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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5월 5일 병인 1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상왕과 함께 종루에서 석전을 보고 이긴 척석군에게 상을 주다

상왕이 종루(鍾樓)에 나아가 각(角)을 불게 하니, 군사들이 즉시 달려와서 영(令)대로 진(陳)을 쳤다. 임금이 창덕궁에서 각(角)으로써 마주 응하게 하였다. 상왕이 판병조사(判兵曹事) 이원(李原)과 병조 참의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창덕궁에 가서 임금을 맞아 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이에 창덕궁에 입직(入直)한 군사를 거느리고, 검은 옷을 입고, 오대(烏帶)를 띠고 우군(右軍)의 뒤로 나아가니, 상왕이 미리 병조 참판 이명덕에 명하여 아패(牙牌)를 가지고 군문(軍門)에 나가서 영접하여 들어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즉시 말에서 내려 명을 받고, 도로 말에 올라 군문(軍門)에 들어가서 상왕과 함께 종루에서 석전을 보았다. 상왕이 친히 이원·조연·이화영(李和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의 장수로 삼아 직문기(織紋旗)를 내려 주었다. 군사들이 이미 영을 듣고는 감히 항오(行伍)를 이탈하여 문란한 행동을 하는 자가 없었다. 조금 후에 계엄을 해제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석전을 보는데, 척석군을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고, 잘 싸우는 자를 모집하여 이에 충당하였다. 좌군은 흰 기[白旗]를 세우고, 우군은 푸른 기[靑旗]를 세워 표지(標識)로 하였는데, 서로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영을 내리기를,

"감히 기를 넘어가면서 끝까지 추격하지는 못한다. 기를 빼앗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하고, 이긴 편은 후하게 상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좌군은 강하고 우군은 약하여 번번이 이기지 못하니, 권희달·하경복이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좌군이 굳게 막고 돌이 비오듯하여, 희달이 돌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달아났다. 기사가 이를 분하게 여겨 고함을 치면서 추격하니, 좌군이 무너지므로, 이에 흰 기를 빼앗아서 바쳤다. 상왕이 좌군 패두(牌頭) 방복생(方復生)을 불러서 말하기를,

"기를 빼앗긴 것은 치욕(恥辱)이니, 마땅히 다시 힘을 다할 것이다."

하였다. 복생 등이 용기를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누 아래에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면서 종친·의정·육조 판서 등이 모셨다. 척석군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주고, 면포 1백 필, 정포(正布) 2백 필과 저화(楮貨) 4천 장을 상으로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31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군사-병법(兵法) / 풍속-풍속(風俗) /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丙寅/上王御鍾樓吹角, 軍士登時趨令, 結陣如令, 上在昌德宮應之以角。 上王命判兵曹事李原、兵曹參議尹淮昌德宮迎待。 上乃率昌德宮入直軍士, 以黑衣、烏帶, 詣右軍之後。 上王預令兵曹參判李明德齎牙牌, 出軍門迎入, 上卽下馬承命, 還上馬入軍門, 同御鍾樓觀之。 上王親命李原趙涓李和英爲三軍帥, 賜織紋旗。 軍士旣聽令, 無敢失伍亂行者。 旣而命解嚴, 仍觀石戰。 以擲石軍, 分爲左右隊, 募善戰者充之。 左立白旗, 右立靑旗爲標, 相去二百餘步。 令曰: "毋敢越旗窮逐, 以奪旗爲勝, 勝者厚賞。" 左强右弱, 每不勝。 權希達河敬復與騎士擊之, 左軍固拒, 石如雨。 希達中石墜馬而走, 騎士憤之, 呼叫逐之, 左軍潰, 乃奪白旗以獻。 上王召左軍牌頭方復生曰: "奪旗, 辱也。 宜更勠力。" 復生等奮擊大勝。 置酒樓下奏樂, 宗親、議政、六曹判書等侍。 賜擲石軍酒肉, 賞緜布百匹、正布二百匹、楮貨四千張。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31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군사-병법(兵法) / 풍속-풍속(風俗) /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