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에게 ‘강헌’이라는 시호를 내린다는 황제의 고명
기보·임관이 사시고(賜諡誥)를 받들고 왕궁(王宮)에 이르렀다. 백관 분사(百官分司)가 태평관에 이르러 공복(公服)을 입고 앞에서 인도하고, 임금이 면복(冕服)을 입고 군신을 거느리고 대문 밖에 나가 맞이하였다. 백관은 전정(殿庭)에 서립(序立)하였다. 사신이 전(殿)에 올라 남향하여 서서 고문(誥文)을 탁자 위에 놓았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사배(四拜)하니, 사신이 고문(誥文)을 임금에게 주었다. 임금이 다 보고 나서 다시 탁자 위에 놓고 또 사배(四拜)하니, 사신이 나갔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문 밖에 나가 전송하고, 임금이 곧 최복(衰服)을 입고 문소전(文昭殿)에 나갔다. 유사(有司)가 황지(黃紙)로 고명(誥命)을 써서 신좌(神座) 앞에 놓고 분황 제례(焚黃祭禮)를 행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짐(朕)이 공경히 천명(天命)에 응하여 만방(萬方)을 통어(統御)한다. 수정(綏靖)177) 을 넓혀서 인심(人心)에 흡족하게 하고, 현덕(賢德)을 표(表)하여 치리(治理)를 일으켜서 사해(四海) 안팎을 평등하게 보고 공평하게 한다. 하물며 훌륭한 번신(藩臣)이 죽은 때를 당하여 반드시 포장(褒奬)하고 애휼(愛恤)하는 것을 융성히 하여, 정표(旌表)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을 보인다. 고(故)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 【휘(諱).】 는 마음 가지기를 장엄(莊嚴)하게 하고 착한 것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 황고(皇考)를 받들어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事大)하는 마음을 엄하게 하여, 이 동번(東藩)을 지켜 지경(地境)을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도(道)를 힘썼다. 오직 조정(朝廷) 명령을 들어서 세월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고, 자극(紫極)178) 의 지존(至尊)으로 충성을 펴고 현토(玄菟)의 땅에 복(福)을 가져왔다. 바야흐로 정사(政事)를 사퇴함을 당하여 편안하고 한가함을 이루려 하였는데, 마침내 하늘이 남기려고 하지 않아서 갑자기 길이 서거(逝去)하였다. 그 훈업(勳業)과 행적(行績)을 따져 보면 마땅히 포양(褒揚)이 있어야 하겠다. 시법(諡法)에 백성을 무휼하여 안락[撫民安樂]하게 한 것을 ‘강(康)’이라 하고, 착한 일을 행하여 기록할 만한 것[行善可記]을 ‘헌(獻)’이라 한다. 이제 그대의 시호(諡號)를 특별히 ‘강헌(康獻)’이라고 준다. 영상(靈爽)179) 이 어둡지 않으니 흠향하여 받기 바란다. 공경할지어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53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77] 수정(綏靖) : 백성을 편안하게 함.[註 178] 자극(紫極) : 임금의 어좌(御座).[註 179] 영상(靈爽) : 신령의 밝음.
○甲戌/祁保、林觀, 奉賜諡誥至王宮, 百官分司至太平館, 以公服前導。 上以冕服, 率群臣出迎于大門外, 百官序立殿庭, 使臣升殿向南立, 置誥文于卓上。 上率百官四拜, 使臣以誥文授上, 上覽訖, 復置卓上, 又四拜。 使臣出, 上率百官送于大門外。 上卽以衰服詣文昭殿, 有司用黃紙書誥命, 置神座前, 行焚黃祭禮。 其文曰:
朕祗膺天命, 統御萬方。 弘綏靖以洽人心; 表賢德而興治理。 四海內外, 一視惟公。 矧迺藩臣之良, 當玆殞歿之際, 必隆褒恤, 以示旌嘉! 故朝鮮國王 李諱, 秉心克莊, 好善不倦。 奉我皇考, 嚴畏天事大之心; 守玆東藩, 務保境安民之道。 惟朝命之是聽, 滋歲久而不渝。 攄忠紫極之尊, 覃福玄菟之地。 方當謝政, 以遂優閑, 竟不憖遺, 遽然長逝。 疇其勳行! 宜有褒揚。 諡法, 撫民安樂曰康, 行善可記曰獻, 今特賜爾諡曰康獻。 靈爽不昧, 庶克歆承。 欽哉!
議政府率百官陳賀。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53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