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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1월 16일 갑자 2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예문춘추관 태학사 유구의 졸기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유구(柳玽)가 졸(卒)하였다. 구(玽)진양(晉陽) 사람인데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유혜방(柳惠方)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제수받았다.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왕경(王京)을 함락시키니, 왕이 남쪽으로 행(行)하여 이천(利川)에 이르렀다. 구(玽)가 먼저 농장(農庄)에 이르러 통술[罇酒]과 들노루[野獐]를 거가(車駕) 앞에 드리니, 현릉(玄陵)001)유숙(柳淑)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구(玽)의 오늘의 뜻을 잊지 말라."

이때로부터 알아줌을 입어 벼슬을 거쳐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계축년에 나가서 경상도를 안찰(按察)하고, 들어와서 우상시(右常侍)가 되었으며, 경신년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제수 받고, 경오년 봄에 나가서 양광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다. 본조(本朝) 을해년에 미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옮기어 드디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고, 임금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을 삼았다. 정조 진표사(正朝進表使)로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억류를 당하여 병자년 겨울에야 돌아와서 병들어 죽었으니, 나이 64세였다. 아들은 유겸(柳謙)인데, 장차 죽으려 할 때에 경계하였다.

"내가 재주가 없는데 분에 넘치게 성상의 알아주심을 만나, 항상 성상의 덕을 갚지 못하는 것으로 한(恨)을 삼았다. 그러나 나이 60이 넘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유한이 있겠는가? 다만 늙은 어머니가 당(堂)에 계신데 효도를 마치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다. 네가 자식을 거느리고 조모(祖母)를 봉양하기를 내가 있던 날과 같이 하라."

구(玽)의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외식(外飾)을 힘쓰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15면
  • 【분류】
    인물(人物)

○藝文春秋館太學士柳玽卒。 , 晋陽人, 知靈光郡事惠方子。 登第拜監察御史。 歲辛丑冬, 紅賊陷王京, 王南行至利川先至農庄, 以罇酒野獐, 獻于駕前, 玄陵顧謂柳淑曰: "毋忘今日之意。" 自是遇知, 歷官至右司議大夫。 歲癸丑, 出按慶尙, 入爲右常侍。 庚申, 拜密直副使, 庚午春, 出爲楊廣道都觀察使。 及本朝乙亥, 遷政堂文學, 遂至參贊門下府事, 上以爲原從功臣。 以正朝進表使, 赴京被留, 至丙子冬乃還, 病卒。 年六十四。 子。 將終, 戒之曰: "予以不才, 叨遇上知, 常以未報上德爲恨, 然予年過六旬, 位至二品, 亦何憾哉? 但以老母在堂, 未得終孝痛心。 爾率爾子, 奉養祖母, 如予在日。" 爲人勤儉, 不務外飾。 諡靖平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15면
  • 【분류】
    인물(人物)