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0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책 702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군사-병법(兵法)

○乙卯/視事。 司諫院啓: "臣等竊觀兵曹關, 武科試取及春秋都試, 幷試擊毬之藝, 此令士卒鍊習武藝之深慮也。 然吾東方擊毬之戲, 始於前朝盛時, 及其季世, 徒爲遊觀戲謔之具, 而豪俠之習日盛, 未聞有補於國家也。 之蹴(掬)〔鞠〕 擊丸, 亦皆類此。 雖曰習戰, 皆爲戲事, 非萬世之規範也。 先儒朱熹亦以打毬爲無益之事, 而不可爲也。 我太祖康獻大王、太宗恭定大王訓鍊武藝之術, 無不備擧, 而曾不及此, 豈非慮無益而不擧乎? 今我國家於訓鍊武藝, 旣有騎射弄槍之習, 何待擊毬之戲, 然後爲有助乎? 然則是法也, 非徒無益於當時, 恐有流弊於後世也。 伏望停擊毬之法, 以杜將來之弊。"

上曰: "予謂擊毬之事, 不必如此極言之。" 知司諫高若海對曰: "臣等之請罷, 無他, 恐弊生於後世。 方今聖明之時, 雖未至於有弊, 後世倘有暗主出而專務此事, 則其弊不淺。" 仍誦古詩一句, 上曰: "此法創自黃帝, 歷以至, 代各有之, 彼豈不知弊而爲之? 祇欲其習武耳。 前朝之季, 亦行此事。 其亡國, 豈擊毬之所致哉? 予之設此, 非爲戲謔, 欲令軍士習武藝爾。 且擊毬之所, 在於郭外, 何弊之有?" 政府、六曹、臺諫出。 上謂代言等曰: "予在潛邸, 嘗試此事, 眞習御之一助。 在太宗時欲爲之, 適有故未果。" 左副代言金赭對曰: "前朝之季, 聚見擊毬, 因有淫亂之風。" 上曰: "在今時雖不擊毬, 其無淫女乎?"


  • 【태백산사고본】 10책 30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책 702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군사-병법(兵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