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에 지석문을 묻다
임금이 좌대언(左代言) 이조(李慥)를 건원릉(健元陵)에 보내어 지석(誌石)을 묻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영락(永樂) 6년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께서 갑자기 군신(群臣)을 버리시었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哀慕)하심이 망극(罔極)하여 양암(諒闇)209) 으로 예(禮)을 다하시고, 삼가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봉상(奉上)하여 이해 9월 초9일 갑인에 성(城) 동쪽 양주치(楊州治) 검암촌(儉巖村) 건원릉(健元陵)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예(禮)이다. 삼가 선원(璿源)210) 의 유래를 상고하면 신라씨(新羅氏)로부터 대대로 달관(達官)이 있고 누인적덕(累仁積德)하여 뒤의 경사(慶事)를 넉넉하게 하였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미쳐 비로소 원(元)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어 4세(世)를 습작(襲爵)하였는데, 사졸(士卒)이 즐겁게 붙따랐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젊어서부터 기국(器局)이 있어 용략(勇略)이 뛰어났고, 활달(豁達)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度量)이 있어, 지극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다. 일찍이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여러 벼슬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고, 중외(中外)에 출입하여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국민을 편안하게 하였다. 군사를 행하는 것이 정숙(整肅)하여 추호(秋毫)도 범하는 바가 없었고, 대소 백여 번을 싸웠는데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왕성(王城)을 수복(收復)한 것과, 임인년에 납씨(納氏)211) 를 쫓은 것과, 경신년에 운봉(雲峰)의 대첩(大捷)이 더욱 칭도(稱道)되는 것이다. 공민(恭愍)이 사자(嗣子)가 없이 갑자기 죽으매, 그 신하 임견미(林堅味) 등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토전(土田)을 강탈하여, 탐오(貪汚)하는 바가 한도가 없었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분(憤)하게 여겨 주륙(誅戮)을 행하고 우리 태조(太祖)로 수시중(守侍中)을 삼았으니, 인망(人望)을 따른 것이었다. 영(瑩)이 또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망령되게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려고 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경상(境上)에 핍박(逼迫)해 보내었다. 우리 태조께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고금(古今)에 통한 의리이다. 상국(上國)에 득죄(得罪)하고 생민(生民)에게 화(禍)를 끼치는 것보다는 권신(權臣)을 제거하여 한 나라를 편안히 하는 것이 낫지 않으냐?’ 하고, 곧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의리에 의거하여 회군(回軍)하고 영(瑩)을 잡아 물리쳐서 그 죄를 바루고, 왕씨(王氏)의 종친(宗親)인 공양군(恭讓君)을 가려 왕으로 세우고, 충성을 다해 광보(匡輔)하여 어진 인재를 임용하고,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경계(經界)를 바루고 쓸데없는 관원[冗官]을 태거(汰去)하여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고 기강(紀綱)을 세워, 규모(規模)가 넓고 커서 전조(前朝)의 폐정(弊政)을 모조리 제거하니, 중외(中外)의 민심(民心)이 흡연(翕然)히 쏠리었다. 공양(恭讓)이 혼미(昏迷)하고 꺼리는 바가 많아서 불리(不利)한 것을 꾀하려 하므로, 홍무(洪武) 25년 임신(壬申) 가을 7월에 충신(忠臣)·의사(義士)가 말을 합[合辭]하여 추대(推戴)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군정(群情)에 못이겨서 마지못해 보위(寶位)에 오르고, 밀직(密直) 신(臣) 조반(趙胖)을 보내어 명나라 조정에 아뢰었다. 이에 고황제(高皇帝)의 성지(聖旨)를 받아 국호(國號)를 고치는 것을 허락하여 조선(朝鮮)의 칭호를 회복하였다. 무인년 가을 9월에 병환이 있어 상왕(上王)에게 내선(內禪)하였고, 경진년 겨울 11월에 상왕이 또한 병환이 있어 또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자, 우리 태조께 존호(尊號)를 올려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였다. 춘추(春秋)는 74세이고 왕위(王位)에 있은 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듣지 못하고 영양(榮養)을 받은 것이 11년이었으니, 종시(終始)의 애영(哀榮)이 이것으로 갖춘 것이다.
수비(首妃)인 한씨(韓氏)는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휘(諱) 경(卿)의 딸인데,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추시(追諡)하였다. 6남(男) 2녀(女)를 낳았는데, 맏은 이방우(李芳雨)로 진안군(鎭安君)을 봉하였으나 먼저 죽었다. 다음은 상왕(上王)이고, 우리 전하(殿下)가 다섯째이다. 방의(芳毅)는 세째인데 익안 대군(益安大君)을 봉했으나 역시 먼저 죽었다. 이방간(李芳幹)은 네째인데 회안 대군(懷安大君)을 봉했고, 이방연(李芳衍)은 여섯째인데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딸의 맏이는 경순 궁주(慶順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상왕(上王)은 적자(嫡子)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靜妃) 민씨(閔氏)는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휘(諱) 제(霽)의 딸인데, 4남(男) 4녀(女)를 낳았다. 아들 맏이는 세자(世子) 이제(李禔)이고, 다음은 이보(李𥙷)인데 효령군(孝寧君)이며, 다음은 금상(今上) 【휘(諱).】 인데 충녕군(忠寧君)이고, 다음은 어리다. 딸 맏이는 정순 궁주(貞順宮主)인데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출가하였다. 역시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인데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인데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62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209]
○乙卯/上遣左代言李慥于健元陵, 下誌石。 其文曰:
永樂六年五月二十四日壬申, 我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奄棄群臣。 我殿下哀慕罔極, 諒闇盡禮, 謹率群臣, 奉上尊號, 以是年九月初九日甲寅, 安厝于城東楊州治之儉巖村 健元陵, 禮也。 謹按璿源所自, 繇新羅氏以來, 世有達官, 累仁積德, 以裕後慶。 逮皇高祖穆王始仕元朝, 爲千夫長, 四世襲爵, 士卒樂附。 我太祖少蘊器局, 勇略絶倫, 豁達有濟世之量, 至仁好生, 出於天性。 早事高麗 恭愍王, 累官至將相, 出入中外, 屢立大功, 以安國民。 行師整肅, 秋毫無犯, 大小百餘戰。 辛丑之殲紅賊, 收復王城, 壬寅之走納氏, 庚申之捷雲峯, 尤所稱道者也。 恭愍無嗣暴薨, 其臣林堅味等, 專擅國政, 奪攘土田, 貪汚無度。 侍中崔瑩憤行誅戮, 以我太祖爲守侍中, 從人望也。 瑩又不學, 妄興師旅, 謀欲攻遼, 以我太祖爲右軍都統使, 逼遣境上。 我太祖與諸將議曰: "以小事大, 古今之通義。 與其得罪上國, 貽禍生民, 豈若除去權臣, 以安一國乎?" 乃與諸將, 仗義回軍, 執退瑩, 以正其罪; 選立王氏宗親恭讓君, 盡忠匡輔, 任用賢才, 革私田以正經界, 汰冗官以重名器, 立經陳紀, 規模宏大, 前朝弊政, 靡不盡除, 中外民心, 翕然歸附, 而恭讓昏迷多忌, 將謀不利。 洪武二十五年壬申秋七月, 忠臣義士, 合辭推戴我太祖, 讓至再三, 迫於群情, 勉登寶位。 遣密直臣趙胖, 聞達朝廷, 欽蒙高皇帝聖旨, 許更國號, 以復朝鮮之稱。 戊寅秋九月, 不豫, 內禪于上王; 庚辰冬十一月, 上王亦不豫, 又禪于我殿下, 進尊號我太祖爲啓運神武太上王。 春秋七十四歲, 在王位七年, 老不聽政, 以享榮養, 十有一年, 終始哀榮, 斯其備矣。 首妃韓氏, 贈領門下府事諱卿之女, 先薨, 追諡承仁順聖神懿王后。 誕六男二女: 長曰芳雨, 封鎭安君, 先卒, 次上王, 我殿下爲第五, 曰芳毅爲第三, 封益安大君, 亦先卒。 曰芳幹爲第四, 封懷安大君; 曰芳衍爲第六, 登科不祿。 女長曰(慶順宮主)〔慶愼宮主〕 , 適上黨君 李佇, 非一李也。 次曰慶善宮主, 適靑原君 沈淙。 上王無嫡嗣。 我中宮靜妃 閔氏, 驪興府院君諱霽之女, 誕四男四女: 男長, 世子禔, 次(補)〔𥙷〕 孝寧君, 次今上諱忠寧君, 次幼。 女長貞順宮主, 適淸平君 李伯剛, 亦非一李。 次慶貞宮主, 適平壤君 趙大臨; 次慶安宮主, 適吉川君 權跬; 次幼。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62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