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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2일 신유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대간·형조에서 황희를 국문하도록 청하다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황희(黃喜)를 머물러 두고 그 범한 바를 국문(鞫問)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형조에 하지(下旨)하였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황희(黃喜)가 난적(亂賊) 구종수(具宗秀)의 범한 바를 가볍게 논하였고, 모든 물음에 대답하기를 또 정직하게 말하지 않아서 신자(臣子)의 도리에 어그러짐이 있었다. 마땅히 유사(攸司)에 내려서 율(律)에 의하여 시행하여야 하나, 그러나, 내가 오히려 차마 시행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묻지 않는다. 다만 직첩(職牒)을 거두고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자손(子孫)을 서용하지 말라."

조말생(趙末生)·이명덕(李明德)에게 명하여 박은(朴訔)·한상경(韓尙敬)·이원(李原) 등에게 전교(傳敎)하였다.

"여러 공신(功臣)이 있고 육조(六曹)가 있으나 홀로 삼경(三卿)을 부른 것은 친히 비밀스러운 의논을 하고자 함이다. 우리 나라의 법에는 대간(臺諫)에서 일을 말하여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 강청(强請)하기를 마지 않으니, 임금으로 하여금 궤이(詭異)한 이름을 얻게 만들고, 임금과 대간(臺諫)의 사이가 기름이 물에 뜨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혹은 대간(臺諫)의 청(請)을 따르지 않는데, 어찌 죄가 있는 자를 용서하겠는가마는, 다만 죄인(罪人)으로 하여금 그 정상에 합당하게 하여 천심(天心)에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원수(元首)308)고굉(股肱)309) 은 한몸인데, 대신(大臣)이 대간(臺諫)에서 일을 말할 적에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시비(是非)를 말하지 않으니, 이것이 유감이다 지금 김한로(金漢老)곽선(郭璇)의 첩(妾)을 몰래 동궁(東宮)에 출입시켜 아이를 가지도록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마음은 대개 사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친 아비인데, 어찌 나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김한로를 없애 버렸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내게 불충(不忠)해서였겠는가? 다만 미혹(迷惑)하고 유벽(幽僻)310)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내가 김한로를 가둔 것은 대간(臺諫)의 청(請) 때문이 아니라, 문안(文案)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죄의 경중(輕重)은 오직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또 내관(內官) 이전기(李全奇)가 몰래 그 사이에 음모(陰謀)하였으니, 동궁전 여관(東宮殿女官) 모란(牧丹)이 일찍이 아이를 가져 밖으로 나갔는데, 어리(於里)로 하여금 그 이름을 사칭하고 몰래 들어오도록 음모하였다. 내가 모두 죽이고자 한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양귀비(楊貴妃)가 화란(禍亂)의 근원이 되니, 여러 신하들이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하물며 내가 아비로서 어찌 죽일 수가 없겠느냐?"

박은 등이 대답하였다.

"성상의 하교(下敎)가 옳습니다. 어리(於里)가 일찍이 지아비를 배반하였으니, 이 죄로 죽일 수가 있습니다. 대간(臺諫)의 언사(言辭)가 만약 의리에 합하지 않는다면 신 등이 어찌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또 전교(傳敎)하였다.

"황희(黃喜)가 이조 판서(吏曹判書)였을 때 내가 찬성(贊成)과 황희를 불러서 구종수(具宗秀) 등의 작란(作亂)한 사건을 의논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世子)가 나이가 어려서입니다. 구종수는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다른 날 조계(朝啓)에서 내가 황희를 보고 말하기를, ‘인신(人臣)으로 자손(子孫)을 위한 계책(計策)을 쓰지 않는 자가 없다. 임금이 늙었다고 하여 이를 버린다면 장차 어찌 되겠는가?’하니, 황희가 얼굴을 숙이고 들었다. 황희는 오랫동안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민무구(閔無咎) 등을 주멸(誅滅)하는 일을 주모(主謀)하여 민씨(閔氏) 일족과 원수를 맺었는데, 세자(世子)에게 아첨하고 교결(交結)하여서 스스로 안전할 계책을 삼고자 하였으니, 그 간사함이 심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내쫓아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가 올려서 형조 판서로 삼았는데, 그를 다시 보기가 싫어서 옮겨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삼았다. 내가 황희에게 대해서는 사람이 타인(他人)의 자식을 양육(養育)하는 것같이 하였고, 또 부모가 자식을 무육(撫育)하여 기르는 것같이 하였다. 대언(代言)에 구임(久任)311) 하였다가 전직(轉職)시켜 성재(省宰)312) 에 이르게 한 것은 공신(功臣)으로 비(比)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는 날에 황희가 따라 죽기를 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길재(吉再)는 전조(前朝)에 주서(注書)의 직임을 받았으나, 오히려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 조정을 섬기지 아니하였다. 나는 황희가 나에 대하여 바로 이와 같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난 임인년에 태종(太宗)이 우리 전하(殿下)313) 에게 이르기를,

"이직(李稷)·황희는 비록 죄를 범하였으나 일에 익숙한 구인(舊人)이므로 버릴수 없으니 가히 불러서 쓸 만하다."

하였는데, 드디어 소환(召還)하도록 명하여 우리 전하(殿下)가 뒤에 모두 크게 썼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23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왕실-비빈(妃嬪) / 인물(人物)

  • [註 308]
    원수(元首) : 머리. 곧 임금.
  • [註 309]
    고굉(股肱) : 팔다리. 곧 중신(重臣).
  • [註 310]
    유벽(幽僻) : 성질이 깊고 편벽됨.
  • [註 311]
    구임(久任) :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게 함.
  • [註 312]
    성재(省宰) : 재상(宰相).
  • [註 313]
    전하(殿下) : 세종(世宗).

○辛酉/臺諫、刑曹請留黃喜, 問其所犯, 不許, 下旨刑曹曰: "判漢城府事黃喜輕論亂賊具宗秀之所犯, 凡對問又不直言, 有乖臣子之義。 當下攸司, 依律施行, 然予尙不忍, 置而勿問, 只收職牒, 廢爲庶人, 子孫不敍。" 命趙末生李明德, 傳敎朴訔韓尙敬李原等曰: "有諸功臣焉, 有六曹焉, 獨召三卿者, 欲爲親密之議也。 我國家之法, 臺諫有言事而君不從, 則强請不已, 使君得詭異之名, 君與臺諫, 如油浮水。 然予或不從臺諫之請, 豈赦有罪? 但欲使罪當於其情, 合於天心耳。 且元首、股肱一體, 大臣於臺諫言事, 豈不知之? 然不言是非, 是可憾也。 今漢老郭璇之妾, 潛出入東宮, 至使有息, 其心蓋愛壻也。 予親父也, 豈不愛吾子? 使無漢老, 不至於此。 然豈不忠於我? 但以迷惑幽僻之致然也。 予囚漢老, 非以臺諫之請, 欲成文案, 使人知之。 罪之輕重, 惟在予心。 又內官李全奇潛謀其間, 殿女牡丹曾有身出外, 使於里誣爲其名, 陰謀潛入, 予欲皆殺之。 玄宗時, 以楊貴妃爲禍根, 群臣請殺之。 況予以父, 豈不能殺?" 等對曰: "上敎是矣。 於里已曾背夫, 此罪可殺。 臺諫言辭, 若不合於義, 臣等安敢不言?" 上又傳敎曰: "黃喜爲吏曹判書時, 予召贊成及, 議宗秀等作亂之事, 答曰: ‘世子年少, 宗秀不過鷹犬之事。’ 予則下淚。 他日朝啓, 予目曰: ‘人臣不爲子孫之計者無矣。 以君爲老而棄之, 將奈何?’ 側面而聽。 久爲知申事, 主謀誅無咎等, 與族結怨, 欲媚結世子, 爲自安計, 其奸甚矣。 故予黜任平安道, 陞爲刑曹判書, 而惡其更見, 遷爲判漢城。 予於也, 如人之養育他人之子, 又如父母撫育長養, 久任代言, 轉至省宰, 以功臣爲比, 而嘗謂: ‘予薨之日, 願從死矣。’ 吉再於前朝受注書之任, 猶以爲: ‘忠臣不事二君。’ 不事我朝, 予不意之於我, 乃如是也。" 越歲壬寅, 太宗謂我殿下曰: "李稷黃喜雖有犯, 皆諳鍊舊人, 不可棄也, 可召用之。" 遂命召還, 我殿下後皆大用焉。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23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왕실-비빈(妃嬪)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