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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5월 16일 경술 2번째기사 1405년 명 영락(永樂) 3년

이행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을 예전과 같이 조선에서 관할하도록 청하다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행(李行)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영락 3년 3월 11일에 왕교화적(王敎化的)이 칙유(勅諭)를 흠봉(欽奉)하고 본국(本國)에 이르렀으므로, 이에 배신(陪臣) 곽경의(郭敬儀)를 차임(差任)하여 칙유(勅諭)에 따라 동행(同行)시켜 보냈습니다.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여칭(呂稱)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오면, ‘현재 흠차(欽差)된 천호(千戶) 왕교화적(王敎化的) 등이 동 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파아손(把兒遜)·착화(着和)·답실(答失) 등을 초유(招諭)하여 장차 조정(朝廷)에 입조(入朝)케 하려고 하니, 맹가첩목아가 대답하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올적합(兀狄哈)과 서로 싸워서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다가 본국(本國)에 이르렀는데, 이제 만약 경사(京師)에 가게 되면, 올적합 등이 틈을 타서 가속(家屬)을 노략(擄掠)하여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며, 또 바닷가에는 왜구(倭寇)가 내왕(來往)할 것이니, 이 때문에 걱정하고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기에, 이 장계(狀啓)를 듣고 신달(申達)하옵니다.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맹가첩목아 등은 처음에 올적합의 침략으로 인하여 자리를 피해 본국(本國) 동북면(東北面)의 경원(慶源)·경성(鏡城) 땅에 이르러 거주(居住)하였는데, 차역(差役)을 당하여 왜적(倭賊)을 방어한 공(功)이 있으므로, 경성 등처(鏡城等處) 만호(萬戶)의 직(職)을 맡겨 지금 몇 해가 지났습니다. 영락 2년 5월에 흠차 사신(欽差使臣) 동녕위 천호(東寧衛千戶) 왕수(王脩)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사온데, ‘삼산(三山)·독로올(禿魯兀) 등 열 곳의 여진(女眞) 백성을 초유(招諭)한다.’하였고, 홍무 21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받자와, ‘공험진(公嶮鎭) 이북은 요동(遼東)으로 환속(還屬)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에 붙여 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배신(陪臣) 김첨(金瞻)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가서 주달하게 하였사온데, 그해 10월 11일에 〈김첨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공경히 칙서(勅書)를 받자오니, ‘삼산 천호(三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열 곳의 인원(人員)을 허락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臣)이 일국(一國)의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감격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긴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高皇帝)의 조지(詔旨)를 받았사온데, 화외(化外)069) 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070) 하셨고, 근자에 또 칙지(勅旨)를 받들어 삼산(三散) 등 10처(處)의 인원(人員)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답실(答失) 등은 관하(管下) 1백 80여 호(戶)와 함께 현재 공험진(公嶮鎭) 이남(以南) 경성(鏡城) 지방에 살고, 파아손(把兒遜)착화(着和) 등은 관하(管下) 50여 호(戶)와 함께 현재 공험진 이남 경원(慶源) 지방에 살고 있으므로, 각각 호적(戶籍)에 붙여서 차역(差役)에 종사하게 하였으니, 모두 허락하여 주신 10처(處)의 지면(地面)에 매여 있어 성조(聖朝)의 동인지내(同仁之內)에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상항(上項)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대로 편안히 생업(生業)에 종사하게 하여 길이 성조(聖朝)의 은택(恩澤)을 입게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2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69]
    화외(化外) : 치화(治化)가 미치지 않는 곳.
  • [註 070]
    일시동인(一視同仁) :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함.

○遣藝文館大提學李行如京師。 奏曰:

永樂三年三月十一日, 王敎化的欽奉勑諭到國。 欽此, 差陪臣郭敬儀欽依伴送去後, 據東北面都巡問使呂稱狀啓: "見爲欽差千戶王敎化的等, 招諭猛哥帖木兒把兒遜着和答失等, 將赴朝廷, 有猛哥帖木兒回稱: ‘當初我與兀狄哈相鬪, 挈家流移, 到來本國。 今若赴京, 慮其兀狄哈等乘間擄掠家小, 以快其讎。 又濱大海, 倭寇來往。 以此憂疑未決。’ 聽此, 狀啓申達。" 得此照得, 猛哥帖木兒等, 始緣兀狄哈侵擾, 避地到來本國東北面慶源鏡城地面居住。 當差役因防有功, 就委鏡城等處萬戶職, 經今有年。 永樂二年五月間, 奉欽差東寧衛千戶王脩齎勑: "招諭三散禿魯兀等十處女眞人民。" 欽此竊照, 洪武二十一年間, 欽蒙太祖高皇帝聖旨準請, 公嶮鎭迤北, 還屬遼東; 公嶮迤南至鐵嶺, 仍屬本國。 因差陪臣金瞻, 齎文奏達, 當年十月十一日, 回自京師, 欽奉勑書: "三散千戶李亦里不花等十處人員準請。" 欽此, 臣與一國臣民感激不已。 竊念小邦, 臣事聖朝以來, 累蒙高皇帝詔旨, 不分化外, 一視同仁; 近又欽蒙勑旨, 三散等十處人員準請。 竊詳猛哥帖木兒答失等幷管下一百八十餘戶, 見居公嶮鎭迤南鏡城地面; 把兒孫着和等幷管下五十餘戶, 見居公嶮鎭迤南慶源地面, 各各附籍當差。 俱係欽蒙準請十處地面, 皆在聖朝同仁之內, 伏望聖慈許令上項人等, 仍舊安業, 永霑聖澤。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2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